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녕 대법제자
【정견망 2026년 10월 4일】
명혜망은 2026년 6월 9자 공고에서 “중국에 여전히 사모님께 돈을 기부하라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라며 성도에서 일부 사람들이 대법 수련생들이 아직 버리지 못한 집착을 이용해 대법 프로젝트 명목으로 자금을 모으고 돈을 편취한 사건을 폭로했다.
공고의 중후반부에서는 사부님의 경문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이 대법제자들에게 준 계시와 지도를 언급했다.
공고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썼다. “진수(眞修) 대법제자들은 모두 이 글을 외워 자신과 대조해 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더는 사기꾼들과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이성과 명석함을 유지할 것을 건의한다.”
그렇다면 동수 여러분,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라는 경문을 암송했는가?
우리 법공부 소모임의 동수들이 교류하며 깨달은 바로는, 정법의 마지막 시기에 명혜망에서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를 외우라고 제안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공고 중의 관련 법리를 체인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수련 향상 기회를 주는 것이다. 즉,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내어 그것을 버림으로써 대법 속에서 순정하게 수련해 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번에 동수들과 함께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를 암송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포함해 매우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경문의 첫 구절인 “집착을 가지고 법을 공부하는 것은 진정한 수련이 아니다”를 외울 때, 마치 죽비로 내리치는 것처럼 글자마다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수련한 지가 이토록 오래되었는데, 우리는 진정한 수련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아직 깨닫지 못한 온갖 근본 집착, 심지어 알면서도 내려놓지 못한 인심을 품은 채 법을 공부하고 있는 것인가?
사부님께서는 법 중에서도 우리에게 경고하셨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제자로 여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얼마나 엄숙한 일인가!
우리는 모두 이 경문을 기꺼이 암송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평소에도 법을 암송하던 동수들은 암송하기가 비교적 수월했지만, 이전에 한 번도 법을 암송해 본 적이 없는 동수들은 매우 겁을 먹고 어려움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이 글을 암송할 수 있도록 격려하기 위해 우리 법공부 소모임은 다음과 같이 했다. 속도를 좇지 않고 먼저 집에서 각자 외울 수 있는 만큼 외웠다. 매주 공동 법공부를 할 때 다 함께 점검하는 공동 진도는 한 단락이었고, 사람마다 돌아가며 이 한 단락을 암송했다. 처음에 법 암송에 어려움을 겪고 다 외우지 못하는 동수는 한 구절이라도 외우고, 나머지는 마음을 다해 읽었다. 그 과정에서 동수들이 법 암송의 장벽을 차근차근 돌파하도록 서로 격려했다.
그리하여 근 두 달간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 법공부 소모임의 동수들은 기본적으로 이 경문을 비교적 능숙하게 암송할 수 있게 되었다. 그중에는 팔순이 넘으신 고령의 두 동수, 최근 몇 년 사이에 막 대법을 얻은 신규 동수, 그리고 심각한 병업의 관문을 넘고 있는 여동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이 동수들이 법 암송에 전혀 자신감이 없었고 포기하고 싶어 하기까지 했지만, 우리는 “일단 한 번 시도해 보자, 일주일 뒤에 올 때 한 구절만 외웠더라도 그것이 바로 돌파다”라고 격려했다. 결과적으로 처음의 어려움에서 갈수록 순조로워지는 경지에 이르자 모두들 감개무량해했고 큰 격려를 받았다. 법을 암송하는 과정에서 더 깊은 법리를 체득했기 때문에 모두들 법 암송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나의 어머니 동수는 올해 팔순이 넘으셨는데, 법 암송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법 암송을 시작한 후로는 걷거나 앉을 때, 일어날 때 이불을 갤 때, 일하고 마당을 쓸 때도 어머니가 법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로 머릿속에 무엇을 채워 넣느냐가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 같다. 법 암송으로 법리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졌기에 어머니의 심성 향상도 매우 빨랐다.
