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 우해심
송나라 태조가 황제로 즉위하던 해에 삼불제(三佛齊 역주: 동남아에 위치한 고대국가 이름)에서 찾아와 조공을 바쳤다. 삼불제는 아직 조광조가 즉위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공물 중에 물소가 있었는데 뿔에 용의 형상이 있었다. 또 용의 형상이 위로 들렸으나 꼬리는 약간 좌측으로 틀어져 있어서 마치 ‘송(宋)’자 같았다. 용과 송은 진룡천자가 송나라를 건립했다는 뜻이다. 태조는 매우 기뻐하며 대신들에게 보라고 말했다. “이 물소 뿔에 “宋” 자가 쓰여 있으니 하늘의 뜻이 아닌가?” 태조는 이 물소뿔로 허리띠를 만들고 제사지낼 때마다 그것을 착용했다.
송태조가 강남을 평정하자 남당의 서현(徐鉉)이 사신으로 와서 태조전 아래 이르렀다. 그는 자기 임금(남당의 이욱)이 문장을 잘 쓴다고 과장하며 그가 지은 시를 암송했다.
태조가 듣고는 “이 시는 촌에서 가르치는 글에 불과하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소싯 적 지은 《해를 읊는 시》가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오. ‘잠깐 사이에 황금쟁반이 받쳐 나오니 남은 별과 달을 흩어버리네’. 서현이 이 시를 듣고는 태조의 뜻에 감복했다. 이 시는 기운이 광대했는데 다만 나중에 사람들이 금나라가 변량(汴梁 송나라 수도)을 부수는 참언으로 여겼다.
송 태종이 화산에 진희이(陳希夷)라는 사람이 수리(數理)에 정통해 미래를 잘 예측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를 불러 며칠간 머물게 하며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를 담론했다. 며칠 지나 태종은 가장 묻고 싶은 문제를 물었다. “나라를 세운이래 장차 국운이 어떻게 되겠소?”
진희이가 아뢰었다. “송나라는 인(仁)으로 천하를 얻고 의(義)로 인심을 얻었으니 국운이 길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만 나라 도읍이 처음에 변(汴) 둘째 항(杭) 셋째 민(閩) 넷째 광(廣)입니다.” 태종이 무슨 뜻이냐고 재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나중에 송 고종이 항주에 수도를 옮기고 보니 운수가 이와 같으니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진희이가 태종을 처음 만난 것은 사실 태종이 아직 요람에 있을 때였다. 당초 천하가 어지럽자 태조의 모친은 태조와 태종(역주: 태종은 태조의 친동생이다)을 광주리에 담아 피난을 갔다. 진단이 이들을 보고는 말했다. “지금 세상에 천자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천자를 메고 간다.”
선화 원년(기원 1119년-송나라 휘종의 마지막 연호)에 몇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해 정월 초하루와 십오일 황제가 경령궁(景靈宮)에서 조회를 하는데 사당의 신상(神像)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관리는 사당에서 늘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어느 날 신종 황제가 있는 편전의 벽돌에서 피가 흘렀다. 닦으면 또 흘렀으며 며칠이 지나 겨우 멈추었다. 이때 재경 등의 간신들이 총애를 얻어 이런 이상한 일이 있은 것이나 모두 감히 주상에게 알리지 못했다. 휘종은 사치만 하고 갈수록 제멋대로였다.
선화 원년 가을 도덕원에서 금(金)색의 영지가 나왔다고 누가 상주했다. 휘종이 가서 관상을 하러 가는 길에 채경의 집으로 가서 명란당에서 술을 마셨다. 채경이 시를 한 수 지었고 휘종은 즉석에서 답했다. “도덕이 방금 흥하니 만방에 금(金)이 주인이 됨이 정해져 있구나. 춘풍이 오기 전에 일어난다” 나중에 여진족이 바다 쪽에서 일어나 송나라의 천연 방패인 요나라를 멸망시킨 후 중원으로 들어와 금金을 세웠다.
선화 7년 수도를 핍박하여 겨울(12월 25일)에 성을 부수니 봄이 되기도 전에 일이 발생한 것이다. 휘종의 시와 태조의 시는 마치 같은 시의 두 판본처럼 뜻밖에도 참언이 되었다. 선화 원년은 서기 1119년인데 (휘종과 그 가족이 다 잡혀가는) 정강의 변이 있기 7년 전이었다.
초주(楚州)에 물고기를 파는 손씨가 있는데 사람의 재난을 예지할 수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손매어(孫賣魚)라고 불렀다. 북송 선화 원년 태상황 휘종이 그의 이름을 듣고 그를 수도로 불러 보록궁도원에 머물게 했다. 송나라는 유교 도교를 신봉했으며 황실은 명절이 되면 도관에 가서 참배를 올렸다. 어느 날 손매어가 찐 떡을 품에 넣고 작은 전 위에 앉아 있었다. 이는 황상이 배고플 것을 예견했을까? 해가 높이 솟아 황제가 절을 하고 꿇어앉은 지 오래되자 배고픔을 느꼈다. 손매어는 그 모습을 보고 얼른 품속의 떡을 내놓으며 말했다. “이것으로 점심을 하시지요.” 태상황은 놀라서 받지 않았다. 손매어가 말했다. “앞으로는 이것도 먹기 어려우실 겁니다.” 당시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다음에 정강의 변이 있어서 사막으로 잡혀갔으니 과연 먹을 것을 얻기가 어려웠다.
휘종은 숭녕(崇寧) 연간에 꿈속에서 청의(靑衣) 동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동자는 옥패를 하나 보여 주는데 그 위에는 “병오년 창성한 시기에 진인(真人)이 나온다”고 쓰여 있었다. 황제가 깬 후 종이에 몰래 써놓고는 그 뜻은 병오년에 국운이 창성할 시기여서 진인이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을미년 겨울에 양위하고 흠종이 즉위했으니 이것이 병오의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음 해 여진이 건국한 금나라에 의해 포로가 되어 북쪽으로 끌려가면서 비로소 알았다. “병오년은 적들이 창궐할 시기이며 여진인(女真人) 나온다”
휘종 선화 말년 보록궁 요선전 좌측 문에 이런 시가 있었다.
“家內木蛀盡,南方火不明
吉人歸塞漠,亙木又摧傾
집안의 나무는 벌레가 다하고 남방에 불이 밝지 않으니
길인은 사막에 돌아오고 오랜 나무가 부서져 기울어진다.”
나중에 금나라가 남침한 후에야 비로소 가내목(家內木 집안의 나무)이 송(宋)이고 길인(吉人), 긍목(亙木)은 황제의 이름임을 알았다. 휘종의 본명이 조길(趙佶)이고 흠종의 이름이 조환(趙桓)이다.
출처《대송선화유사(大宋宣和遺事)》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2016/10/18/1551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