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법(法)을 실증하는 기사를 쓴 지 1년이 넘자 글을 쓰는 사로(思路)에 대한 체험이 있어 동수들과 함께 나눠보고자 한다.
최근에 때로 특정한 주제가 머리에 떠오르면 붓 가는 대로 순조롭게 한편의 글을 쓸 수 있고 그리 힘들지도 않고 반응도 괜찮다. 그런데 막 글을 쓴 후 내가 계획하지 않은 많은 ‘우연들’이 있음을 발견한다.
예를 들면, 얼마 전에 ‘마침’ 인용하기에 적합한 특정한 전통문화 콘텐츠를 읽고 기사에 포함시켰다. 그 안에 언급된 요점도 ‘마침’ 문장의 모 구절과 앞뒤로 호응되어 글의 설득력이 더 좋아진 것을 발견했다. 글이 막 완성된 후 ‘막’ 콘텐츠를 읽어보니 화룡점정(畵龍點睛)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서 주제가 떠오른 순간부터 완성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사실 많은 ‘우연’과 ‘공교로움’ 등은 모두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 모든 것은 다 사부님으로부터 왔음을 깨달았다. 사부님의 가지(加持)가 있었기에 글을 쓰는 과정이 순조롭고 수월하게 느껴진 것이다.
나는 또 이와 반대되는 체험도 있다. 바로 특정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려고 계획했고 그 주제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되어 동수들과 나누고 싶지만 막상 글을 쓰려고 하면 아주 힘들고 때로는 아주 오랫동안 지체된다. 마치 영감이 떠오르지 않거나 동기가 부족한 것 같고 때로는 글을 쓰고 쓰다가 힘들어서 한참을 미루거나, 또는 자신이 쓴 글이 만족스럽지 않고 단어도 적당하지 않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중단하기도 했다.
예전에 이에 대한 나의 인식은 자신에게 의지력이 없다거나 분발할 줄 모른다거나 일을 할 때 꾸준하게 하는 항심(恒心)이 부족하다는 등이었다. 동수들과 교류하고 난 후 나는 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겼다. 내가 인식한 것은 주제를 순조롭게 잘 쓰는 것은 사실 “박이 익어 꼭지가 떨어진 것”으로 다른 공간에서 각종 방면이 이미 성숙했기 때문에 사부님의 가지(加持)하에 단번에 성과를 거둔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쓸 때 힘이 드는 것은 사실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으로 내가 억지로 하거나 힘들게 할 필요가 없으며 일단 잠시 내려놓아야 하는데 아마 나중에 기회가 성숙되면 그때 다시 쓸 수 있다.
이 두 가지 다른 인식에 대해 내가 깨달은 것은 전자(前者)에는 무신론의 그림자가 있는 것으로 바로 사람의 요소를 중시하고 사람의 노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는 또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시 부모님은 늘 나더러 “분발하지 않고” “의지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셨다. 성장한 후 비록 자유로워졌지만 마치 마음속에 당 문화 사유의 ‘부모’가 머물려 끊임없이 자신을 혐오하게 했다.
나 생각에 이는 정말이지 구세력의 험악한 배치인데 일부 사유가 내심 깊이 심어졌고 은연중에 자신을 혐오하고 비난하며 강요하는 등의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고 남을 대하게 하며 보다 나은 방식으로 대하지 못하게 한다. 내가 법에서 깨달은 것은 쇠뿔 끝을 파고드는 선종(禪宗)에 이르면 곧 ‘방할(棒喝)’의 방식으로 하는데 내가 느끼기에 당문화의 사유 역시 오직 ‘방할’만 할 수 있을 뿐 다른 것은 할 줄 모른다.
반면 후자(後者)의 인식은 사실 순응(順應)하는 심태다. 내가 이해하기에 고인(古人)은 일이 성공하려면 ‘천시(天時), 지리(地理), 인화(人和)’가 필요하다고 믿었는데 천지(天地)의 요소가 앞에 있고, 사람의 요소는 뒤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외부 요소의 시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성공할 수 없다고 여겼다. 시기(時機 때와 기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하며 함부로 자신을 비난하거나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면서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법에서 내가 이해한 것은 성냥개비로 이빨을 뽑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아주 간단하고 초라하게 보이지만 효과는 아주 좋은 반면 양의가 이빨을 뽑는 것은 정밀한 기구를 사용하지만 아주 힘들고 또 고통스럽다. 나는 시기(時機)에 순응해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성냥개비로 이빨을 뽑는 것과 같고 억지로 하는 것이 양의가 이빨을 뽑는 것과 같음을 깨달았다.
글 쓰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개인적인 이해로 특정한 주제가 성숙하지 않았다면 우리 공간에서 아마 보아내지 못할 것이다. 또는 아마 다른 공간에서 대응하는 상황이 다를 수 있다. 그중에는 아마 우리 자신의 수련과 법리에 대한 자신의 구체적인 인식 및 자기 내심의 ‘자원’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가령 문화 지식의 내공 차이라든가 서로 다른 시기 동수들의 요구 등 복잡하고 번다한 요소들이 모두 관련된다. 때문에 사부님께서 총체적으로 배치하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저 순응하면 된다.
개인의 작은 인식이니 만약 법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9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