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대법제자
【정견망】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층층 층층 안으로 찾다가 마침내 “우울”에서 “최저선을 지키려는 마음[保底心]”을 찾아냈고 활연히 깨달았다.
《서유기》에서 당승(唐僧)이 성불(成佛)할 때, 그는 바닥이 없는 배인 ‘무저선(無底船)’을 탄다. 지금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 당승이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영혼을 승화시킨 것으로 설명한다. 또 책 중간에 삽입된 시에 “배 바닥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마음만 있다면 강을 건널 수 있네[莫看船兒無底,有心就能渡河]”라고 했다. 즉, 수련인의 마음이 성실하기만 하면 수련 성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이런 두 가지 설명을 보면서 두 가지 모두 그리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해도 좋고, 마음이 성실하면 영험해지는 것도 좋은데, 모두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아울러 더 잘 표현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바닥 없음[無底]’을 강조하는가?
나는 최근 며칠 동안 우울했다. 새로운 업종에서 며칠 동안 일을 했지만, 도무지 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또 개선될 기미도 없어서 짜증이 좀 올라왔다.
나는 이에 안으로 찾기 시작했다. 내가 이익을 내려놓지 못했는가? 업무에 진전이 없으면 수입에도 영향을 주고 이것이 괴롭다면 내가 이익지심(利益之心)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 아닌가? 사람의 재물은 자신의 덕(德)으로 바꿔온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德(더)가 없으면 얻지 못하고 德(더)를 잃으면 모든 것이 흩어져 없어진다.”(《부이유덕》)라고 말씀하셨다. 이 마음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곧 발정념으로 이익지심(利益之心)을 깨끗이 제거했다. 차츰 이런 이익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 나는 비록 돈을 적게 받았지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즐겁지도 않았다. 나는 이익지심을 닦아 버렸으니 이 문제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아니었다. 단지 인상을 찡그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해도 가슴이 더 무거워지고 여전히 우울했다. 나는 이에 계속해서 안으로 찾아보았다.
내게 아직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려서부터 남보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어렸을 때 시험에서 100점을 받으면, 가장 먼저 집에 달려가 부모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 점수를 보여주며 자신이 얼마나 우수한지 증명하곤 했다. 단지 몇 마디 칭찬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1990년대 중국의 교육에는 이렇게 자아를 실증하고 명예를 위한 마음,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 남보다 뛰어나고 싶다는 갈망 등 당 문화로 가득했다. 그래서 나는 단지 이익을 얻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또 ‘명예’도 얻고 싶어 했는데 이 마음은 아주 탐욕스럽다. 나는 또 ‘명’과 ‘자아 실증’과 관련된 많은 집착과 탐욕을 발견했고, 그것들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 발정념을 했다. 점차적으로 이런 ‘명(名)’과 ‘자아 실증’ 및 탐욕심을 내려놓은 것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갑자기 내가 한 항목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격려를 받았다. 한동안 나는 찬양에 둘러싸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또 기쁘지도 않았다. 나는 새로운 직장에서 명리심(名利心)이 폭로되었음을 느꼈고 또 서서히 닦아버렸으니 이 문제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효과가 없었다. 내 인상은 풀리지 않았고, 마음이 우울했다. 게다가 더 불안하고 근심이 깊어졌는데 오히려 전보다 더 괴로웠다. 화가 위로 올라와 입에 큰 물집이 생겼다. 나는 이에 생각했다.
‘일이 잘 풀릴 때도 기분이 나빴는데, 이제 일이 잘 되고 있는데 나는 왜 여전히 기분이 나쁜가? 보아하니 이 괴로움은 업무 자체와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대체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고 또 찾을 수도 없었다.
이때 또 다른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내가 발정념을 하자마자 “횡소천군(橫掃千軍 천 명의 적군을 쓸어버린다는 의미)”이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즉시 경계심을 품었다. 발정념은 반드시 사부님께서 법에서 말씀하신 것에 따라 해야 하는데 무슨 “횡소천군”이란 말인가? 나는 원하지 않는다. 사부님께서 어떻게 발정념하라고 하셨으면 나는 그렇게 하겠다! 그래서 나는 이 목소리를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발정념을 하기만 하면 이 목소리가 나와 나를 교란했다. 나는 그것을 배척하려 했지만, 이런 일이 이틀 연속 지속되었고, 내가 발정념을 하기만 하면 곧 “횡소천군”이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무지 어디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알 수 없었다.
