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대예언 탐구(2)
작가:명오(明奧) 정리
건곤만년가(乾坤萬年歌) 해석
1. 太極未判昏已過 風后女媧石上坐
태극이 아직 갈라지기 전(무극의 상태)에서 혼돈이 점차 사라지고
복희씨(풍은 복희의 성이고 후는 군주의 의미)와 여와가 상고시대(석기시대)에 중화민족의 시조가 되었다는 의미.
2. 三皇五帝已相承 宗派源流應不錯
삼황과 오제가 서로 이으니 이러한 종파(宗派)의 원류는 마땅히 착오가 있어선 안 된다.
삼황(三皇)은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고 복희, 신농, 수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오제는 헌원황제(軒轅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뇨(唐堯)와 우순(虞舜)을 말하는데 삼황오제시대는 대도가 아주 밝았던 시대로 8분의 신성한 군주가 천하를 다스려 만국이 서로 협력했고 중국오천년 문명의 튼튼한 기초를 다졌다.
3. 而今天下一統周 禮樂文章八百秋
지금 천하는 주나라가 통일했으니 예악과 문장이 발달해 800년을 가리라
태공(太公) 강자아(姜子牙)는 상나라 말기에서 주나라 초기의 인물이다. 주나라는 서주(西周)와 동주(東周)를 합해 모두 874년을 유지했기 때문에 흔히 800년을 말한다. 여기서는 대략적인 숫자만을 말했을 뿐이다.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예악과 문장이 성했고 문화가 아주 발달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발전을 통해 실증된 것이다. 서주 초기의 강자아가 주나라의 앞날에 대해 이렇게 정확하게 예측한 것은 실로 놀람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주나라의 연대에 관해 서로 다른 설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황극경세(皇極經世)》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BC 1132년 기사(己巳) 주나라 무왕(武王) 즉위
BC 1122년 기묘(己卯) 주 무왕 천하 통일.
BC 770년 신미(辛未) 서주가 망하고 낙양으로 천도. 이때부터 동주시대 시작. 춘추전국시대 시작
BC 722년 기미(己未) 동주 평왕(平王) 49년 공자가 춘추를 시작한 기점.
BC 687년 갑오(甲午) 한밤중에 성운이 비처럼 내리고 4월 초파일 인도에서 석가모니 탄생
BC 551년 경술(庚戌) 노나라에서 공자 탄생
BC 367년 갑인(甲寅) 동주가 또 두 개로 분할됨
BC 256년 주나라 멸망(秦 昭襄王 51년)
BC 246 진시황 즉위. BC 221년 경진(庚辰) 천하통일.
주나라는 중화고전문명의 전성시기로 문화가 매우 발달했고 오행학설 및 주역 학설이 발달했다.
유가 오경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주역은 서주시기에 나타났으며 그 내용이 아주 광범위하다. 괘사(卦辭)와 효사(爻辭)를 경문으로 역경이라고 하고 이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역전이라고 하는데 보통 주역이라고 하면 역경과 역전을 합한 것이다.
문자방면에서도 갑골문과 금문(金門) 등이 발달했으며 특히 청동기에 새긴 명문(銘文)이 많이 남아 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 태사(太史) 주(籀)가 대전(大篆)을 만들어 장기간 전해졌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상서에 주나라 시대 문헌과 전적이 많이 남아 있다. 문장구조가 복잡하고 표현이 간단하면서도 세련되어 당시의 근엄한 문풍(文風)을 표현했다.
서주시대에는 특히 예악이 발달하여 예(제사, 조회, 연회 등의 의식)와 악(예에 동반한 음악과 무용)을 규정한 시대이다. 보통 주나라 시대에 예악을 제정(制定)했다고 한다. 주대의 예악제도는 2가지 기본내용을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등급을 규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규정에 수반하는 악무를 기본으로 하는 아악(雅樂)이다.
주대에는 예악제도에서 등급이 아주 엄해서 장소와 신분이 다르면 예의(禮儀)에서 차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음악이나 악기도 달랐다.
