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제자
【정견망】
사부님의 시 《착실한 수련》에서는
“법을 배우고 법을 얻어
배움을 견주고 수련을 견주나니
일마다 대조하여
해내어야 수련이로다”라고 했다.
불과 16자에 불과하지만 그 내함(內涵)이 끝없이 현묘해서 실질적으로 알기는 쉬워도 행하기는 어렵다.
현 단계에서 필자의 얕은 인식은 이러하다. 법을 배울 때 자기 마음속에 들어가게 배워야만 비로소 법을 알고 법을 얻을 수 있다. 항상 법과 비교하고 동수들과 교류하며 법에서 절차탁마해야 한다. 생활 속의 사소한 일 하나하나를 모두 법을 준칙으로 삼아 대조해야 한다. 실천 속에서 기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수련이자 착실한 수련(實修)이다. 아래에 나의 몇 가지 생각과 소회를 동수들과 나누고자 하니, 자비로 지적해 주기 바란다.
첫째, 자신에게 물어보라: 법을 배워서 얼마나 얻었는가?
법을 외우기 전에는 내가 법을 잘 배우고 있으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법을 외우기 시작한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예전에 통독은 많이 했지만, 도(道)를 얻은 것은 사실 매우 적었다는 것을. 왜 이렇게 말하는가? 통독할 때 눈은 마치 달리는 말 위에서 꽃을 구경하듯(走馬觀花) 꽃바다와 같은 광각 파노라마만 보았을 뿐, 많은 세부 사항을 놓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가지지 말자. 우리 가지려면 직접 가서 사자.”(《전법륜》)라는 구절을 아마 천 번은 읽었겠지만, 늘 무심코 지나쳤기에 결코 마음에 두지 않았고 그 법을 얻지도 못했다.
법을 외울 때는 온 정신을 집중하여 반복해서 외우기에 사부님의 법을 자신의 마음속에 새기게 되고, 도를 얻는 것도 좀 더 많아진다. 예를 들어 “늘 공능을 구하고, 이것저것을 구하며, 각종 심태, 각종 강렬한 욕망을 품고 연마하고 있다. 사실 이미 자신도 모르게 사법을 연마하고 있는데”(《전법륜》)라는 대목을 외울 때, 나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 역시 수년 동안 연공하면서 재물을 구했으니, 바로 사법을 연마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평소에 이 구절의 뜻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자주 물어보아야 한다.
둘째, 자신에게 물어보라: 동수와 비교해 차이를 찾았는가?
비교 대상이 누구인지, 누구와 비교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법리와 비교한다면 언제나 차이를 발견할 수 있고, 동수의 장점을 본다면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일거사득(一擧四得)이다. 당신은 어찌 그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있는가?”(《전법륜》)라는 것을 나는 줄곧 해내지 못했다. 가난한 형편에도 견지하며 진상을 알리는 동수를 보면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반면 속인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면 집착을 정당화할 핑계를 찾게 된다. “나는 겁이 많으니 진상을 좀 적게 알려도 돼”, “성격이 많이 고쳐졌으니 천천히 해야지”와 같은 변명은 사실 교활한 사람 마음(人心)이다. 어떤 핑계도 대지 않고 오직 법의 표준과 대조하며, 잘한 동수와 비교해 곳곳에서 차이점을 찾고 시시각각 잘못을 고쳐야만 빠르게 제고할 수 있다.
셋째, 자신에게 물어보라: 마음에 생각이 움직일 때 법을 생각하는가?
법리의 요구는 “일마다 대조함(事事對照)”(《홍음》 〈착실한 수련〉)이다. 즉 모든 일을 법으로 가늠해야 하는데, 사실 이는 상당히 어렵다. 속인 속에서 생활하며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이 적게는 수십 가지에서 많게는 수백 가지인데, 법과 대조할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되는가? 직장 동료가 비웃을 때 안색을 바꾸는데 부동심(不動心)을 잊고, 집에 돌아와 남편이 야단칠 때 그에게 감사하지 못하고 되받아친다. 저녁에 아이가 공부하지 않을 때 성적을 걱정하며 ‘사람마다 각자 명이 있다’는 점을 망각한다. 정말로 일마다 대조한다면 스스로 얼마나 해냈는지 자문해 보라. 아마 커트라인에 미달할 것이다. 법과 대조하지 않는다면 법을 배워서 어디에 쓰겠는가?
넷째, 자신에게 물어보라: 내 몸에서 법이 얼마나 체현되는가?
