하북 대법제자
【정견망】
반년 전 나는 극히 나쁜 사상업(思想業)과 외래 정보의 교란을 받아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는데 결국 신사신법(信師信法)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나중에 사상업은 그렇게 심각하진 않았지만 때때로 가볍게 나타났고 또 내 머리를 쉽게 교란했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이런 교란이 나타날 수 있는가? 다른 사람들은 왜 교란받지 않는가? 자신의 어떤 사상염두가 다른 공간의 생명에 부합해 이런 교란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뿌리를 파보니 이것은 원래 자기만족이었다. 매일 3가지 일을 다 하고, 법 공부도 매일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도 매일 하며, 집에 있으면 늘 발정념을 하고, 연공도 수시로 했다. 마치 수련의 일을 모두 하면 된다면서 자기만족을 했다. 바로 이런 자기 만족하는 마음이 다른 공간의 교란을 초래한 것이다. 나는 수련을 임무 완수라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수련은 임무 완수가 아니다! 수련이란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수련은 반본귀진(返本歸真)으로, 사람이 신(神)이 되는 길이며, 대법제자의 수련은 사부님을 도와 법을 바로잡고 중생을 구도하는 것으로, 역사적인 사명과 서약을 지니고 있다! 그냥 하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의 요구는 세 가지 일이다.
첫째는 법 공부와 자신을 잘 닦는 것이다. 법 공부는 날마다 하는데 그러나 무엇을 배었는가? 마음이 조용해졌는가? 매 글자마다 마음에 들어갔는가? 법 공부의 질과 양은 어떠한가? 법 공부를 해서 법을 얻었는가? 나는 자신이 법 공부를 위해 법을 공부했고 법을 얻기 위해 법을 공부하지 않았으며 법 공부를 임무로 여기고 매일 시간을 찾아 법을 공부했을 뿐이다. 나는 또 《전법륜》을 배웠고 또 《각지 설법》도 배웠다. 나는 또 법을 베껴 썼는데 이렇게 하면 마치 법 공부 임무를 완성하는 것 같다.
법을 공부하는 목적은 자신을 잘 수련해 정념(正念)을 강화하는 것이다. 나는 시시각각 법으로 자신을 대조했는가? 두려움, 질투심, 원한심, 색욕심, 안일을 구하는 마음, 이익심, 명을 구하는 마음, 자녀에 대한 정 등을 모두 깨끗이 제거했는가? 잡념과 망념을 모두 닦아 버렸는가?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정념정행(正念正行)했는가? 그 어떤 환경에서도 늘 대법을 실증했는가? 그 어떤 환경에서도 대법을 실증했는가? 가정 환경도 바로잡았는가? 업무 환경을 바로잡았는가? 모두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곧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두 번째 일은 발정념이다. 나는 어떻게 했는가? 매번 앉아서 15분을 견지하면 곧 끝이고 여겼으며 임무를 완성했다고 여겼다. 질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발정념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 중 하나인데 나는 4차례 정시 발정념을 했는가? 아니다. 밤 12시 발정념은 거의 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중시하지 못했다. 이것이 잘한 것인가? 발정념을 더 자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아울러 발정념을 할 때 마음이 순정(純淨)했는가? 강대한 정념을 내보냈는가? ‘산을 쪼갤 수 있음’에 도달했는가? 사부님께서 하라고 요구하신 일에는 반드시 더 깊은 의미와 내함이 아주 깊은데 어느 정도로 중시했는가? 이것은 사부님의 요구와 차이가 얼마나 먼가?
세 번째 일은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이다. 나 역시 동수들과 함께 밖에 나가 진상을 알리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했으니 임무를 완성했다고 여긴 것은 아닌가? 그러나 나는 구도할 수 있는 사람을 다 구도했는가? 우리와 연분이 큰 사람들을 모두 구도했는가? 우리 가족이나 친인을 모두 구도했는가? 친척, 친구, 동창, 동료들을 모두 구도했는가? 아니다. 그럼에도 어찌 일을 했으니 됐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일을 하는 것은 단지 첫걸음일 뿐이며 잘하는 것과 여전히 십만 팔천 리 떨어져 있다!
또 연공을 말해보자. 나는 365일 한결같이 아침 연공을 견지하지 못한다. 게으른 마음, 고생을 두려워하는 마음, 안일을 추구하는 마음에 통제되어 아침에 늘 일어나지 못한다. 일어나지 못하면 나중에 보충 시간을 찾는데, 이렇게 보충하고서도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한다. 가끔 바쁠 때는 연공하지 못하는데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느슨히 하고 연공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만약 어느 날 정진해서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아침 연공을 하면 마치 엄청 대단한 일을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몇십 년 동안 매일 아침 연공을 견지하는 동수들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나는 사부님께서 《정진요지》 〈시간과의 대화〉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이러한 것은 노제자 중에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가장 뚜렷한 표현은, 그들은 늘 사람과 비교하며, 늘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합니다.”
또 이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는”(《각지 설법 9》〈2009년 대뉴욕 국제법회설법〉) 정진상태와 얼마나 먼 거리가 있는가?
시시각각 내 옆에서 제자를 지켜보실 사부님을 생각하니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사부님께 너무 죄송합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해주신 모든 것에 면목이 없고,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감당하신 모든 것에 대해 너무 면목이 없습니다.
나는 문득 내가 교사가 내린 숙제를 하는 것을 학습의 목적으로 여기고, 마치 숙제를 다하면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여기면서, 공부를 잘했는 지 여부는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우리 학생들(나는 중학교 교사다)과 매우 닮았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숙제를 하는 것과 학습을 잘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학생의 표현은 바로 하나의 거울이며 나의 수련상태를 반영한다. 자기 만족과 위로 향상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공간에서 사악이 사상업을 이용해 나를 교란한 원인이다. 자신이 한 것이 아주 차(差)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이런 사상 역시 나의 진념(真念)이 아니다. 또한 다른 공간에서 그것이 나를 교란하는 것을 승인하지 말아야 한다.
현 단계에서 작은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85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