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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과 마난 중에서 안으로 찾고, 진정으로 자신을 제고

일본 대법제자

【정견망】

수련의 길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겪는 온갖 마난과 고험은, 시시때때로 우리가 움직인 것이 사람마음(人心)인지 아니면 수련인의 정념(正念)인지를 검증하고 있다. 동시에 또한 평소에 법을 공부할 때 진정으로 마음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자신의 수련 속에서 기초가 도대체 어떠한지를 검증하고 있다.

만약 일을 겪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개 자신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수련했는지를 진정으로 똑똑히 보기가 매우 어렵다. 평소에는 자신이 꽤 잘 수련했다고 느끼지만, 막상 구체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자신의 마음이 도대체 움직였는지 안 움직였는지, 지켜냈는지 못 지켰는지를 곧바로 볼 수 있다.

수련인들이 함께 협력할 때도 부지불식간에 자신을 위해 심성을 제고하고 안으로 찾을 좋은 기회를 창조해 낸다.

한번은 우리가 단체로 협력해, 삼백여 킬로미터 떨어진 다른 도시의 대법 활동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

나는 쉬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고 출발 당일에도 시간이 없었기에, 밤 11시가 지난 후에야 비로소 지정된 집결 장소에 도착해 사람들과 합류한 다음 함께 차를 타고 출발할 수 있었다.

내가 퇴근 후 집결 장소에 도착해 차에 타자, 운전을 책임진 동수가 물었다.

“당신이 먼저 운전할래요, 아니면 내가 먼저 운전할까요?”

내가 말했다.

“누가 먼저 운전하든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동수는 내가 막 퇴근한 것을 보고 말했다.

“당신이 막 퇴근했으니 내가 먼저 운전할게요. 내가 피곤해지면 두 시간 후에 당신이 교대하시죠.”

내가 말했다. “좋아요.”

이렇게 우리는 갈 곳의 내비게이션을 각각 설정했고, 차량용 내비게이션도 설정을 마친 다음 고속도로에 올랐다.

고속도로에 올라가자 동수가 물었다.

“우리 어느 길로 가죠?”

내가 말했다.

“내비게이션대로 가면 돼요. 저는 노선에 별로 익숙하지 않으니 내비게이션을 따라가죠.”

하지만 나는 그가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다른 길을 선택한 것을 발견했다.

내가 물었다.

“왜 내비게이션대로 안 가나요?”

동수가 말했다.

“괜찮아요, 난 이 길에 아주 익숙하거든요. 예전에 화물차를 몰고 물건을 배송할 때 이 길로 자주 다녔고, 이전에 동수들과 집단 우편함 진상을 할 때도 자주 다녔어요.”

나는 이 말을 듣고 말했다.

“그렇게 익숙하다면야 어떻게 가든 상관없죠.”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비게이션이 다시 차선 변경을 알렸고, 동수는 여전히 내비게이션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 연속 세 번 네 번이 이러자 내 마음속에 슬슬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게 어디로 가는 거지?’

바로 이때, 동수가 자신이 원래 가려던 노선이 통제되어 갈 수 없으니 반드시 고속도로에서 내려 노선을 다시 계획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자 마음속에 문득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동수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이 길에 특별히 익숙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심지어 눈을 감고도 어떻게 가는지 안다면서요, 그런데 지금은 왜 또 노선을 모르는 겁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동수는 그곳에서 어떻게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해야 할지를 검색하고 있었다.

내 내비게이션은 왼쪽으로 꺾으라고 알렸고, 동수의 내비게이션은 오른쪽으로 꺾으라고 알렸다.

내가 말했다.

“우리 계속 여기에 멈춰 있을 수는 없잖아요, 차가 먼저 움직여야죠.”

동수가 말했다. “우리 둘이 쓰는 내비게이션이 다르니 먼저 통일합시다.”

내가 말했다.

“어떤 내비게이션을 쓰든 상관없어요, 핵심은 차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거예요. 내비게이션은 차가 움직인 후에야 비로소 실제 상황에 따라 노선을 다시 인식할 수 있어요. 당신이 계속 제자리에 멈춰 있으려 하면 내비게이션도 도대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요!”

사실 이쯤 되었을 때 내 기분은 이미 매우 좋지 않았다. 비록 겉으로 발산하지는 않았고 겉보기에는 그래도 비교적 냉정해 보였지만, 실제로 내면은 이미 몹시 괴로웠다.

이것은 내가 이 동수와 함께 차를 타고 일을 한 첫 번째였고, 그의 수련 상태에 대해서도 그리 잘 알지 못했다. 내게 다가온 직관적인 느낌은 이 동수가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아집이 강하며, 자아에 집착한다는 것이었다.

한 차의 사람들이 이렇게 차에 앉아 길가에 멈춰 있었다. 뒤에 있던 동수도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운전하던 동수가 설명했다.

