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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지역 첫 파룬따파의 날 법회에 참석했던 소중한 추억

신생(新生)

【정견망】

며칠 전, 한 동수가 찾아와 교류하면서 현재 법난(法難) 중에서 어떻게 더 잘 원용(圓容)할 수 있을지, 사악의 박해가 가장 심각했던 엄중한 시절에 우리 지역 대법제자들이 신성하게 경축했던 제1회 ‘파룬따파의 날’ 법회를 언급했다. 나 역시 당시 일을 다시 회상해보니 그것은 26년 반박해(反迫害) 정법 수련 중에서 잊을 수 없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1999년 7월 20일부터 사악한 중국 공산당이 대법과 대법제자들에 대한 무리한 박해를 시작했다. 박해의 수위는 끊임없이 높아졌고 불법으로 ‘X교’를 조직한 것에서, 불법 소환과 구류, 사악한 노동교양 및 판결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전국의 다른 동수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지역 동수들도 사부님과 대법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천안문 광장으로 달려갔다. 이 과정에서 불법 체포가 반복되었지만, 우리는 돌아오자마자 다시 대법을 실증하는 길을 걸었다.

2002년 3월 5일, 장춘(長春) 대법제자들이 “천안문 분실자살 사기극” 등 파룬궁을 박해하기 위해 지어낸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 삽입방송의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다. 중공 악당은 민중들이 이렇게 큰 면적으로 진상을 아는 것이 두려워 미친 듯이 대법제자들을 대량으로 체포했다. 무려 5,000명 이상의 장춘 대법제자들이 사악에 납치되었으며, 당시 전봇대마다 무장 경찰이 보초를 설 정도였다.

[역주: 전봇대에 올라가 삽입방송을 하지 못하게 했다는 의미.]

바로 그해[역주: 2002년] 봄 십며칠로 기억하는데, 어떤 동수가 나를 찾아와 법회를 열자고 했다. 당시 사악의 박해는 대단히 심각했다. 장춘 삽입방송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사악의 미친듯한 반격과 탄압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적색 테러가 전국을 휩쓸면서 대법제자들에게도 큰 압력이 가해졌다. 하지만 나는 당시 정념(正念)이 아주 강했기에 망설임 없이 곧장 동의했다.

다음 날, 우리는 약속된 장소로 자전거를 타고 가서 미리 준비한 수많은 진상 스티커를 붙였다. 그날 날씨는 화창했지만, 공기에서도 사악의 압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략 십여 명의 우리 동수들은 우리 먼저 당시 정법 형세에 대한 이해를 교류했다. 한 동수는 세뇌반에서 막 돌아왔는데 자신이 세뇌반에서 정념정행(正念正行)한 경험을 말했다. 동수가 이 작은 산 꼭대기를 법회 장소로 선택한 이유는 우리 지역 610이 운영하는 사악한 세뇌반과 가깝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높은 곳에 앉아 뜰을 내려다보니, 납치된 몇몇 동수들이 불법으로 그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강력한 발정념으로 세뇌반의 사악한 요소를 해체하고 대법제자들이 정정당당하게 걸어나오게 했다. 모두 정법수련에 대해 교류하고 어떻게 정념정행할 수 있는지 인식을 교류했다. 그리고 우리는 세뇌반 방향으로 강력한 발정념을 시작했다. 당시 상황에서 비록 압력이 아주 컸지만, 발정념을 한 후 사람마다 모두 자신이 아주 강대하다고 여겼다.

당시 우리는 아직 5월 13일이 세계 파룬따파의 날임을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춘분(春分 3월 21일) 날을 우리 지역 파룬따파의 날로 결정했고, 이것은 또한 우리 지역 최초의 ‘파룬따파의 날’ 법회가 되었다. 법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또 진상 스티커를 내내 붙였는데 진상 자료를 붙일 수 있는 곳이라면 나무나 벽 등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나중에 이튿날 구(區) ‘610’ 사악이 국보 경찰과 함께 사람들을 체포하러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길에 진상 자료 외에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신기한 것은 오늘 나와 교류하러 온 동수가 당시 우리가 법회를 연 지방에서 사람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과 함께 동행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20년 후 우리가 뜻밖에 같은 도(道)를 닦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 모든 것은 사부님의 오묘한 배치이며, 우리더러 서로 다른 각도에서 이 신성하고 위대한 한 단락 역사를 견증(見證 직접 목격해서 증명)케 하신 것이다.

지금 당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당시 우리는 누구도 ‘관념(觀念)’이 없었고 ‘두려움’도 전혀 없었다. 당시 대법제자들은 정말로 오직 이 일이 대법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다른 생각이 없었고, 우리 집에 아이가 아직 어리니 우리가 체포되면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수련 때문에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이 수련하면서 우리 자신의 안위(安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체포되어도 석방되기만 하면 곧 계속해서 법을 실증하는 일을 했는데 아무런 불평이나 불만도 없었다. 바로 그런 순정(純淨)한 마음이 있었기에 우리가 함께 그 비할 바 없이 소중한 시간을 지나올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나중에 사악의 박해가 강화되면서 불법 노동교양, 판결, 생체 장기적출 등등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질 때마다 스스로 점차 각종 관념이 생겼고 두려운 마음이 형성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상황은 완화되었지만 또 느슨한 마음이 생기고, 각종 사람의 관념도 따라서 나타나면서, 생각도 갈수록 많아져 전처럼 그렇게 법을 크게 보는 견정한 정념이 사라졌다.

오늘 당시 소중한 시간을 되돌아보니 바로 우리더러 다시 한번 사람 속의 각종 “관념”을 내려놓고, 애초 우리의 정념(正念)을 되찾아, 진정으로 신경문 《관건 시각에 사람 마음을 본다》에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법을 가장 중요시하며” “법을 최우선으로 여겨야” 한다! 자신이 가장 정진하던 상태를 되찾아, 사부님께서 중생을 위해 바꿔오신 최후의 이 소중한 시간을 붙잡아, 자신을 잘 수련해 사람을 많이 구해야 한다!

개인의 현재 인식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허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5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