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올해 션윈(神韻) 공연의 어느 가사 중에 “‘누가’ 신(神)에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가”라는 대사가 있었는데 나는 이 구절에서 큰 계발을 받았다. 사부님께서는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말씀하셨다.
“항목 내부에서 망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뭇 신들이 모두 보고 있고, 구세력도 보고 있으며, 홍마(紅魔)도 보고 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장기간 존재하는 마난이나 또는 반복적인 교란과 번거로움은 바로 우리가 직접 조성한 것을 겨냥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법에서 진정으로 ‘누가’ 표현하고 있는지 구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겨냥성이 있기에, 진정하게 그 마음을 집어내어 그 마음을 제거하는데, 그러면 수련이 매우 빠르다.”
내가 이해하기에 지금 만약 정법수련의 각도에서 이 단락 법을 본다면 그 마음의 배후는 구세력이 참여해서 조성된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미국서부법회설법》에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일에서 그것들도 그것들이 법에서 벗어난 후 心性(씬씽)이 있는 위치를 충분히 표현했으며, 그것들이 순결하지 못한 일면을 충분히 폭로하였다. 그리하여 일부 일에서 마땅히 나타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각종 교란이 아주 많이 나타났는데, 이는 우리 오늘날 개인수련을 하는 수련생의 心性(씬씽) 표현과 지극히 비슷하다. 우주의 중생은 모두 법을 바로잡는 중에 있으므로 표현된 일체는 모두 사람 여기에 체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람 여기에서 법을 바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법에서 우리가 알다시피 구우주(舊宇宙)는 성주괴멸(成住壞滅) 법칙 중에서 최후 멸(滅)의 일보에 도달했을 때 구우주의 신들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우주 갱신을 배치했다. 그들은 정법을 좌우지했고 하계(下界) 생명을 지시해 대법과 대법제자들에게 악을 행하거나 심지어 대법 사부님께 소위 대법을 고험하고 대법제자를 고험한다는 구실로 그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생명을 도태시키고 이를 통해 업력을 없애 우주를 정화하려 했다. 이는 구우주 생명이 이해하는 정법 방식이자 또한 구우주 생명 지혜의 극한이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를 도와주는 이면에 그것들은 그것들 자신을 보호하려는 사심(私心)을 숨겨두었으며, 다른 사람을 개변시키려 하면서도 자신은 개변하려고 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움직이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이 집착하여 내려놓지 못하는 것들을 최대한도로 보전(保全)하려고 한다.”(《북미순회설법》)
구신(舊神)의 이런 관념이 세상에 반영되는데, 일부 수련인들의 몸에서 표현된 것은 구(舊) 사상을 전변하지 않고, 구(舊) 관념을 전변하지 않아, 신체에 병업상태가 나타나거나 납치당해 박해받거나, 번거로움이나 교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또 세인의 몸에 표현된 것은 사상이 완고해서 고집스럽고 대법 진상을 듣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구도 받을 수 없게 한다.
예를 들어보자. 병업 마난에 처한 동수 A를 마주했을 때 동수 B가 말했다.
“A는 집착심이 너무 심해서 이 모양이 되었어요.”
C가 말했다.
“구세력은 너무 나빠요, 동수 A를 이 모양으로 만들었어요!”
전자(前者)는 마음을 닦고 집착을 제거하는 개인수련을 겨냥한 반면, 후자(後者)는 직접 정법 수련에서 구세력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을 겨냥한다. 여기서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 다른 겨냥성은 바로 서로 다른 선택이다. 개인 수련을 선택하면 반드시 마난이 있고, 관(關)을 넘어야 하며, 고험(考驗)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법수련 중에서는 사부님께서 명확히 말씀하셨다. “신 수련생을 제외하고 사부는 99년 7ㆍ20 이후에 당신들에게 개인 수련을 위한 어떠한 관(關)도 만들어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신들의 개인수련은 전면적으로 중생을 구도하고 대법을 실증하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어느 부부 동수가 함께 협조해 진상을 알리러 나갔다. 아내가 옆에서 발정념을 하고 남편이 진상을 말했다. 부부 동수가 한 사람에게 한참 진상을 알렸는데 악당(惡黨)의 역사를 말하고, 항일전쟁에서 누가 싸웠는지, 삼년 내전의 진상을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일단 삼퇴를 언급할 때면 오히려 동의하지 않고 떠나려 했다.
아내 동수가 이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구함은 이렇게 중요한 일인데 ‘누가’ 이 생명이 구도 받는 것을 가로막는가?”
발로 이때 남편 동수가 다시 한마디 했다.
“삼퇴하세요, 당신을 위해섭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태도가 돌변해 흔쾌히 동의했다.
물론 동수의 층차와 경지가 다르고, 기초가 다르며, 관을 넘는 크기도 다르지만, 적어도 이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사로(思路)를 제공한다.
“만약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려면 곧 대체 ‘누가’ 하고 있고 ‘누가’ 표현하고 있는지 법(法)에서 구별해야 한다.”
개인의 작은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