저녁에 법 공부를 할 때 사부님의 한 단락 설법을 보았다.
“태극의 눈에 대하여 나는 또다시 고증(考證)했는데 역시 마땅히 훤하게 뚫려 있는 것으로, 다시 말해서 흰색이며 두 종류, 태극의 눈은 흰색이다.”(《각지 설법 6》 〈아태지역 수련생 회의 설법〉)
아마 예전에 이 단락 설법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번에 읽을 때 마치 내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 같았다. 다음 날 길을 걷다가도 여전히 생각났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태극의 눈에 대해 양(陽) 속에 음(陰)이 있고, 음 속에 양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 상황은 훤히 뚫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태극의 눈은 훤히 뚫려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여전히 우울했다. 나는 계속해서 안으로 찾아보았다.
명예도 아니고 이익도 아니라면 그럼 정(情)이다! 어떤 정일까? 나는 생각했다. 나는 분명 이 일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게 틀림없다. 사람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 이런 것은 다 정이 아닌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다 정이고, 분별하는 마음이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의 덕(德)과 업(業)에 근거해 배치된 것이다. 수련인은 더욱이 인연에 따라야 하니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람의 정이다.
나는 이번에는 좋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명리정을 다 찾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나는 또 우울했고 심지어 대화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 내 얼굴을 보니 걱정과 증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아직 문제의 근원을 찾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일을 마친 후,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도 안되니 그렇다면 뿌리를 아주 깊이 파야한다!
이때, 나는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내게 매우 엄격하셨다. 나는 아직 어렸고,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아버지께서 내게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만, 나는 늘 잘 쓰지 못했고 쓸 때마다 삐뚤게 썼다. 내가 글을 삐뚤게 쓸 때마다 아버지는 큰 소리로 나를 꾸짖으셨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계속해서 글을 썼지만, 여전히 잘 쓸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때마다 점점 더 큰 소리로 나를 꾸짖으셨다.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고 자책했다. 나는 어째서 내 이름조차 제대로 쓸 수 없을까?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것은 아버지의 폭력적이고 조급한 성격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눈물이 났다.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아버지는 늘 내게 아주 엄격하셨고, 높은 표준으로 요구하셨다. 나는 이러한 요구들 중 일부는 완전히 내 능력을 벗어난 것이라고 느꼈지만, 만약 충족시키지 못하면, 꾸중을 듣거나 무시당하거나, 얻어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완벽함과 높은 표준과 높은 요구를 추구하게 되었고, 자신을 아주 까다로운 사람이 되게 했다. 하지만 이런 높은 표준과 자신에 대한 높은 요구는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단어, 즉 두려움(怕) 때문이었다.
원래 이런 “높은 요구”가 나를 우울하게 만든 것이다! 나는 일을 잘하지 못하면 초조했고 일을 잘하면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이런 좋은 상태를 다시 잃을까 두려워했다. 어린 시절 경험이 내게 트라우마를 남겼고, 이렇게 높은 요구의 배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찾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마음이 여전히 진정으로 편안해질 수 없었다. 내 직감에 따르면 아직 내가 한 번도 알아차리지 못한 매우 숨겨진 사람 마음이 있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완전히 고요해진 후, 더 깊고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점차, 내 원신(元神)은 어느 한 층 우주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나는 별과 별 사이에 서서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 집착을 향해 외쳤다.
“너는 대체 누구냐?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
그때 어떤 목소리가 하는 말을 들었다.
“나는 당신의 일부다! 당신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를 숨겨놓았다!”
“너는 어디에 있느냐?”
“당신이 나를 만나러 오려고? 당신이 완전히 사라져야만 나를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사라질 수 없으니 나는 대법제자다. 내가 당장 너를 만나러 가겠다!”
