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오(明奧) 정리
【정견망】
유백온 관련 일화
1. 일대명상(一代名相) 유백온
유기(劉基)는 흔히 유백온(劉伯溫)이라 불리며, 명태조 주원장의 개국 참모이자 명초의 일대 기인(奇人)이다. 《명사(明史)》에서는 그를 두고 “경전과 역사에 두루 통달해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특히 상위학(象緯之學, 천상을 보고 예측하는 학문)에 정통했다”라고 기록했다. 민간 전설과 문학 작품 속의 유백온은 장량이나 제갈량보다도 신통력이 뛰어나며, 심지어 미래를 예견하고 고금을 통찰하며 풍운을 일으키는 신선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제왕의 사부(帝師)’, ‘왕을 돕는 재상(王佐)’이라 불렸으며, “앞으로 500년, 뒤로 500년을 내다본다”라는 명성을 얻었다. 예언서인 《소병가(燒餅歌)》가 바로 그가 쓴 것이다. 유백온은 《소병가》에서 먼 미래를 예언했는데, 당연히 원조(元朝)의 기수(氣數)가 다하고 명조(明朝)가 흥할 것임을 보았다. 그렇기에 그는 천의에 순응하여 일대의 명상이 될 수 있었다.
유기는 철학자, 모략가, 문학가, 군사 이론가, 역학자, 천문학자였으며 그의 저술 또한 이러한 방면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명사》에 따르면 “그의 문장은 기운이 창성하고 기이하여 송렴(宋濂)과 더불어 일대(一代)의 종주가 되었다”라고 한다.
그의 저서 《욱리자》는 상상력이 기이하고 함축된 의미가 깊으며, 《백전기략(百戰奇略)》은 병서의 보전이다(후대에 유백온의 저작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음). 천문 역수 분야에는 《천문비략(天文秘略)》이 있고, 복서(卜筮) 분야에는 《관상완점()》이 전해진다. 또한 《명사·예문지》에 따르면 역법서인 《옥동금서(玉洞金書)》 1권, 《주령기경(注靈棋經)》 2권, 《해황극경세계람도(解皇極經世稽覽圖)》 18권 등을 저술했다. 특이한 점은 깃털 부채를 들고 건을 쓴 채 담소하는 전통적인 학사나 명신의 우아한 모습과 달리, 유백온은 포의를 입고 위엄이 넘치며 강렬했다. “수염이 삐죽삐죽하고 외모가 훤칠하며, 기개가 있고 큰 절개가 있어 천하의 안위를 논할 때면 의로운 빛이 얼굴에 나타났다”라고 하니, 완전히 양산박 호걸 같은 모습이었다.
유기는 22세에 진사에 합격했다. 그러나 위인이 강직하고 청렴결백했다. 후에 감찰어사의 실책을 들추어냈다가 배척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주원장이 군사를 일으킨 후, 유기는 세상에 나와 그에게 의탁했다.
유기가 의탁한 후 주원장은 자주 유기를 찾아와 의견을 구했다. 유기는 당시의 군사 형세를 분석하여 주원장에게 말했다. “주공께서는 현재 금릉(남경)을 점유하고 계신데, 형세가 험요하고 지리적 위치가 매우 좋습니다. 하지만 동남쪽의 장사성과 서북쪽의 진우량이 자주 경계를 침범하며 대적하고 있으니, 이는 북쪽 중원을 평정하는 데 후환이 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이 두 사람을 제거해야 합니다.”
주원장이 “그들의 세력이 큰데 어떻게 상대해야 하오?”라고 묻자, 유기는 주원장을 위해 제업(帝業)을 실현할 웅대한 청사진을 기획해 주었다.