“방금 고속도로가 통제되어서 우리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타야 해요.”

십여 분이 지나서야 차는 마침내 다시 움직였고, 우리는 고속도로에 다시 올랐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정체가 시작되었다.

한번 막히기 시작하니 십칠 킬로미터였고, 소통되는 데 거의 오십 분이 걸렸다.

내 마음속에는 또다시 ‘답답한’ 느낌이 밀려왔다.

왜냐하면 아직 고속도로에 오르기 전 첫 번째 때 이미 내비게이션을 보았고, 당시의 노선은 전혀 막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이 한바탕 소동을 겪은 후에는 노선이 전부 빨갛게 변했고 또 이렇게 길게 막혔다.

나의 원망심이 단숨에 전부 동수를 향했다.

동수도 내가 좀 화가 난 것을 알아차렸고, 나중에는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일단 차가 막히면 마음이 번잡해지기 시작했고, 이 모든 것이 전부 동수가 잘 해내지 못해 초래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동수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고속도로 밖으로 나가세요.”

동수는 내가 명령조로 말하는 것을 보고, 내게 별로 상의할 여지를 남겨주지 않는 듯하자, 내가 말한 대로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

고속도로를 내려온 후에는 차량 통행이 매우 드문 도로였고, 우리는 아주 빠르게 정체 구간을 피해 갔다.

하지만 만약 다시 고속도로에 오르려면 여전히 일반 도로를 한동안 가야 했다.

바로 동수가 운전하는 과정에서 앞쪽 길가에 작은 동물 하나가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의 차를 보더니 갑자기 빠르게 우리 차를 향해 달려왔다.

동수가 황급히 급정거를 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하고 결국 이 작은 동물을 치고 말았다.

당시 내 마음은 단숨에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나는 직접 동수에게 말했다.

“내리세요, 내가 운전할게요.”

상의할 여지도 없이 나는 차에 오른 후 목적지까지 내내 운전했다.

활동이 끝나고 돌아온 후, 나는 함께 차를 탔던 동수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 화장실에 갑시다, 도중에 정차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집까지 계속 운전했다.

돌아온 후, 나는 이 일이 발생한 전체 과정을 자세히 회상하며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했을까? 동수는 왜 내 앞에서 이렇게 강렬한 “자아”를 드러냈을까? 이 일련의 일들은 도무지 내게 무엇을 보게 하려는 것일까? 나는 또 스스로 어떤 마음을 버려야 할까?’

나는 수련인이 겪는 일에 우연이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내가 본 것은 동수가 ‘자아’를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곧바로 자신을 생각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동수가 왜 저렇게 자아적이지? 왜 저렇게 집착하지? 왜 늘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왜 자신과 연관 짓지 않았을까? 사실 나 역시 매우 자아적이었다.

나와 함께 운전하며 협력했던 이전 동수는 수련 상태가 비교적 좋았고 매우 안정적이었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협력해 왔고 서로 간에 거의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그런 묵시적인 협력에 익숙해졌고, 심지어 그런 협력을 가장 좋은 안배로 여겼었다.

그래서 나와 생각이 다르고 일 처리 방식도 다른 동수를 만나자, 도리어 이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을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나는 사실 이 문제에서 진정으로 수련하지 못했다. 나는 동수의 집착을 보았으면서도 안으로 자신을 찾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내가 첫 번째 시간에 안으로 찾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아주 빨리 자신의 문제를 발견했을 것이고, 어쩌면 뒤의 많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며, 하물며 자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아 작은 동물이 치이는 일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차가 막히면 짜증이 났고; 내 기분에 맞지 않는 일을 만나면 조급해졌으며; 내 관념에 맞지 않는 일을 만나면 인내심이 없었다.

이러한 조급함과 번잡함이 과연 진정한 수련인의 상태인가?

일이 지나간 후에 나는 갈수록 똑똑히 보게 되었다. 많은 경우 진정으로 변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며칠 후, 협조인도 나를 찾아와 이 일에 대해 교류했다. 그녀는 내가 이 심성관을 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며칠 뒤에 우리가 또다시 협력해 함께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했다. “지금 적당한 사람도 찾을 수 없는데, 당신들 며칠 뒤에 또 협력해야 하잖아요.”

내가 말했다.

“괜찮아요. 우리는 모두 대법제자예요. 저는 이미 자신의 문제를 찾았고, 다음 번 전체 협력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겁니다.”

나도 이 기간 동안 안으로 찾았던 내 생각을 협조인에게 말했다.