내 눈앞에 오직 어둡고 더러운 터널만 보였다. 나는 정념(正念)을 지니고 구자진언(九字真言)을 외우며 이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터널 안에서도 나는 줄곧 구자진언을 외웠고 아무런 위험도 만나지 않고 아주 빨리 터널 밖으로 나왔다.
나는 마침내 나와 완전히 똑같이 생긴 한 생명을 보았는데, 터널 입구에서 몸을 웅크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보더니 곧 몸을 일으켜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정말 나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내가 물었다.
“대체 너는 누구냐?”
그것이 말했다.
“나는 너의 최저선[保底]이다.”
바로 이 순간, 나는 활연히 깨달았다!
그것이 또 말했다.
“아주 오래고 오래 전, 우주가 곧 멸(滅)로 다가가던 때에, 당신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를 남겨두었고 나는 당신의 일부분이다. 당신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나를 숨겨놓았다. 목적은 현재의 당신이 설사 훼멸되더라도 또 내가 아직 살아 있으니 당신이 완전히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당신은 나를 당신의 최저선으로 여겼다.”
나는 문득 그것이 내가 그것을 만나려면 먼저 내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내가 일찍이 성주괴멸(成住壞滅) 중에서 하나의 나를 멸(滅)한 후의 최저선으로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진솔하다고 자처하는군! 하지만 당신은 나를 이곳에 숨겨놓고, 심지어 당시 사부님한테도 알리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 지난 며칠간 내 마음의 매듭이 단번에 다 풀렸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고, 그 공간에서 원신이 돌아왔다.
나는 똑똑히 알게 되었다.
왜 나는 늘 나 자신에게 높은 표준을 요구했는지? 정말로 아버지가 두려웠는가? 단지 그뿐만 아니라, 나는 이 ‘바닥[底]’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훼멸될 두려움 때문에 줄곧 자신에게 “높이” 요구했던 것이다. 내가 더 높아질수록 ‘바닥’에서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이 ‘최저선’은 바로 생명이 괴멸(壞滅)로 나아갈 때의 일종 교활함이다. 지금 우리는 대법을 수련함에도, 여전히 줄곧 사부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正信]에 여지를 남기고, 아직도 완전히 우리 자신을 사부님께 전부 바치지 못한 것이다. 믿기는 믿지만 전부 믿지는 않는데, 전부 믿지 않는다면, 그럼 진짜 믿음이 아니고, 진짜 믿음이 아니라면 바로 “사부님을 기만[欺師]”하는 성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당신은 여전히 진솔하다고 자처하는군! 하지만 당신은 나를 이곳에 숨겨놓고, 심지어 당시 사부님께도 알리지 않았어.”라고 했던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너는 정말로 사부님을 완전히 믿느냐? 만약 정말로 사부님을 완전히 믿는다면, 너는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한 손에는 사람을 잡고, 다른 손에는 신(神)을 잡고 놓지 않고서, 내심 깊은 곳에 ‘최저선’을 남겨둔다면, 네가 최후에 믿는 것은 여전히 자신이 아닌가? 또한 자신의 온몸과 마음을 사부님께 전부 바치지 못한 것이다!”
나는 마침내 당승이 서천에 도착했을 때 왜 아난과 가섭 존자가 그의 자금발우를 가지려 했는지 깨달았는데, 왜냐하면 이 자금발우는 바로 당승에게 있어 최후의 “최저선”이었기 때문이다. 출가인에게 있어 “동냥 사발”은 곧 그의 최후의 “최저선”이다. 당승이 진경(真經)을 구하려면 이 사발마저 포기해야 했으니 때문에 비로소 ‘무저선(無底船)’에 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또 마침내 내 “사발”(직업)에서 나의 “최저선을 지키려는 마음[保底之心]”을 보았다.