유기는 “장사성은 안목이 짧고 큰 뜻이 없어 자기 땅만 지키려 할 뿐이니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진우량은 다릅니다. 그는 주인을 죽이고 자리를 찬탈했으며 야심이 크고 음모가 많아 위험한 상대입니다. 게다가 남경 상류인 무창을 점거하고 거대한 함선과 정예병을 가졌으니 시시각각 우리를 삼키려 합니다. 이런 형세에서는 양면 전쟁을 해서는 안 되며, 먼저 병력을 집중해 진우량을 섬멸해야 합니다. 진우량이 망하면 장사성은 고립무원이 되어 단번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주공께서 군사를 북으로 몰아 중원을 평정하고 원조(元朝)를 소멸시키면 제왕의 업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유백온이 이처럼 주원장에게 제왕의 업을 예언한 것은 제갈량이 융중에서 유비에게 천하삼분(天下三分)을 예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 예언은 주원장의 안목을 크게 넓혀주었다. 과거에 주원장은 그저 군웅들과 땅을 빼앗는 데만 치중했을 뿐, 천하를 취해 제업을 세울 전략적 방침이 없었다. 유기의 말을 들은 주원장은 매우 감탄하며 기뻐하며 말했다. “선생께서는 앞으로도 고명한 계책이 있으면 즉시 말씀해 주시오!”
이후 주원장은 유기의 전략에 따라 단계적으로 천하를 취했다.
원 지정(至正) 23년(1363년) 파양호 대전에서 진우량은 주원장에게 패해 화살을 맞고 죽었다. 이듬해 진우량의 아들 진리(陳理)가 항복하면서 한(漢 진우량의 나라) 정권은 멸망했다. 진우량을 소멸시킨 후 주원장은 다시 병력을 집중해 동남쪽의 장사성을 상대했다.
지정 27년(1367년), 주원장이 소주(蘇州)를 함락하자 장사성은 포로가 된 후 스스로 목을 매 죽었고 그의 대주(大周) 정권도 멸망했다.
이해 연말 이르러 주원장은 동남쪽의 반쪽 강산을 통일했다. 동시에 주원장은 독자적인 깃발을 세워 소명왕(小明王) 한림아의 통제에서 벗어났고, 사람을 시켜 과보강(瓜步江)에서 한림아를 익사시켰다.
이어 주원장은 지정 27년(1367년) 대장군 서달(徐達)과 상우춘(常遇春)에게 군사 20만을 주어 북벌하게 하니, 먼저 산동을 취하고 하남을 돌아 동관을 지키며 북경으로 직격했다. 1368년 정월, 주원장은 남경에서 정식으로 황제에 등극해 첫 연호를 홍무(洪武)로 하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했다. 그해 8월, 명나라 북벌군이 북경을 함락하자 원 순제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원 왕조는 마침내 멸망했다.
결국 주원장이 세력을 타고 일어나 군웅(群雄)을 평정하고 원 왕조를 뒤엎은 것은 모두 유기의 당초 모략 덕분이었다. 유기가 주원장에게 예언했던 제왕의 업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유기의 분석에 따르면 진우량이야말로 주원장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이었다. 주원장은 유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먼저 병력을 집중해 진우량을 상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진우량 정권을 소멸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는 주원장과 진우량이 벌인 첫 번째 대전을 먼저 언급하겠다.
당시 진우량은 아주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무창(武昌)에서 황제를 자칭한 후, 그는 자주 병력을 거느리고 주원장의 영토를 침범하여 태평로(太平路)를 점령하고 주원장의 양자 주문손(朱文遜)과 수장(守將) 재운(在雲)을 죽였으며, 동남쪽의 장사성과 연합해 남경을 공격하려 했다.
장사성이 응하지 않자 진우량은 직접 전함을 집결시키고 정예군을 지휘해 강을 따라 내려오며 강주(江州 지금의 강서 구강시)에서 남경을 직공했다. 함선이 강에 가득하고 깃발이 해를 가릴 정도로 기세가 등등했다.
주원장의 부하들은 진우량이 침범한다는 보고를 듣고 크게 불안해했다. 어떤 이는 항복을 주장하고 어떤 이는 종산으로 도망가자고 했으나, 오직 유기만이 눈을 부라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발견한 주원장이 유기를 따로 불러 밀실에서 대책을 물었다.
유기는 이때 매우 격앙되어 분개하며 말했다.
“항복이나 도망을 주장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 마땅합니다!”