물론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를 암송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는 마음을 다해 법을 암송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법 암송의 날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교류했다. 당초에 나는 무슨 이유로 대법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지금은 또 왜 여기에 남아 있는가? 이러한 근본 집착을 찾아내어 버린 후에 각각 어떠한 다른 깨달음과 변화가 있었는가?
여기서는 한두 가지를 간략히 들어 불을 지펴 옥을 얻듯 동수들의 참고로 삼고자 한다.
근본 집착 1
어떤 동수가 말했다. “저도 처음에는 정말로 병을 고치고 건강을 다지기 위해 들어왔습니다(이러한 동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법공부를 통해 이것이 틀렸으며, 이는 대법 속에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구한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깊이 파고들어 보니, 내면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이런 생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이 닥치면 사고방식이 여전히 병을 고친다는 기점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깨닫고 나니, 이 마음을 버렸을 때와 버리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고방식의 전환 (1):
예전에 신체에 ‘병업’이 있었던 부위에 다시 증상이 나타나거나 ‘악화’되면 마음속에 압박감과 불쾌함이 생기며 “왜 또 이러지? 이렇게 오랫동안 수련했는데 왜 아직도 낫지 않는 거야?”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는 일종의 ‘병 치료에 대한 집착’이다. 이 문제가 닥치면 먼저 “병이 왜 아직도 낫지 않는가”를 떠올리며 신체의 표면적인 변화에 집착하고 마음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것을 여전히 ‘병’으로 여기고 동시에 ‘치료 효과’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을 바꾼 후에는 동일한 문제가 나타나면 이렇게 생각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나의 어떤 마음을 수련하려는 것인가? 나의 어떤 세속적인 관념이 또 튀어나왔나? 나의 어떤 인심과 집착이 나쁜 요소에 틈을 탄 것인가? 법에서 ‘좋은 일이나 나쁜 일 모두 좋은 일이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 나의 생각은 법에 부합하는가? 내가 이것이 좋은 일이라는 법리를 깨달았는가?……”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전환이다. 전자는 병 치료를 위한 것이므로 병 치료의 효과에 집착하게 된다. 후자는 수련을 위한 것이므로 일이 닥치면 자신을 진정한 수련인으로 여기며, 생각이 법에 부합하는지, 어떻게 해야 향상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사고방식의 전환 (2):
평소에 몸이 건강할 때는 법공부에 그다지 정진하지 않고, 새벽 연공은 자주 일어나지 못하며, 세속의 일들에 빠져 휴대폰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다가 몸이 이상이 생기면 허겁지겁 법을 많이 읽고 연공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도 감히 보지 못한다. 하지만 몸이 조금 나아지면 또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이렇게 하여 자신도 괴로워하는 순환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제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나의 정진과 향상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인심이었다. 병을 고치기 위해 정진하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법을 공부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구세력이 안배한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겠는가? 몸이 좋아지면 나태해지고, 몸이 안 좋아지면 부랴부랴 임시방편으로 부처님 다리를 붙잡는 식이 되니, 이것이 어찌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수련하는 것이겠는가? 이토록 위대한 불법을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고작 자신의 건강을 얻기 위해서란 말입니까?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입니까! 이것은 대법을 도대체 어떤 위치에 올려놓은 것입니까? 대법의 신성함과 초상함이 어찌 우리 몸에서 진정으로 체현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집착할수록 얻는 것이 없었다.