주대에는 또한 민간의 유행과 풍습을 채록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풍속을 관찰하고 민의를 살폈다. 춘추시대에 이르러 공자가 이렇게 채록된 노래 가사들을 모아 새로 정리한 것이 바로 시경이다.
여기에는 서주 초기부터 춘추시대 중엽까지 500여 년간의 시가(詩歌)가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주대에는 또 음악을 주관하는 기구인 대사악(大司樂)을 두어 음악방면에서 귀족의 자제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켰다. 주례에 기록된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민정(民情)을 다스리고 조화롭게 가르치는 교화작용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서주시기의 가장 유명한 악무(樂舞)인 《대무(大武)》는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紂)왕을 토벌한 역사사건을 표현한 것으로 규모가 아주 큰 공연이었다. 춘추시기에는 6단락으로 연출했고 가수와 악대의 반주를 동반했는데, 예술적인 수준이 아주 높은 완전한 구조를 갖춘 악곡이었다.
서주 시대의 악기는 종류만도 수십 종에 달했는데 시경에 등장하는 악기만 29종에 달한다. 8음이라고 하여 금, 석, 토, 혁, 사, 목, 포(匏 박), 죽(竹) 등 8가지 종류의 재료로 악기를 만들었다. 사서(史書)에 종고지악鐘鼓之樂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관현악단이 시작된 것도 주나라 때이다. 이때 악대의 주요악기는 편종編鐘과 건고建鼓이다.
주대에는 또 12율(十二律)이 이미 확립되었다. 궁상각치우 5음 역시 확립되었다. 이때 사람들은 음계 중에서 궁음을 주로 하였고 궁음의 위치가 변하는 것을 선궁(旋宮)이라고 했는데 일종의 변조(變調)효과에 도달할 수 있다.
4. 串去中直傳天下 卻是春禾換日頭
관串에서 가운데 직선을 없애면 여(呂)가 되며 이는 진시황의 생부인 여불위(呂不韋)를 지칭한다. 春에서 아랫부분의 日을 禾로 바꾸면 秦이 된다. 즉 주나라가 멸망한 후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여불위의 아들 진시황이라는 의미.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串에서 直(정직, 중용의 의미)을 제거했다는 것은 음험한 권모술수로 천하를 획득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5. 天下由來不固久 二十年間不能守
천하의 유래가 굳고 오래지 못하여 20년을 지킬 수 없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제위에 12년을 있었고 진2세가 3년 자영(子嬰)이 46일 재위에 있었으니 이를 다 합해도 15년에 불과하다. BC 207년 유방과 항우가 진나라 수도 함양에 들어와 진을 멸망시켰다.
6. 卯坐金頭帶直刀 削盡天下木羊首
卯가 金위에 앉고 수직으로 선 刀를 지닌다는 것은 劉를 파자한 것으로 한고조 유방을 상징한다. 고조 유방은 BC 206년 乙未에 한나라를 세워 한왕(漢王)에 등극하는데 중국 전통 간지법에 따르면 을미는 목양木羊에 해당한다. 즉 206년 한나라가 건립되어 장차 천하를 통일한다는 의미.
유방이 세운 서한은 BC 206~AD 9년까지 지속된 후 외척인 왕망에 의해 멸망한다.
7. 一土臨朝更不祥 改年換國篡平床
泉中湧出光華主 興復江山又久長
一土란 王을 말하며 왕망이 조정에 임하니 더욱 상서롭지 못하여 연호와 국명을 바꾸고 어린 평왕(平王)을 침대(床)에서 독살한다. 즉 왕망이 권력을 독점하고 유씨왕조를 무너뜨린 후 新을 만들어 찬탈한다는 의미.
泉을 풀이하면 白水가 되는데 이는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남양(南陽) 백수향(白水鄉) 출신으로 광명하고 위대한 군주가 되어 유씨의 강산을 회복하고 오래 유지한다는 의미.