나는 갑자기 왜 지난 이틀 동안 발정념을 했을 때 “횡소천군(橫掃千軍)”이란 소리가 들렸는지 깨달았다. 여기서 “횡(橫)”은 단지 하나의 면(面)만 대표할 뿐, 입체적이지 않고 협애한 것이다. “소(掃)”란 우리가 알다시피 “땅을 쓰는 것”인데, 이것 역시 하나의 면, 하나의 바닥에 불과하다. 즉 횡과 소는 모두 협애한 것이라 겨우 “천명의 적군(千軍)”만 쓸어버릴 수 있을 뿐이다. 천이란 이 숫자는 너무나도 적다! 대법제자가 발정념 할 때, ‘멸(滅)’이란 글자는 우주 천체만큼 커야 한다!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고 빠뜨리는 것이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발정념하는 위력이 이토록 작은 것일까? 겨우 천명의 적군을 쓸어버릴 뿐인가? 바로 우리에게 이 ‘바닥[底]’이 있기 때문인데 이 ‘바닥’이 바로 일종의 제한이다. 이 ‘바닥’이 대응하는 것은 생명이 패괴한 후 내심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일종 극단적이고 교활한 것으로 “사부님을 기만”하는 그런 사(私)에 도달할 정도다. 사(私)에서 생겨난 이런 ‘자아 보류(保留 여지를 남김)’, ‘퇴로를 남김’은 마치 귀를 막고 종을 훔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으로 우리가 백분의 백 신사신법(信師信法)할 수 없게 만든다.
백분의 백 신사신법 할 수 없기 때문에 곧 ‘두려움’이 생기는데, 이것이 두렵고 저것이 두렵다. 때문에 득(得)과 실(失)을 걱정하고, 득과 실을 걱정하기 때문에, 마음이 늘 든든하지 않고, 마음이 든든하지 않으니 우울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마음속으로 든든함을 느끼지 못한다. 반대로 이 “최저선[保底]”은 도리어 “자신 없음[沒底]”이 생겨나게 하는데, 바로 “자신이 없기” 때문에 “최저선”이 있는 것이다.
제3장 공법 관통양극법의 구결(口訣)을 보면
“번티를 정화하고, 법이 꼭대기와 바닥을 여니,
마음은 자비롭고 뜻은 맹렬해, 하늘과 땅을 관통하네
淨化本體 法開頂底 心慈意猛 通天徹地”
진정으로 “하늘과 땅을 관통”하려면 곧 “법이 꼭대기와 바닥을 열어”야 하는데 그럼 꼭대기도 없고 바닥도 없을 것이다.
이때 나는 문득 왜 태극의 두 눈이 훤히 뚫려 있는지 깨달았다. 태극의 두 눈이 만약 여전히 음양(陰陽) 그 자체라면 그럼 완전히 관통할 수 없고, 그러면 제한이 있게 되는데, 그러면 대도(大道)의 대자재(大自在)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은 바닥이 없는 무저선(無底船)을 타고 강을 건널 수 없는데 왜냐하면 사람은 떨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수련인(修煉人)이 사람 마음에서 뛰쳐나와 무저선에 올라탈 수 있고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면, 이 바닥은 바로 바닥이 없게 되는데, 다시 말해 떨어져 내려가지 않으니 떨어질 곳도 없다.
나는 한 가지 우울함에서 며칠간 층층 층층 층층으로 뿌리를 파는 과정을 거쳐서 뜻밖에도 이런 큰 수확을 얻었다! 안으로 찾음은 정말로 법보(法寶)이고 사부님의 고심한 마음씀에 감사드린다. 지금 발정념을 하면 더는 그런 말이 나오지 않으며 아울러 마음속이 훨씬 많이 뚫렸으며 인상도 편해졌고 우울한 정서 역시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비록 1990년대에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대법을 수련해 왔다. 1997년부터 대법을 접했으니 노제자랄 할 수 있다. 지금 정법 노정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내 생각에 대법제자들이 최후의 ‘최저선을 지키려는 마음’인 ‘자금발우’를 버릴 때가 되었다. 또 마땅히 버리고 진선인(真善忍)에 완전히 동화해야 하며, 완전히 신사신법(信師信法) 해서 사부님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이니 부당한 곳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역주: 원문에서 보저(保底)는 바닥을 지키려는 것으로 흔히 본전 유지 내지는 최저가 보장 등으로 번역한다. 쉽게 말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보험처럼 미리 남겨놓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최저선으로 번역했다. 정법 최후 시기에 이런 보저가 때로는 신사신법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965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