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순연(李纯然) 정리
【정견망 2003년 2월 11일】
중국은 자고로 조대(朝代)가 끊임없이 변경되어 왔다. 매번 어느 왕조의 말기가 되면 어리석은 군주나 간신(奸臣)이 나타나 정치를 맡았다. 그러나 이때가 되면 밝은 군주(明君)가 세상에 내려와 천의에 순응해 다시 세상을 바로잡았다. 또 문신(文臣)과 무장(武將)이 있어 천의를 분명히 알고 밝은 군주를 보좌해 천추의 대업을 이루곤 했다.
강자아(姜子牙)는 본래 상(商)나라의 폭군 주왕(紂王) 밑에 있던 관리였다. 그러나 그는 주왕의 말로를 예견하고 상(商)나라를 버리고 주(周)나라에 투신해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재상이 되었다.
강태공(姜太公 강자아)은 주 왕조의 제후국인 제(齊)나라의 시조 여상(呂尙)을 말한다. 그는 원래 성이 여(呂)씨로 이름은 상(尙)이며 자아(子牙)는 자(字)이다. 전설에 의하면 주문왕(周文王)이 여상을 만나 “우리 태공(太公 주: 문왕의 할아버지이자 주나라의 기틀을 다진 고공단보를 말함)께서 선생을 기다리신지(望) 오래되었습니다!”라고 하여 태공이 기다리던 사람이란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으로 불렸다고 한다. 문왕 사후 무왕(武王)이 즉위한 후에는 또 상보(尙父 여상이 아버지와 같다는 의미)라고 하여 존칭했다. 그는 무왕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켰고 여러 차례 혁혁한 공을 세웠다. 나중에 제나라를 분봉 받았는데 흔히 강태공(姜太公)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강씨는 그의 조상의 성씨이다.
여상의 선조는 원래 사방을 관장하던 제후인 사악(四嶽)으로 우(禹) 임금을 도와 치수에 큰 공을 세워 여(呂) 또는 신(申) 땅에 봉해졌으며 성이 강씨(姜氏)였다. 후에 그 자손들이 신과 여 땅에 봉해지거나 평민이 되었다. 상은 그 후예로 봉지(封地)를 성으로 하여 여상(呂尙)이라고 불렀다.
여상의 집은 원래 곤궁하기 그지없었는데 마침 상왕조가 멸망해가는 혼란한 세상을 만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해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주왕 아래에서 하대부(下大夫)의 직책을 맡을 수 있었지만 주왕은 황음무도(荒淫無道)하고 주색을 밝혔을 뿐 아니라 포악했다. 그는 대신들을 포 뜨고 제후들을 제멋대로 부렸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잔인하게 해쳐 당시 사회는 아주 암담했고 정치는 극도로 부패했다. 상 왕조는 이미 바람 앞의 등불신세로 전락해 멸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어려서부터 웅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던 여상은 자연 시세를 파악할 수 있었고 이 점을 분명히 보았다. 어느 날 주왕은 여상에게 “녹대(鹿臺)” 건축을 감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면서 요구하길 녹대의 높이는 49척으로 하되 옥으로 이층 전각을 세우고 마노(玛瑙)로 난간을 만들며 기둥은 보석으로 장식하도록 했다. 여상이 이 말을 듣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조가(朝歌 상나라의 수도) 역시 내가 오래 머물 곳이 못되는구나. 녹대를 짓자면 백성들의 고생이 아주 심하고 거대한 재물이 들어갈 것이다. 내가 말로 간해 좋게 권할지라도 이 어리석은 군주는 내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포락(炮烙)형을 가할 것이다. 차라니 이곳을 탈출하느니만 못하다.” 이리하여 겉으로는 이 말에 응하는 것처럼 하고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아내 마(馬)씨가 그를 맞으면서 “대부께서 오늘은 집에 돌아오셨네요!”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여상은 냉정하게 “나는 이제 더 이상 관직에 머물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마 씨가 크게 놀라 “무슨 일 있으세요?” 여상은 “주왕이 달기(妲己)의 말만 듣고 녹대를 축조하려 하면서 나더러 공사를 감독하라고 하오. 나는 차마 만(萬) 백성들이 재앙을 당하고 곤경에 처하는 것을 볼 수 없소. 주왕은 내가 원하던 밝은 임금이 아닌 것 같소. 당신도 나와 함께 서쪽 기(岐) 땅에 가서 때를 기다립시다.”
여기서 여상이 말하는 기 땅이 바로 서백(西伯)인 희창(姬昌, 주문왕)이 통치하고 있던 제후국인 주나라이다. 희창은 정치를 맡으면서 인의(仁義)를 독실히 행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어린이들을 자애롭게 대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인재를 초빙했다. 또 경제발전에 힘쓰고 근검절약하며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는 정치를 펴 국력이 점차 강성해졌고 사회질서도 바로잡혔다. 사방의 제후들이 그 명성을 듣고 의탁했으며 원근 백성들도 모두 주나라에 귀의하고 싶어 했다. 한마디로 희창 통치 하의 주나라는 이미 날로 발전해 상왕조를 뒤집을 만큼 강성한 제후국으로 변해있었다.
『사기 제태공세가(齐太公世家)』의 기록에 따르면 “태공은 박학다식했으며 일찍이 주왕을 섬겼으나 주왕이 무도하자 떠나버렸다.”라고 한다. 여상은 주왕을 떠난 후 주나라 문왕을 보좌해 문왕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문왕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여상의 지모와 책략에 힘입어 상나라 주왕을 토벌하고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사기 주본기(周本紀)』에서는 폭군 주왕의 종말을 이렇게 묘사했다. “주왕은 성으로 도망쳐 다시 녹대에 올라 보석이 박힌 옷을 뒤집어 쓰고 불 속에 뛰어들어 타죽었다.” 포악무도했던 상나라의 주왕은 녹대에 올라가 스스로 불에 타죽었으니 상왕조는 이것으로 종말을 고했다.
현재 중국은 시비와 선악을 가리지 못하는 혼란하고 어지러운 세상이라 하늘이 노하고 사람들이 원망한다. 말조의 운명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결백하게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천의를 따라 행할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맞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
발표시간 :2003년 2월 11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zj/articles/2003/2/11/2042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