동한은 25년 을유(乙酉)~220년 경자(庚子)까지 약 200년을 유지한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는 25년에 황제를 칭하여 57년까지 33년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31년 동안 건무(建武), 2년 동안 건무중원(建武中元)이란 연호를 사용했다. 보통 이 시기를 건무성세建武盛世라고 하여 오랜 전란과 혼란을 극복한 태평성세로 간주한다. 그의 뒤를 이어 명제(明帝)와 장제(章帝)가 연달아 등극해 후한 200년 사직의 토대를 다졌다.
8. 四百年來更世界 日上一曲懷毒害
400년 만에 세계가 바뀌니 日上一曲(=曹)가 독해를 품다.
서한 240년에 동한 196년을 합하면 한나라는 모두 410년을 존속했다. 한나라를 찬탈한 것은 조조(曹操 후에 위무제로 추증)와 그의 아들 조비(曹丕 위문제)이다. 여기서 日上一曲은 중유법으로 사용되었다. 태양의 윗부분이 굴곡되었다는 말이 되어 이 당시 세도가 바르지 못하고 사회가 어두운 것을 반영한다. 보통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부른다.
9. 一枝流落去西川 三分社稷傳兩代
한 가닥 가지가 서천(사천을 말함)으로 가니 사직이 3분되어 2대를 간다
한 가닥 가지란 원래 유비(劉備)를 말하는데 원래 한나라 황실의 종친인 유비가 사천지방으로 가서 촉(蜀)을 세우고 위촉오 3국이 병립하는 삼국시대가 전개되어 2대를 간다는 의미. 촉나라는 소열제(昭烈帝) 유비와 후주(後主) 유선(劉禪) 2대만에 위(魏)나라에 의해 멸망당한다.
10. 四十年來又一變 相傳馬上同無半
兩頭點火上長安 委鬼山河通一占
40년만에 또 한 번 변하니 사마(司馬)씨에게 전해지고
사마염이 권력을 잡아 위나라를 통째로 차지한다.
사십년이란 유비와 유선이 재위한 43년(AD 221~263년)을 말하는데 이때 조씨의 위나라 정권에 변고가 발생한다. 同無半(=同에서 반쪽이 없다는 의미이므로 즉 司를 말함)을 馬앞에 놓으면 司馬씨가 된다. 즉 사마씨가 정권을 탈취한다는 의미이다. 뒷문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火를 두 개 겹쳐 정권을 찬탈하는 자의 이름이 염炎 임을 밝혔다. 즉, 위나라의 대장군이던 사마염이 권력을 찬탈했다는 의미.
“相傳馬上”이란 중의법으로 사마씨 부자가 마상에서 군대를 동원해 권력을 찬탈했다는 의미이며 “兩頭點火”란 안으로는 위나라를 밖으로는 촉과 오나라를 무력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결국 군사력을 동원해 권력을 잡지만 부정한 방법을 사용했다. 위나라는 265년에 망하고 사마염이 진(晉)의 무제(武帝)로 등극한다.
11. 山河既屬普無頭 離亂中分數十秋
산하가 이미 보무두(普無頭=晉 보에서 머리가 없다는 말)에 속하니 혼란속의 수십년이라.
비록 265년 사마씨가 권력을 잡아 천하를 다시 통일했지만 혼란이 지속되다 318년 멸망하고 사마예가 남쪽으로 천도해 동진(東晋) 왕조가 시작된다.
12. 子中一朱不能保 江東復立作皇州
진무제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혜제(惠帝 사마충)이고 둘째 아들이 회제(懷帝 사마치)이다. 313년 회제가 영가에서 피살된 후 무제의 손자인 민제(愍帝 사마업)가 뒤를 이으나 그 역시 318년 피살되어 서진(西晉)이 멸망한다. 동진을 세운 원제(元帝) 사마예(司馬睿)는 원래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있다가 민제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강동(江東)에서 황제를 선언하고 건강(建康)에 도읍을 정한다. 이를 보통 동진(東晋)이라고 한다. 사마예의 모친은 하후(夏候)씨이고 생부는 말단관리인 우금생(牛金生)으로 사마예의 원래 성은 우(牛)씨 이다.