이러한 점들을 깨닫고 나니, 수련은 응당 순정해야 하며 대법에 동화하기 위해 수련하는 것이지 병을 고치거나 사람의 이익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사람의 관념을 철저히 타파하고 버려야 할 때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수련의 착수점을 찾게 되었다. 나의 생각이 어떤 부분에서 잘못되었는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는 바로 사람의 그러한 근본 집착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겹겹의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법 속에서 수련되어 나온 정념으로 끊임없이 내 마음을 간파하고 바로잡으며, 대법의 요구에 따라 실속 있게 자신을 수련해야만 비로소 성공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근본 집착 2
앞서 말한 것은 신체 건강을 얻기 위해 법을 공부한 경우로, 이는 매우 명백하게 사람의 근본 집착임을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동수들은 애초에 오직 ‘수련’을 위해 대법을 공부했기 때문에, 쭉 자신의 초심이 순정하다고 여겨왔으며 내게 또 다른 근본 집착이 있을 것이라고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매우 은폐성이 있어서 깊이 파고들지 않으면 자신의 근본 집착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이 집착은 처음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일부 속인의 비교적 세속적인 생각들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련이 일정 경지에 도달한 후에는 그 근본 집착이 각기 다른 층차 위에서 장애를 형성하게 되며, 이를 돌파하지 못하면 계속 향상할 수 없게 된다.
나와 남편 동수가 바로 이러한 유형에 속했다.
남편 동수가 말했다. “나는 오직 수련을 위해 들어왔고, 대법에 대해서도 줄곧 매우 확고했으며 엄혹한 박해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수련 상태가 때로는 정진하고 때로는 해이해지며, 때로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초심의 그 뜨거운 열정을 되찾지 못하면서도 왜 그런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와서 조금은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애초에 수련을 위해 들어온 것은 틀리지 않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는 무엇을 위해 수련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당시 나는 부대의 군관이었는데, 부대 내의 부패가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매관매직하고 먹고 마시고 놀며 뇌물을 탐닉하는 것을 보면서 인류 사회의 도덕이 정말로 구제불능으로 타락했다고 느꼈습니다. 다행히 나 자신은 본성이 청명한 일면이 있어서 그렇게 세상 물결에 떠밀려 ‘여기에 썩어 문드러지고’ 싶지 않았기에 오직 수련만이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여기에 썩어 문드러지기 싫다’는 그 마음 하나가 나를 대법 수련으로 이끌었고, 마치 동아줄을 붙잡은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정진했고 매우 소중히 여겼는데, 왜 지금은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을까? 알고 보니, 그 근본 집착이라는 인심이 ‘만족’을 얻었던 것입니다. 대법 속에서 지금까지 수련해 오면서 층차가 어떠하든 간에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고 다시는 ‘여기에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기에 나태해졌고, 애초의 동력이 없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법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자신이 이해한 표준에 따라 수련한 것이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대법에 동화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곳에 꽉 막혀 더 이상 정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나 역시 애초에 수련을 위해 대법에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십대 시절부터 꿈에 부처님과 보살님을 자주 뵈었기에 수련과 관련된 책들을 많이 찾아 읽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신불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느꼈고, 그분이 사람의 수련을 보호해 줄 수 있으며 사람은 수련을 거쳐 인세의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인생의 초탈과 대자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대법을 배울 때도 꿈에서 사부님을 자주 뵈었고, 법을 공부할 때면 의욕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역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 층차에 머물러 있어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수련을 통해 인세의 모든 번뇌를 해탈하고 인생의 초탈과 대자재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바로 나의 애초의 근본 집착이 아니었을까요? ‘번뇌가 없고 인생의 초탈과 대자재를 얻는다’는 것은 꽤 초탈해 보이지만, 이 속에는 개인의 수련에 대한 인지도와 표준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정과 사업이 비교적 순조롭고 원만하며, 모든 것에는 인과응보가 있음을 이해하게 된 이치 덕분에 일반적인 일에는 마음을 잘 쓰지 않게 되었고, 이미 그 유유자적한 느낌을 얻었다고 여겨서 조금 정체되어 있었습니다. 삼고사는 비록 모두 하고 있지만 마음을 쓰는 정도도 다르고 요구하는 표준도 다르니, 더 위로 수련해 올라갈 만한 그토록 큰 열정이 없고 은근한 ‘만족감’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의 요구와 삼고사를 잘하는 표준에 비추어 보면 얼마나 큰 차이가 있습니까!”
