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심(清心)
【정견망】
주지하다시피 사부님께서는 《홍음 6》의 거의 모든 시사(詩詞)에서 무신론(無神論)과 진화론(進化論)의 해악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지만 나는 줄곧 사상(思想)에서 이를 중시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사악한 당이 아무리 어릴 때부터 독소를 주입했다 해도 나는 어려서부터 신(神)을 믿고 진화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줄곧 자신에겐 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수련에서 병목을 느꼈는데, 표현되는 것은 늘 사람의 관념을 완전히 개변하지 못하고, 많은 때 신(神)의 일면, 본성의 일면이 자신을 주재할 수 없었다. 때문에 정진 상태를 유지하기가 몹시 어려웠고 늘 정진과 나태를 반복했다.
최근에 한동안 진지한 사고를 거친 후, 나는 이것이 뜻밖에도 무신론과 진화론이 가져다준 독해(毒害)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비록 내가 신을 믿고 진화론이 거짓임은 알았지만 그것이 초래하는 일부 관념의 해악을 나는 예전에 인식하지 못했다. 지금 이것을 동수들과 나누고자 한다.
1.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는 무신론 관념의 착실한 수련에 대한 교란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 주는데, 공이 올라가지 못하는 근본원인은 ‘수(修)ㆍ련(煉)’ 두 글자에서 사람들이 그 연(煉)만을 중시하고 그 수(修)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전법륜》 제1강)
나는 전에 늘 생각했다.
‘왜 사람들은 늘 그 연만을 중시하고 그 수를 중시하지 않는가?’
지금 나는 이것이 바로 무신론이 초래한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는 관념의 해악이라고 이해한다. 왜냐하면 ‘연(煉)’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수(修)’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연공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행위와 동작으로 사람이 파악할 수 있는 일종 유형적인 것이지만, 마음 닦음은 사상염두와 심리활동으로 한 가지 일에 대한 사람의 생각이라 육안으로는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속인에 대해 말하자면 허무하고 아득한 것이다.
사실 수련하는 사람이 진수(真修)하지 않으면 자신이 대체 ‘수련인(修煉人)’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어렵다. 오직 “연(煉)”만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알다시피 “동작만 연마(煉)하며, 心性(씬씽)을 수련하지 않는다면 그를 연공인(煉功人)이라 할 수 없다.”(《전법륜》제3강)
물론 ‘수(修)’는 사실 다른 공간에서는 아주 실재적인 것으로 단지 사람이 볼 수 없을 뿐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의 공이 자랄 때, 층차가 높은 사람은 당신이 그 집착심, 그 물질을 제거하면 정수리에 척도가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전법륜》 제3강)
무신론이 가져온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는 관념은 사람이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것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주의하지 않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오류이며, 또한 수련인이 반드시 전변해야 할 관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련 제고에 저애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 이치로 우리가 세 가지 일을 할 때도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라는 이런 관념의 영향을 받아 질보다는 양을 중시하게 한다. 왜냐하면 ‘양(量)’은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질(質)’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오늘 법을 몇 강 공부했고, 오늘 연공을 얼마나 했으며, 오늘 전단지를 몇 장 배포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 법 공부에 얼마나 주의를 기울였고, 나는 오늘 어떤 법리를 깨달았으며 또는 자신에게 어떤 문제를 발견했으며, 오늘 연공하면서 입정(入定)이나 입정(入靜)에 도달했고, 어떤 상태를 감수했는가” 내지는 “나는 오늘 누구에게 얼마나 진상을 깊이 있게 알려 그가 무엇을 똑똑히 알게 했다”고 말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상태는 단지 행위나 손발을 움직여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착실한 수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수량도 아주 중요하다. 질만 보장된다면 당연히 수량이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단지 수량만 추구하고 질이 떨어진다면 이는 하지 않은 것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아태지역 수련생 설법》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공부하려면 마음을 내려놓고 마음을 안정하고 사상을 조용히 한 후 진정으로 해야 한다. 설령 당신이 그 몇 단락만 배우더라도 당신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은 채 책 한 권을 보는 것보다 낫다. 법 공부를 하려면 반드시 착실히 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2016년 뉴욕법회 설법》에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삼퇴가 목적이 아니며 진상을 알려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다.”
즉, 진상을 알릴 때나 항목에서 우리가 질은 중시하지 않고 오직 수량만 추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지속적으로 정진할 수 없었던 원인은 바로 무신론이 가져다준 ‘눈으로 본 것만이 확실하다’라는 관념의 영향이었다. 비록 법 공부, 연공, 발정념 모두 어느 정도 수량을 했지만, 그 효과와 질을 완전히 보장하진 못했다. 특히 연공과 발정념할 때 대부분 집중하지 못했다. 비록 일부러 허튼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각종 염두가 나타날 때 일부러 그것을 억제하지 않았고 제멋대도 생각하도록 했다.
사실 이 문제에서 “신구의(身口意)”를 닦지 못한 것으로 바로 생각을 닦지 못했다. 많은 때 우리는 ‘신(身)’과 ‘구(口)’를 닦는 것만 중시하고 ‘의(意)’를 닦는 것은 중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몸을 닦고 말을 닦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지만(물론 이것 역시 중요하다), ‘생각’을 닦는 것은 한 차례 공력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상염두는 워낙 다양하고 즉시 지나가버리기 때문에 수련에 소질이 없는 사람은 아주 쉽사리 놓쳐버리고 그것을 붙잡아 닦아 없앨 수 없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일사일념(一思一念)마저도 구세력이 배치했다고 말씀 하셨으니 우리가 자신의 ‘생각’을 닦지 않으면 우리는 아주 쉽사리 구세력의 교란을 받아 그것에게 속아넘어갈 것이다.