본문에서 자식 중에 한 명의 주(朱)라고 한 것은 바로 원래 牛씨인 사마예를 가리킨다. 원래 서진 땅을 지키지 못하고 동쪽으로 옮겨 다시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 황주皇州란 수도를 말한다.
13. 相傳一百五十載 釗到兔兒平四海
150년을 서로 전해지다 “釗到兔兒(釗가 兎=卯 아래에 있으니 바로 劉를 말한다)” 유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천하를 통일한다. 동진은 318년부터 420년까지 존속한다. 420년 남조(南朝)를 통일한 사람은 남송(南宋)의 무제(武帝)인 유유(劉裕)이다.
14. 天命當頭六十年 肅頭蓋草生好歹
천자의 명운이 60년을 가니 “肅頭蓋草=蕭” 소씨가 나쁜 짓을 한다. 420년부터 479년까지 남조의 송나라가 60년을 간 후 남제(南齊)의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이 권력을 찬탈한다.
15. 都無真主管江山 一百年來擾幾番
耳東入國人離亂 南隔長安北隔關
모두 진정한 주인이 강산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며 백여 년 동안 몇 번이나 어지러웠나
“耳東=陳(진패선)”이 들어서니 더욱 혼란하고 통치지역이 장안에서 관문까지로 축소되었다.
동한이 멸망한 이후 중국은 거대한 분열시기로 들어가는데 보통 삼국위진남북조시대라고 한다. 여기서는 특히 남북조시대를 말하는데 남조에는 송제양진(宋齊梁陳) 4왕조가 번갈아 일어났다. 제의 뒤를 이은 양(梁)을 개국한 사람은 소연(蕭衍)이며 뒤를 이은 진(陳)을 개국한 이는 진패선(陳霸先)이다. 제는 다섯임금이 23년, 양은 4임금이 55년을 가고 진은 5임금이 33년을 갔다. 제양진을 합하면 모두 111년이다. 이 백여년 동안 사회는 분열과 혼란에 처했고 조대가 여러 차례 개변되었다. 581년 수나라가 등장해서야 비로소 천하가 다시 통일된다.
16. 水龍木易承天命 方得江山歸一定
五六年來又不祥 此時天下又紛爭
水龍(=壬辰)에 木易(=楊)씨가 천명을 받으니 강산이 다시 통일되며
5*6 30년 만에 또 상서롭지 못하여 이때 천하가 다시 분쟁에 빠진다
오육에 대해서는 5,6년 5+6=11년, 5*6=30년 등의 해석이 가능한데 수나라의 3임금 29년을 갔다. 590년~ 617년.
17. 木下男兒火年起 一掃煙塵木易已
高祖世界百餘年 雖見干戈不傷體
子繼孫承三百春 又遭離亂似瓜分
“木下男兒=李” 이씨가 화의 해(丁丑年 617년)에 일어나 먼지를 소탕하니 양씨의 수나라가 멸망한다
고조 이연(李淵)이 창립한 당나라가 100여년을 가는데 비록 전쟁은 있지만 큰 손상은 없다.
자자손손 300년을 잇다가 다시 난을 만나 분열된다.
당나라를 세운 뒤 처음 100년간은 돌궐 등과의 전쟁이 있긴 했지만 비교적 태평성대였고 21임금 288년을 간다.(618~907) 주전충에 의해 멸망.
18. 五十年來二三往 不真不假亂為君
오십년 동안 2+3=5개의 왕조가 오니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며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오대십국시대(907~960)는 짧은 기간에 다섯 왕조가 들어선 아주 혼란했던 시기로 심지어 제위를 전하는 데도 양자에게 전하거나 처조카에게 전하는 등 정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황제라고 할 수 없다.
19. 金豬此木為皇帝 未經十載遭更易
金豬(금 돼지=신해년을 의미)해에 “此木=柴” 시씨가 왕이 되니 10년을 못가 경질된다.