주원장이 “선생에게 적을 깨뜨릴 계책이 있소?”라고 묻자, 유기는 “진우량은 너무 교만하니 교병필패(驕兵必敗)입니다. 그가 고립된 군사로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매복 작전으로 습격하면 이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예로부터 후발제인(後發制人 나중에 움직이는 자가 제압한다는 의미)하는 자가 승리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편안함으로 피로한 적을 상대한다면 진우량이 패하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우량의 기세를 꺾고 적을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주공께서 제업을 성취하는 첫걸음입니다!”라고 답했다.
주원장은 우려를 씻어내고 유기의 건의에 따라 호대해(胡大海)에게 신주(信州 지금의 강서 상요上饒)를 습격하게 하여 진우량의 뒷길을 견제했다. 또한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을 하게 하여 진우량을 깊숙이 유인하는 동시에, 여러 장수에게 곳곳에 매복하여 적군을 기습하게 했다. 진우량은 과연 계책에 빠져 대패하여 도망치며 수많은 전함을 버려두었다. 이 전투에서 주원장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유기의 예언은 다시 한번 적중했다.
2. 유백온과 주원장의 대련
주원장이 농민 봉기군을 이끌고 유백온의 고향에 도착했을 때, 하루는 길에서 채소 장수를 만났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주원장은 상대방의 말솜씨가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 상련(上聯)을 내어 대를 맞추어 보라고 했다.
아침 노을 비단 같고 저녁 노을 비단 같으니, 동쪽 시내도 비단이요 서쪽 시내도 비단이라
(朝霞似錦,晚霞似錦,東川錦,西川錦)
채소 장수는 이를 듣고 즉시 대련을 맞췄다.
초승달은 활 같고 그믐달도 활 같으니, 상현달도 활이요 하현달도 활이로다
(新月如弓,殘月如弓,上弦弓,下弦弓)
주원장이 그의 문재(文才)가 뛰어남을 보고 성명을 물으니, 바로 그 유명한 유백온임을 알게 되었다. 주원장은 즉시 그에게 봉기군에 가담할 것을 권했고, 유백온은 반복해서 고민한 끝에 응낙했다.
유백온이 주원장을 따라 소주를 공격할 때, 주원장이 상련을 내어 유백온에게 맞추게 했다.
천하의 입이요 하늘 위의 입이니, 뜻은 오나라를 삼키는 데 있노라
(天下口,天上口,志在吞吳)
이는 파자(拆字) 대련이다. ‘천하구(天下口)’는 ‘삼킬 탄(吞)’ 자가 되고, ‘천상구(天上口)’는 ‘오나라 오(吳)’ 자가 되어 “뜻은 오나라를 삼키는 데 있다(소주는 옛 오나라 땅)”는 의미가 된다.
유백온은 잠시 생각한 후 상련의 뜻에 대응하여 답했다.
사람 중의 왕이요 사람 옆의 왕이니, 뜻은 모든 것을 맡으려 함이라
(人中王,人邊王,意圖全任)
‘인중왕(人中王)’은 ‘온전할 전(全)’ 자이고, ‘인변왕(人邊王)’은 ‘맡길 임(任)’ 자이니 결론은 “전하께서 모든 것을 맡으려 하신다”는 뜻이다. 문구상으로도 묘한 대련이지만 뜻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주원장은 그저 오나라를 취하겠다고 했으나, 유백온은 강남뿐만 아니라 전 중국을 모두 통일할 것이라 말한 것이다.
얼마 후 주원장은 소주를 함락했고, 몇 년 뒤 대명 왕조를 세워 정말로 ‘전임(全任)’을 실현했다.