일에 부딪혀 법이 생각나지 않으면 관(關)을 넘기가 매우 어렵다. 진리가 항로를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순이 올 때 설령 법이 생각나더라도, 마음속 분노가 불길처럼 타오르고 거칠고 조급함이 홍수처럼 터져 나올 때 우리가 진정으로 평온을 유지할 수 있는 때가 얼마나 되는가? 나는 “언제나 싱글벙글하면서, 아무리 큰 손해를 보아도 싱글벙글하며 개의치 않는다. 정말로 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나한의 초급과위에 도달한 것이다.”(《전법륜》)라는 구절을 외우며 어머니 댁에 들어간 적이 있다. 어머니께서 대뜸 나를 몇 마디 꾸짖으셨을 때, 나는 어머니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나가버렸다. 정말로 웃을 수 있어야 진짜 나한인데, 나는 아직 거리가 멀다. 수련자는 마땅히 “慈悲(츠뻬이)한 마음을 품고 얼굴에는 온화한 표정을 짓는다.”(《대원만법》) 한다. 우리가 자애로운 눈빛과 선량한 얼굴을 할 때가 얼마나 되는가? 주변 사람들이 나를 통해 대법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볼 수 있는지 자주 물어야 한다. 만약 늘 부부간에 원망하고, 따지고, 시비를 가린다면 착실한 수련(實修)이 아주 엉망인 것이다.
다섯째, 자신에게 물어보라: 법을 배우는 것과 착실한 수련의 관계는 무엇인가?
속인도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말하는데, 그중 앎(知)은 기초이고 행함(行)이 관건이다. 매일 배우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백 번 배운들 무슨 소용이며 법을 배우는 의의가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우리 자신을 실질적으로 수련하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오늘 한 구절의 법을 배웠다면, 그 한 구절의 요구대로 자신을 다스려 법의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매일 조금씩 수정하고 다시 법을 배우면 또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며, 다시 자신을 수정해 나간다. 이렇게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수련하며, 매 한 구절의 법을 에누리 없이 행동으로 옮길 때 당신은 마음이 안정되고 행동이 당당해지며 길이 넓어짐을 느낄 것이다.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발자국을 떼며 수련해 왔기 때문이다. 현장(玄奘)은 한 걸음씩 걸어서 영산(靈山)에 도착했기에 진경(眞經)을 얻었지만, 손오공은 몇 번의 공중제비로 영산에 갔기에 진경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만이 진짜 수련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전에 누가 나를 훈계하면 억울해하며 하소연했다. 사실 관을 넘지 못한 것이고 법을 잘 배우지 못한 것이다. 만약 “고생을 낙으로 삼음”(《홍음》 〈마음고생〉)이 몸의 모든 세포에 녹아들었다면 어찌 억울함이 있겠는가? 즐거워하기에도 바쁠 것이다! 법을 배우는 것과 착실한 수련의 관계에서, 알면서 행하지 않으면 참된 앎이 아니요, 행동하되 모른다면 수행이 아니다.
여섯째, 자신에게 물어보라: 왜 법을 외우지 않는가?
법을 외우는 목적은 ‘선지선각(先知先覺 미리 알고 미리 깨달음)’, 즉 관이나 난이 닥치기 전에 이미 진지(真知)를 잡고 있기 위해서다. 법을 외우지 않는 사람은 ‘후지후각(後知後覺 늦게 알거나 늦게 깨달음)’ 하거나 혹은 전혀 깨닫지 못하여, 자신이 어디서 틀렸는지 자신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가능성이 크다. 통독이든 법을 외우든 목적은 오직 하나, 착실한 수련을 지도하는 것이다. 착실한 수련 속에서 늘 관을 넘지 못한다면 의심할 바 없이 법을 배우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법을 외우지 않는가?
첫째는 속도를 추구하고 지식을 구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한 시간에 한 강을 읽었는데 하루에 4시간씩 20년을 하루같이 공부하며 내가 많이 읽고 잘 배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시간만 낭비했을 뿐 효과는 미미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반드시 법을 외울 것이다. 정견 문장 《법공부가 마음에 들어가지 않는 뼈저린 후회》라는 글을 참고해 볼만하다.
둘째는 고생을 겪기 싫어하고 외우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법을 외우는 것 역시 고생이 필요하다. 어떤 단락은 몇 시간을 외워도 머리만 아프고 외워지지 않을 수 있다.
법을 외우는 목적은 사실 책 한 권을 완벽하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인 암기를 통해 인상을 깊게 하여 법을 마음속에 새김으로써 착실한 수련을 지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동수들이 법을 외워보거나 혹은 법을 반복해서 읽어보기를 바란다. 한 단락이나 한 소절을 여러 번 읽어 보라. 서두르지 말고 목표를 정하지도 말며, 마음을 완전히 가라앉히고 진정으로 법 속에 들어가라. 온 정신을 집중하여 한 페이지를 보는 것이 조급하게 구하는 마음으로 한 권을 읽는 것보다 효과가 훨씬 좋을 것이다.
법을 외울 수 있다면 글자마다 구슬 같고 구절마다 진리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단물(甘泉)처럼 당신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고 혈액에 녹아들어 당신의 영혼을 양육할 것이다. 그런데 왜 법을 외우지 않는가?
고대에 경을 구하러 간 사람은 수백 수천이었으나 경을 갖고 돌아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오늘날 우리는 경서를 손에 쥐고도 때로는 딴 생각을 하고, 때로는 잠을 자며, 때로는 의심하고, 때로는 서두른다. 이렇게 경건함과 엄숙함이 없는 법 공부에 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현현해 주겠는가?
작은 소견이니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08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