“만약 제가 당시에 자신을 안으로 찾을 수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렇게 큰 저항감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뒤의 일부 일들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교통 체증도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마침 나의 조급한 마음을 없애고 나의 마성(魔性)을 닦아내는 것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보이지 않는 중에서 앞쪽의 더 큰 위험을 피하게 해 주었을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배해 주신 것은 모두 가장 좋은 것이지만, 단지 많은 경우 우리 자신의 사람 마음이 가로막아 사부님의 고심 어린 안배를 보지 못할 뿐이다. 협조인은 내 생각을 듣고 나서는 더 이상 이 일을 두고 얽매이지 않았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나는 또 그 운전하던 동수를 만났고, 우리는 다시 차를 운전하는 협력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가는 길 내내 화기애애하게 웃고 떠들었으며, 모두 끊임없이 자신을 찾았다. 우리는 서로 이 일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안으로 찾았는지를 이야기했고, 각자가 인식한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갈 때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고 올 때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갈 때 나는 고작 사십 분을 잤을 뿐인데도 전혀 졸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우리는 함께 단체 연공을 했고, 낮에는 또 긴장된 리허설을 진행했는데 나에게는 여전히 졸음이 조금도 오지 않았다.

함께 차를 탄 동수들도 걱정스레 물었다.

“당신 그렇게 적게 자고도 어떻게 조금도 안 졸려요?”

내가 말했다. “전 조금도 안 졸려요.”

이 일은 또한 내게 심성의 제고가 참으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더욱 체감하게 했다. 대개 이전의 많은 경우에서 우리가 소홀히 했던 부분이 바로 이 마음을 닦는 대목이었고, 그리하여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배해 주신 많은 제고의 기회를 놓쳤다. 어떤 때에는 법을 잘 공부하지 못하고 철저히 공부하지 못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 자신을 향해 안으로 찾을 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집착을 볼 때 우리는 대개 유독 똑똑히 보지만,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면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이는 가장 편리한 법문일 뿐만 아니라, 우주특성에 따라 직접 연마(煉)하므로, 수련함이 가장 빠르고, 가장 가까운 길로서, 직지인심(直指人心)이다.”

나는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모순을 안배해 주시고 관난(關難)을 안배해 주실 때, 진정으로 자신을 닦을 줄 아는 동수라면 자신과 모순 사이의 관계를 바르게 놓고 밖으로 튀어나와 문제를 볼 것이라는 점을 체험했다.

첫 번째 시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신에게 완충할 여유를 주며, 냉정하게 이 일이 왜 발생했는지, 그것이 자신의 어떤 마음을 건드렸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자신의 심성을 지켜내고, 일이 발생하는 과정 중에서 자신의 심성을 수련해야 비로소 진정으로 자신의 심성을 제고할 수 있고 자신의 용량을 넓힐 수 있으며, 점차 사람의 관념과 사람의 사유를 전환해 조금씩 신(神)을 향해 나란히 나아갈 수 있다.

반면 자신을 닦을 줄 모르는 동수들은 대개 옳고 그름의 쟁론 속에 빠져들어 일 자체를 두고 일에 대해 논하며 뛰쳐나오지 못하고, 줄곧 일의 표면 위에서 뱅뱅 돌며 사람의 도리, 사람의 관념으로 일 표면의 옳고 그름을 가늠한다. 이렇게 되면 억울하고 불평하는 마음, 서운한 마음, 원한심(怨恨心), 원망하는 마음이 모두 튀어나와 자신이 아주 큰 억울함을 겪었다고 느낀다. 어떤 때에는 일이 지나갔어도 여전히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기며, 자신이 심성을 제고할 기회 하나를 잃어버렸음도 의식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비교적 전형적인 이런 정황이 또 있다. 우리 많은 사람이 수련과정 중에, 당신이 연공(煉功)할 때면 흔히 당신의 배우자가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데, 당신이 연공하기만 하면 당신과 싸운다. 당신이 다른 일을 하면 그는 그다지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이 마작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허비해도 그가 좋아하지는 않지만, 연공할 때처럼 그렇지는 않다. 당신의 연공은 그를 건드리지도 않고 신체를 단련하면서 또 그에게 영향주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당신이 연공만 하면 그는 당신에게 물건을 마구 내동댕이치며 야단이다. 어떤 사람은 연공 때문에 부부가 이혼까지 하려 한다. 왜 이런 정황이 나타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모두 생각해 보지 않는다. 나중에 당신이 그에게 묻는다. “내가 연공하면 당신은 왜 그렇게 크게 화를 냈나요?” 그는 할 말이 없다. 정말로 할 말 없어 한다. “그래요, 나도 그렇게 크게 화 내지 말아야 하는데, 그때는 그렇게 크게 화를 냈네요.” 사실 어찌된 영문인가? 연공하는 동시에 업력을 전화해야 하는데, 잃지 않는 자는 얻지 못하고, 잃는 것 또한 나쁜 것인바, 당신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집에 막 들어서자마자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에게 욕을 한바탕 퍼부을 수 있는데, 당신이 만약 참고 지나갔다면 오늘 당신은 공(功)을 헛되이 연마(煉)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 역시 연공(煉功)은 德(더)를 중히 여겨야 함을 알기에 평소 그의 배우자와 잘 지냈다. 생각해 본다. ‘평소 내가 말하면 고분고분했는데, 오늘은 그가 내 머리 위에 올라타는구나.’ 화를 참지 못하고 그와 맞서는 바람에 오늘 연마(煉)는 또 헛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그 업력이 거기에 있어서 그가 당신을 도와 제거하려 한 것인데,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와 싸움을 벌였기 때문에 없애버리지 못했다. 이런 일은 매우 많다. 우리 많은 사람이 모두 이런 정황과 마주친 적이 있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 보지 않는다. 당신이 다른 어떤 일을 해도 그는 당신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본래는 좋은 일이지만, 그는 오히려 당신과 늘 맞선다. 사실 바로 당신을 도와 소업(消業)해 주고 있지만 그 자신은 모른다. 그는 표면상으로만 당신과 맞서 싸우며 마음속으로는 당신을 아주 좋게 대하는 이런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심으로 화를 낸다. 왜냐하면 업력이 누구에게로 떨어지면 바로 누가 괴롭기 때문인데, 틀림없이 이러하다.”