2. 진화론이 초래한 ‘강자가 영웅’이란 관념의 자비심에 대한 교란
사부님께서는 신경문 《각성하라》에서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慈悲(츠뻬이)하게 할 수 있고, 누구에게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이것은 정말로 일반인이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특히 무슨 일을 하든 모두 중생에게 慈悲(츠뻬이)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어렵다.”
나는 자신이 줄곧 누구에게든 자비롭고 누구에게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음을 안다. 나는 자신이 정(情)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라 여기는데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차별하는 표준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줄곧 그저 자신의 취향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최근에 발생한 한 가지 일을 통해 나는 사실 자신이 사람을 평가하는 표준은 아주 많은 정도 진화론이 초래한 ‘강자가 영웅’이란 관념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정은 이랬다. 어느 날, 한 동수의 딸이 나와 교류하려 했다(사실 평소에는 성인들과 교류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했다. 더 큰 아이가 자신을 괴롭히고 배척해 정신적으로 억압을 받았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이 일을 말했는지 묻자 아니라고 했다. 내가 “왜 말하지 않았니?” 라고 묻자 그녀는 자기 어머니는 강한 여자라서 강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신이 약자이고 남의 괴롭힘을 당한다고 여기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는 마땅히 동수가 닦아야 할 일이라 여겼는데 수련인이 닦는 것은 자비(慈悲)이니 마땅히 약자를 동정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강자’를 좋아하는 것으로 변했는가?
그런데 자신을 생각해 보니 내 딸도 문제가 생기거나, 특히 곤란할 때면 나를 찾아와 소통하거나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 나 역시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돌이켜보니 나는 어려서부터 쟁투심이 강해서 늘 두각을 나타내려 했고 가문을 빛내려 했다. 비록 수련한 뒤에는 더 이상 속인의 이런 명예와 이익을 담담히 보게 되었고 더는 추구하진 않았지만 사실 여전히 잠재의식 속에서 ‘강자가 영웅’임을 믿었고 수련을 잘한 동수를 흠모하고 정진하는 동수를 좋아하거나 심지어 어느 정도 속인 중에서 성공한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지금 나는 이런 관념은 진화론 독소의 크게 영향을 받았음을 발견했다. 우리는 비록 사람이 동물에서 진화했음을 믿지 않고, 사람은 신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지만, 무작위 발생, 자연 선택, 적자생존, 우승열태(優勝劣汰 뛰어난 것이 살아남고 열등한 것이 도태된다) 등 진화론의 핵심 관점이 가져다준 잠재적인 영향을 받았다. 장기간 이러한 관념을 주입당한 사람들은 많은 잘못된 관념을 갖게 되는데, 수련인도 이런 관념을 전변하기 전에는 역시 이런 잘못된 관념으로 사물을 가늠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성공한 사람을 부러워하는가? 만약 그들이 전생에 큰 복덕(福德)을 쌓아 금생에 성공했음을 안다면 우리가 여전히 그를 부러워하겠는가? 우리가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가 운이 좋고 능력이 강해 성공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진화론의 무작위 발생과 자연 선택 관념이 가져다준 영향이 아닌가? 약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련이 부족한 이를 무시하고(사실 수련의 진실한 상황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심지어 능력이 떨어지는 속인을 무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적자생존과 우승열태(優勝劣汰) 관념의 영향이 아닌가?
이런 관념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누구에게든 慈悲(츠뻬이)하게 할 수 있고, 누구에게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가? 만약 이 한 점을 할 수 없다면 또 어떻게 대법제자의 표준에 도달해서 자신의 모든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진화론이 가져다준 이런 관념은 또 수련인에게 다른 마음을 조장한다. 가령 항목에서 일하거나 법을 실증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기능을 중시하고 속인의 기능이야말로 성공의 원인이라 여기거나 더 나아가 자신의 능력이고 자신의 공로(功勞)라 여기는데 이는 하늘의 공을 탐한 것이 아닌가? 잘못하면 또 자심생마(自心生魔)할 수 있다. 모두 아시다시피 우공이산(愚公移山) 이야기에서 진정으로 큰 산을 옮긴 것은 사실 신(神)이며 우공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그가 옮길 수 있었던 것은 큰 산에 비하면 모두 가련할 정도로 적을 뿐이다. 하지만 그의 심성과 정념(正念) 의지력이 천지를 감동시켰기 때문에 결국에는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사부님께서 왜 무신론과 진화론 해악을 반복적으로 강조하시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수련의 정진을 가로막는 강대한 장애다. 우리는 마땅히 《홍음 6》을 더 공부하고 많이 외워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이런 패물(敗物)들을 없애주실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또 자신의 사상이 무신론과 진화론 관념의 교란을 받았는지, 수련인의 정리(正理)로 사물을 보고 판단했는지 늘 반성해야 한다. 오직 우리의 착실한 수련에 영향을 끼치는 이런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해야만 정진실수(精進實修)할 수 있고 최후의 제한된 시간 내에 더 많은 사람을 구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할 수 있다.
개인의 수련 체험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1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