이제 사부님께서 하신 그 법을 생각해 본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제자로 여길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집착심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며 법에서 법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사부님의 요구대로 하지 않고 자신의 근본 집착을 품은 채 대법을 공부하며, 법에서 대법제자에게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준에 도달한 것에 만족한다면, 이는 진정으로 순정한 대법 사부님의 제자가 아니다! 예전에는 이 법구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전혀 생각지 못했고, 그저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여겼으며 내 자신이 꽤 괜찮다고 느꼈다! 자신의 근본 집착을 깨닫고 나니 정말로 온몸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놀랐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수련해야 할지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대법 사부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조금의 타협도 없이 사부님과 대법의 표준에 따라 확고하고 실속 있게 수련하여 원만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이번 명혜망의 일깨움과 제안에 감사해야 한다.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를 외움으로써 자신의 근본 집착을 찾아내게 되었다. 물론 어떤 동수들은 입문할 때의 다른 집착들을 찾아내기도 했다. 예컨대 대법을 수련하면 자신에게 복록을 가져다주어 가정의 화목, 사업 번창 등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 것, 또 어떤 이는 사부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느낀 것 등이다. 또 어떤 이는 들어올 때 그냥 엉겁결에 친척이 시키니 시키는 대로 배웠고 지금도 여전히 왜 배우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이 그저 대법이 좋다는 것만 알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정말로 진지하게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대법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당신은 왜 수련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수련하는 과정에서 어떤 방면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엉겁결에 지나치게 될 것이다.
마지막 이야기
마지막으로 우리 법공부 소모임의 한 동수가 꾼 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동수는 다년 전에 사악한 세력에게 납치되어 불법 징역 4년을 선고받았고, 돌아온 후에도 줄곧 정진하지 못했으며 법공부 소모임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일정 기간은 속인과 다름없이 지냈다. 최근 1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공부에) 녹아들었다. 이번 법회에 원고를 투고하라고 하자 그녀는 늘 자신은 수련을 잘 못했고 몇 년 동안 뒤처져 있었으며 무엇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바로 며칠 전 어느 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어떤 학교에 시험을 보러 갔는데, 첫 번째 교실 고사장에서 시험지를 보고는 말했다. “안 봐, 난 아무것도 몰라, 뭘 시험 본다는 거야? 안 봐!” 그리고는 가버렸다. 다른 교실 고사장을 지나치다가 몇몇 할머니들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외우고 있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저렇게 연세가 많은 분들도 시험을 보러 오나?’ 그래서 물어보았다. “할머니들도 시험 보러 오셨어요? 뭘 외우고 계세요?” 한 할머니가 말했다.
“우리 모두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를 외우고 있어!”
동수가 물었다.
“이걸 외우면 돼요? 이걸로 시험을 볼 수 있어요? 그럼 나도 할 줄 아는데!”
할머니들이 말했다.
“그럼 너도 이리 와, 이거 외울 줄 알면 시험 볼 수 있어!”……
꿈이 여기서 끝나자 동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말했다.
“사부님께서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낙담하지 말라고 격려하시는 거예요. 비록 이전의 시간을 놓쳤을지라도, 비록 중간의 시간을 놓쳤을지라도 마지막 순간만큼은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당신도 따라잡았고, 이번에 ‘원만을 향해 나아가자(走向圓滿)‘도 다 외웠으며 많은 법리도 깨달았으니 힘을 내어 계속 실속 있게 정진하세요. 사부님께서 지금 당신에게 ‘이제 마지막 시험을 치를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듣자 동수는 웃음을 터뜨렸고, 우리 모두 함께 웃었다.
이상은 모두 우리 법공부 소모임 동수들의 개인적인 깨달음일 뿐이니, 법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동수 여러분들이 자비로이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