우리 많은 사람은 유사한 상황들을 겪었다. 만약 속인의 도리, 속인의 관념으로 그것을 본다면 표면의 옳고 그름을 두고 쟁론하기가 아주 쉽다.

“나도 당신에게 어떻게 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왜 나에게 이래요?”

“나도 당신에게 어떻게 한 적이 없잖아요? 나도 당신에게 무슨 영향을 준 게 없는데요?”

“당신 혹시 일 없어서 트집 잡는 거 아니요?”

“당신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요?”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생각할수록 자신이 억울해지며, 마침내 참다못해 상대방과 다투게 된다.

만약 사부님께서 고층차의 법리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또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이것이 바로 자신의 업력이 이러한 방식을 통해 소멸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가 진정으로 이 법리를 깨닫고 진정으로 법에서 문제를 인식할 수 있을 때, 사람의 관념은 전환될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인내할 것이며, 불평불만하는 것도 아니고 서럽고 고통스러우며 억지로 참는 것도 아닐 것이다. 심지어 자신에게 고통을 만들고 트집을 만들어준 그 사람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바로 우리를 도와 업을 없애고 제고하게 해 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이 평온하고 기분 좋게 인내할 수 있는 것이며, 겉으로는 참으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파도가 치듯 뒤끓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얼마나 큰 억울함을 겪었다고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법리를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심지어 진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상대방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법을 잘 공부하고 사부님의 대법을 철저히 공부하며 고층차의 법리를 진정으로 장악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마난과 고통 앞에서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있고, 비로소 자신의 수련에 대해 진정으로 책임을 질 수 있으며, 비로소 모순이 발생할 때마다 소중히 여길 수 있고, 비로소 대법에 부합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이상이 연공(煉功)해도 공이 자라지 않는 두 가지 원인이다. ‘고층차 중의 법을 모르고서는 수련할 방법이 없으며, 안으로 수련하지 않아 心性(씬씽)이 수련되지 않으면 공이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 두 가지 원인이다.”

이 한마디 말씀은 내게 아주 깊은 감동을 주었다.

마음을 다해 법을 공부하고 진정으로 법을 마음속에 들여놓는다면, 심성관을 더욱 잘 넘을 수 있고 제고하는 것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마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일의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법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고 모순 속에서 자신의 집착을 찾을 수 있으며, 고통 속에서 집착을 움켜쥐고 진아(眞我)를 찾아내어 대법을 굳게 믿고 강한 의지력으로 자신을 잘 통제하며, 진정으로 ‘심성을 지키고’ ‘심성을 닦으며’ ‘심성을 제고하여’ 진정으로 자신을 제고할 수 있다.

수련 길 위의 모순마다, 순조롭지 못할 때마다, 심성상의 충격마다, 어쩌면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안배해 주신 제고의 기회일 것이다. 관건은 일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진정으로 자신을 한 수련인으로 여겨 첫 시간에 안으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만약 이 점을 해낼 수 있다면, 본래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많은 관과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매듭들도 어쩌면 안으로 찾는 과정 중에서 쉽사리 풀려나갈 것이다.

진정으로 법을 잘 공부하고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자신을 수련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거듭되는 마난과 고험과 병업 속에서 사람의 관념을 내려놓고 사람의 집착을 없애며, 끊임없이 자신의 심성과 용량을 제고하여 조금씩 자신의 수련 길을 잘 걸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자신을 진정한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되게 할 수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4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