3. 유백온의 꿈속 대련 풀이
유백온은 명태조 주원장의 개국 참모이자 민간 전설에서 신기묘산(神機妙算)의 인물로 통하며, 심지어 제갈량의 환생이라는 설도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루는 유백온이 행군 도중 꿈을 꾸었는데, 자신이 주원장의 막사를 떠나 홀로 깊은 산림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산길은 매우 험하고 숲은 점점 깊어져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유백온은 은폐된 곳을 찾아 볼일을 보려 했는데, 황망 중에 꿩 떼가 놀라 하늘로 날아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 천년 고찰이 있어 유백온이 곧장 들어갔더니, 묘당 문 현판에 ‘제갈무후(諸葛武侯)’ 네 글자가 쓰여 있었고 문 좌우에는 대련이 붙어 있었다.
금닭과 흙개와 달리는 말의 때에, 머리 남긴 금칼이 여기서 소변을 보리라
(金雞土狗奔馬時 留頭金刀在此溺 )
유백온은 그 뜻을 알 수 없었고 따져볼 겨를도 없어 우선 묘 안의 벽진 곳에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차 싶었다. 어찌 묘당 안에서 소변을 보아 신령을 모독할 수 있단 말인가. 죄가 작지 않다 여겨 급히 신상 앞에 깊이 절을 올렸다. 그때 신상 아래에 목각 신주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하를 셋으로 나눈 제갈량(三分天下諸葛亮)
유백온은 크게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천하를 통일하고도 아무 말 않는데, 천하를 셋으로 나눈 게 뭐 그리 대수인가.” 화가 나 목패를 땅에 던져 부러뜨렸다. 그런데 부러진 패 안에 작은 패가 하나 더 있었고, 유백온이 그것을 집어 보니 거기에는 뜻밖에도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하를 하나로 통일한 유백온(一統天下劉伯溫)
그제야 유백온은 크게 놀라 제갈량이 과연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천 년도 더 전에 내가 이곳에 와서 소변을 볼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묘문 앞에 적힌 대련을 보니, ‘류두금도(留頭金刀)’는 바로 자신의 성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머무를 류(留)’에서 ‘밭 전(田)’을 빼고 ‘금(金)’과 ‘도(刀)’를 더하면 바로 ‘유(劉)’ 자가 된다.
상련의 ‘금계토구분마시’는 시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었다. 당시 정유(丁酉)년이니 ‘유’는 닭(계)이고, 9월 9일의 지지는 술(戌)이니 ‘술’은 바로 띠에서 개에 해당한다. 또 ‘분마시’는 분명 정오(午時)를 가리키는데 바로 정오였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제갈량이 정확히 맞혔다는 사실에 유백온은 너무나 신기하여 연신 제갈량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나니 어찌 된 일인지 일어설 수가 없었다.
백방으로 궁리하던 중 맞은편 벽에 주먹만 한 글씨 네 개가 적힌 것을 보았다. “기갑이주(棄甲而走, 갑옷을 버리고 달아나라).” 그는 이것이 갑옷을 벗어야 몸을 뺄 수 있다는 암시라고 생각했다. 유백온이 급히 갑옷을 벗자 과연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유백온은 꿈에서 깨어났다.
4. 유백온의 자금성 건축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 주체(朱棣)인데, 그는 정벌에 능해 아버지를 도와 몽골의 원을 막북으로 몰아내고 황하 이북의 넓은 땅을 수복하여 공훈이 탁월했다. 주원장은 그를 연왕(燕王)으로 봉해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을 지키게 했다. 태조 사후 황손 주윤문이 즉위하여 황제가 되자 연왕이 어찌 복종하겠는가? 그는 ‘군주 측근의 간신을 제거한다(淸君側)’는 명분으로 수십만 정예군을 이끌고 남경을 함락한 뒤, 조카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했다.
영락제 주체는 남경이 좋기는 하나 자신의 근거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의 터전은 북평이었기에 도읍을 북으로 옮기고 북평을 북경으로 고쳤다. 그러나 당시 북경은 연이은 전쟁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황제가 거처할 곳도 초가집 같아 황실의 위엄이 전혀 없었다. 주체는 아예 원 대도(大都) 동쪽에 새 성을 쌓고 황성도 함께 짓기로 마음먹었다. 황성에는 궁궐을 많이 짓고 방도 넓고 화려해야 천자의 존엄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에게 이 일을 맡길까 고민하다가 유백온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마침 유백온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왔다.