또는 금저를 후주(後周)의 황제 곽위(郭威)가 신해년에 천하를 얻은 것으로 보고 그가 사망한 후 자식이 없어 처조카인 시영(柴榮)에게 승계했다.
곽위는 6년을 재위했고 시영과 그 아들이 모두 3년 반을 재위해 겨우 9년 반동안 유지되었다. 결국 송나라를 세운 조광윤(趙匡胤)에게 선양했다.
20. 肖郎走出在金猴 穩穩清平傳幾世
“肖郎走出(초랑이 걸어나온다는 말은 趙를 파자한 것)” 조씨가 금원숭이해(경신년)에 나와 조용히 천하를 통일하고 몇 세대를 전한다.
21. 一汴二杭事不巧 卻被胡人通佔了
三百年來棉木終 三閭海內去潛蹤
일변이항(一汴二杭)의 일이 공교롭게 오랑캐에게 점유당하니 300년에 면목(棉木=나무를 덮는다는 말. 宋 또는 棉과 豕의 옛날 발음이 같아서 家에서 豕를 제거한 宀에 木을 더해 宋으로 풀기도 한다.)이 망하고 삼려해내가 물속에 잠긴다. (남송이 몽골군에 패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대신인 육수부陸秀夫가 마지막 황제인 어린 조병을 업고 바다에 투신해 자살한다 1279년)
북송의 수도는 원래 변경(汴京)이었고 남송은 임안(臨安 절강 항주)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변이고 두 번째는 항이라고 했다.
송나라는 960년 庚申에서1279년까지 약 320년을 존속했다.
22. 一兀為君八十載 淮南忽見紅光起
八隻牛來力量大 日月同行照天下
土猴一兀自消除 四海衣冠新彩畫
일올(一兀=元)이 군주가 되어 80년을 통치하는데 회남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일어나
8마리 소[八+牛=朱 주원장을 말함]는 역량이 크고 日月(=明)이 함께 하여 천하를 비추네
흙원숭이 해(戊申 무신 1368년)에 원이 망하고 4해 의관이 새롭게 빛을 내네(원나라 시대의 의상이나 제도를 모두 변경한다는 의미)
원나라는 1280~1368년까지 89년을 가고 명태조 주원장이 회남(淮南)에서 홍건군紅巾軍을 일으킨다. 또 다른 해석은 주원장이 태어날 때 붉은 빛이 하늘에 비추고 기이한 향이 흩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홍광은 朱원장을 의미한다. 역량이 크다는 말은 주원장의 군대가 힘이 세다는 의미도 되고 또는 주원장의 연호가 홍무(洪武)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일월이 함께한다는 것은 명(明)나라를 말한다.
23. 三百年來事不順 虎頭帶土何須問
十八孩兒跳出來 蒼生方得蘇危困
삼백년(1368~1644) 동안 일이 순조롭지 않으니 흙호랑이 해(무인년)에 어찌 물으랴
“十八孩兒=李(이자성을 말함)” 이자성이 뛰쳐나오고 창생은 비로소 위험과 곤란에서 벗어나네
뛸 도(跳)는 도망갈 도(逃)와 통한다. 명나라 숭정제 말년 이자성이 반란군을 이끌고 수도를 공격하자 숭정제는 목을 매 자살한다. 5월에 관문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이자성을 몰아내나 온 백성들이 위험에 직면한다. 결국 청병이 들어와 나라를 안정시킨 후에야 백성들이 편안해진다.
24. 相繼春秋二百餘 五湖雲擾又風顛
200년을 서로 이으니 오호(중국)에 풍운이 인다.
청나라는 1644년 순치제부터 1662년 강희제, 1723년 옹정제, 1736년 건륭제를 거친 후 1911년 멸망한다.
이 문장의 주석을 쓴 한엄광(漢嚴光)은 청나라 시대 사람이라 여기까지만 해석했다. 만년가의 나머지 부분은 후일을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