유백온은 삼귀구고례를 올린 후 신비로운 표정으로 주체에게 말했다.
“폐하, 신이 어젯밤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은 사직의 안위와 관련이 있어 폐하께 아뢰고 결단을 구하고자 합니다.”
주체가 급히 물었다. “무슨 꿈이오? 어서 말해보시오.”
유백온이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어젯밤 신이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느 시각인지 비단 옷을 입은 무사 둘이 나타나 옥황대제께서 부르신다며 신을 부축했습니다. 신은 지체 없이 그들을 따라 바람을 타고 날아가 순식간에 능소전에 도착했습니다.”
주체는 유백온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이 늙은 도사가 할 말을 곧장 하지 않고 뱅뱅 돌리는구나. 어디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지켜보자’
“옥황대제께서 신에게 직접 물으셨습니다. ‘네가 인간 세상에서 영락제 곁에 있는 유백온이냐? 듣자 하니 그가 새 성을 쌓고 황궁을 지으려 한다는데 사실이냐?'”
주체는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내 마음속의 일이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옥황대제가 어찌 안단 말인가. 그는 유백온에게 물었다. “경은 무어라 답했소?”
“신은 ‘천의(天意)는 헤아리기 어려우나 영락 황제께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은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유백온이 말을 이었다. “옥황께서 신에게 말씀하시길, ‘그렇다면 내 말을 영락제에게 전하라. 지금 천하의 전쟁이 막 멈추었으니 백성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북경 성은 쌓되 군사와 백성을 고생시켜서는 안 된다. 영락제는 서두를 것 없이 먼저 북경의 기초 형태를 세우면, 후세의 현명한 군주와 신하들이 자연히 금상첨화로 정교하게 다듬을 것이니 어찌 북경이 천하 제일의 도성이 되지 않겠느냐? 다만 황궁은 지금 즉시 지어도 좋으나, 짐의 천궁(天宮)보다는 커서는 안 된다. 그는 인간의 천자이고 나는 천상의 주인이니 예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다. 내 말을 따르면 내 서른여섯 천강성(天罡)과 일흔두 지살성(地煞)을 보내 대명(大明) 강산에 비바람이 순조롭고 나라가 평안하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고 용포를 휘저으시니 향기로운 안개가 몰려와 신이 놀라 깨어났습니다. 잊어버릴까 두려워 급히 입궐하여 아뢰는 바입니다.”
주체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옥황의 말씀대로 하겠다. 북경 성의 크기는 형편에 맞게 하되, 내 황궁이 천궁보다 너무 작아서는 안 된다! 가서 거행하라.” 유백온은 명을 받들어 물러났다.
시간이 흐른 뒤 유백온은 일을 다 마쳤다. 영락제에게 검수를 청하니 주체는 성벽은 보지도 않고 황궁으로 직행했다. 궁궐은 위엄 있고 붉은 담장에 황금 기와가 번쩍이며 화려하기가 주원장의 남경 황궁보다 나았다. 그는 황궁을 한 바퀴 돌았으나 방이 몇 칸인지 다 셀 수가 없었다.
유백온이 즉시 보고했다. “9,999칸 반이니 천궁보다 딱 반 칸이 적습니다.”
주체는 너무 기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옥황이 보낸 서른여섯 천강과 일흔두 지살은 어디 있는가?” 유백온이 말했다. “신을 따라 태화전 앞으로 가보시지요.”
군신이 넓은 태화전 앞 광장에 이르자 유백온이 대전 앞 좌우에 있는 금을 입힌 큰 물항아리 18개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서른여섯 천강입니다.”
“그럼 일흔두 지살은?”
유백온은 주체를 태화전의 3층 한백옥(漢白玉) 석대로 안내하며 손으로 남북으로 늘어선 외조와 내궁을 가리켰다.
“폐하, 이 아래에 있는 일흔두 개의 배수구 지랑이 바로 일흔두 지살입니다!”
영락제는 호탕하게 웃으며 연신 절묘하다고 칭찬했다.
“이 황성을 자금성(紫禁城)이라 부르도록 하라!”
5. 유백온의 지혜로 북경 성을 쌓다
연왕 주체가 남경에 머물 때 북방에 새로운 도성을 세우고자 하여 신하 유백온을 불러 도성의 위치를 물었다. 유백온은 “대장군 서달에게 이 일을 맡기십시오”라고 했다.
연왕이 서달을 불러오게 하자 유백온이 서달에게 말했다. “장군의 신력(神力)으로 북쪽을 향해 화살 한 대를 쏘십시오. 화살이 떨어진 곳에 도성을 세울 것입니다.”
서달은 수락하고 전각 밖으로 나와 활을 당겨 북쪽으로 쏘았다. 유백온은 즉시 사람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대운하를 따라 북으로 추격했다.
그 화살은 정말 멀리 날아가 지금의 북경 성 남쪽 20여 리 지점인 남원(南苑)에 떨어졌다. 당시 남원에는 여덟 집의 소지주들이 살고 있었는데 화살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혼비백산했다. “여기 성을 쌓으면 우리 집과 땅이 다 몰수되지 않겠는가?”
궁리 끝에 그들은 화살을 다시 쏘아 보내기로 했다. 화살은 다시 북쪽으로 날아가 지금의 후문교(後門橋) 자리에 떨어졌다.
전해지는 바로는 후문교 아래에 ‘북경성(北京城)’ 세 글자가 새겨진 석비가 있는데 그 석비 아래가 바로 당초 화살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유백온은 남원에 도착해 손가락을 꼽아 계산해 보고(掐指一算) 화살이 이곳에 떨어졌어야 함을 알았다.
그는 여덟 집 지주들을 불러 화살을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지주들은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빌었다. “여기 성만 쌓지 않는다면 무슨 조건이든 다 들어주겠습니다.”
유백온은 생각하더니 말했다. “좋다. 다만 도성을 쌓는 비용은 너희가 대라.”
지주들은 자신들이 돈이 많으니 성 하나 쌓는 건 대수롭지 않다고 여겨 승낙했다.
가장 먼저 서직문(西直門) 성루를 짓기 시작했는데, 성루를 다 짓기도 전에 지주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다. 어찌해야 할까? 유백온은 다시 계산을 해보더니 부하들에게 ‘심만산(沈萬山)’이라는 사람을 찾으라고 명했다. 며칠 뒤 정말로 심만산을 찾아내 십찰해(什刹海)에서 유백온을 면담하게 했다.
이 심만산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알고 보니 그는 거렁뱅이로 온몸은 더럽고 옷은 해졌으며 겨드랑이에는 깨진 사발 하나를 끼고 있었다. 유백온이 돈 때문에 자신을 찾았다는 말을 듣고 그는 겁에 질려 떨며 말했다. “저는 가난한 거지인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유백온은 눈을 부릅뜨고 “돈이 없으면 안 된다. 여봐라, 이놈을 쳐라!”라고 했다. 부하들이 즉시 몽둥이를 들고 심만산을 호되게 때렸다. 처음엔 애걸복걸하던 심만산은 나중에 매가 너무 아프자 발을 구르며 말했다. “이 땅 밑에 은자가 있으니 파보십시오.”
유백온은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시켜 파보게 하니, 땅속에 과연 새하얀 은자가 가득 담긴 항아리들이 있었다. 성 쌓는 일은 계속되었으나 머지않아 은자가 다시 떨어졌고, 다시 심만산을 몽둥이질했다.
심만산은 급한 김에 또 땅 밑을 가리켰다. “여기 은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파니 또 은자가 나왔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한 끝에 마침내 북경 성이 완공되었다. 은자를 파내느라 생긴 큰 구덩이들에 물을 채우니 그것이 오늘날의 십찰해, 북해, 중남해가 되었다.
6. 유백온의 죽음
유기는 원조 강서 고안현승, 강절유학부제거 등의 관직을 지냈고 방국진 부대를 진압하는 데 참여하여 처주로총관부판(處州路總管府判)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싫어해 분연히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원 지정 20년, “태조(주원장)가 금화(金華)를 함락하고 괄창을 평정했을 때 유기와 송렴 등의 명성을 듣고 예물로 초빙했다. 유기가 응하지 않자 총제 손염(孫炎)이 다시 편지를 보내 간곡히 요청하니 그제야 세상에 나왔다.”(《명사》)
남경(응천)으로 초빙되어 참모가 된 후, 유기는 시무 18책을 올려 진우량을 먼저 멸하고 장사성·방국진과는 잠시 타협하여 양면 전쟁을 피하며 각개격파하라는 등 결정적인 군사 전략을 제시했다. 주원장은 이를 채택했다. 주원장이 진우량, 장사성, 방국진 등의 세력을 차례로 멸한 것은 대부분 유기의 계책을 따른 것이었다.
지정 24년 주원장이 오왕(吳王)으로 자립하자 유기는 태사령이 되었다.
지정 27년 어사중승 겸 태사령으로 승진하여 북벌로 원조를 멸망시킬 방략을 세워 실현했다. 그동안 8년 동안 군사 기밀에 참여하며 대국을 기획해 평정의 공을 세웠다. 홍무 3년 성의백(誠意伯)에 봉해졌다.
전략을 세운 공적으로 따지자면 유기는 마땅히 공(公)에 봉해져야 했으나, 처음에 공으로 봉해진 6인은 이선장, 서달, 상무(常茂), 이문충(李文忠), 풍승(馮勝), 등유(鄧愈)였다. 이들은 상우춘의 아들 상무를 빼고는 모두 초기부터 주원장을 따라 생사를 같이한 ‘형제들’이었다. 비록 주원장이 유기에게 “매번 몸을 낮추어 경청했고, 항상 노선생이라 부르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다’라고 했다”(《명사》)고는 하지만, 그것은 가르침을 구할 때의 자세일 뿐이었다. 아마도 자격지심과 자만심이 뒤섞인 심리였을 것이다.
문맹에 성정이 거칠었던 주원장은 내심 지식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비록 유기나 도안(陶安), 진종룡(秦從龍), 주승(朱升), 범상(範常) 같은 문인들이 천하 평정에 기여한 바가 전쟁터의 무장들에 못지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보상은 있었다. 유기를 달래기 위해 주원장은 청전현의 조세를 면제해 주며 “유기의 고향에서 대대로 미담이 되게 하라”고 명했다. 나중에 “여러 번 유기의 작위를 높여주려 했으나 유기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명사·열전 16》)
하지만 유기는 재능이 하늘을 찌르고 지략이 뛰어났어도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가 학문에만 전념했다면 그 성취는 어느 시대의 종주에게도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정(性情)이 있는 사람이라 난세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숨어서 연구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또한 마음이 지극히 성실하고 성격이 강직하여 악을 원수처럼 미워했으니, 천하가 태평해진 후 관직에 몸담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그 자신도 이를 알고 있었다.
홍무 3년 주원장이 그를 승상으로 임명하려 하자 유기는 “신은 악을 미워함이 너무 심하고 번거로운 일을 견디지 못하니, 직을 맡았다가는 폐하의 은혜를 저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천하에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오직 명주(明主)께서 마음을 다해 찾으소서”라고 답했다. 안타깝게도 한번 제후의 문에 들어서면 마치 깊은 바다처럼 이미 물러날 여지가 없었다.
즉위한 후 주원장은 심태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리 족속이 아니면 그 마음이 반드시 다르다(非我族類, 其心必異)”는 것은 모든 제왕의 일관된 생각이지만, 주원장에게서는 그것이 더욱 가혹하고 무정하게 나타났다.
본래 첫 번째 숙청 대상은 권력을 독점한 승상 이선장이었는데, 이선장이 유기를 시기했기에 주원장은 유기를 칼잡이로 선택하려 했다. “태조가 어떤 일로 승상 이선장을 질책하자 유기가 말하기를, ‘이선장은 개국공신으로 장수들을 화합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태조가 ‘이 자가 여러 번 그대를 해치려 했는데 그대를 위해 변호하는가? 내가 그대를 승상으로 삼으려 한다’고 하자 유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이는 기둥을 바꾸는 것과 같아서 큰 나무를 얻어야 합니다. 작은 나무를 묶어서 세우면 곧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명사·열전 16》)
유백온이 비록 도리를 말했으나, 주원장이 그를 시켜 이선장을 정리하게 한 것이 이용이자 충성도 테스트임을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명을 받들었다면 의심을 덜었을지 모르나,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唇亡齒寒)이다. 이 선례를 남기면 개국 공신들에게 대하는 태도가 바뀔 것이기에 그런 불의한 일은 유기의 성격상 절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듬해 그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백온이 고향으로 물러났으나 주원장의 의심은 더 강했다. 곁에 없으니 오히려 통제하기 어렵다고 느껴 제거할 기회만 엿보았다. 유기도 주원장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아들을 도성에 남겨 벼슬을 시키며 인질로 삼았다. 주원장은 매년 말 은퇴한 유기의 아들 련(璉), 송렴의 아들 윤재(允載) 등을 불러 따뜻하게 대하며 가족처럼 대했지만, 은퇴한 유기는 극도로 자세를 낮추어 “오직 술을 마시고 바둑을 두며 공적을 말하지 않았다.”
《명사》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청전 현감이 유기의 명성을 흠모해 얼굴이라도 보려 했으나 유기가 만나주지 않자 야인으로 변장해 찾아갔다. 유기는 마침 발을 씻고 있다가 조카를 시켜 그를 초가집으로 들이고 기장밥을 대접했다. 그가 “제가 지현(知縣 현령)입니다”라고 밝히자 유기는 깜짝 놀라 일어나 자신을 백성이라 칭하며 사과하고 물러난 뒤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이처럼 몸을 낮추었음에도 결국 주원장의 계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이선장이 주원장의 시기를 사서 이미 은퇴했고, 이선장의 고향 사람인 호유용(胡惟庸)이 그의 추천으로 승상이 되었다. 사실 홍무 2년에 주원장이 승상 인선에 대해 물었을 때 유기는 호유용을 좋지 않게 평하며 “수레를 몰게 하면 가로막대가 부러질까 두렵다”라고 했었다. 호유용은 이 때문에 유기에게 앙심을 품었고, 결국 주원장의 암묵적인 도움 아래 복수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온주와 복건 사이에 ‘담양(淡洋)’이라는 좁고 긴 지역이 있었는데, 이곳은 소금 장수와 도적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방국진이 처음 난을 일으킨 곳이기도 했다. 유기는 아들 유련을 통해 그곳에 순검사를 설치해 관할함으로써 요민들이 공모하거나 수비병을 협박해 도망치지 못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호유용은 형부상서 오운(吳雲)을 시켜 유기를 탄핵하며 “담양은 산과 바다를 끼고 있어 왕의 기운이 있는 곳인데, 유기가 자기 묘자리로 삼으려다 백성들이 응하지 않자 순검사를 설치해 괴롭히려 하여 정세가 악화되었다”라고 모함했다.
주원장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이 글을 유기에게 전하기만 했다. 유기는 직접 남경으로 올라와 주원장을 알현했으나, 주원장은 이 일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유기는 변명할 수도 없고 남경을 떠날 수도 없게 되었다. 얼마 후 병이 났는데 이때 호유용이 보약을 가지고 병문안을 왔다. 유기가 그 약을 먹자마자 주먹만 한 돌덩이가 가슴을 막고 있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유기가 기회를 보아 주원장에게 이를 아뢰었으나 주원장은 여전히 모른 체했다. 석 달 뒤 병세가 악화되자 주원장은 사람을 보내 문안하게 했고 그가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함을 알자 공문(公文)을 전하는 배에 태워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얼마 후, 이 절세의 기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물론 유기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짜 죽음으로 몸을 뺏다는 등 여러 설이 있다. 역사의 진상이 무엇인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다.
원문위치: http://big5.zhengjian.org/node/424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