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천고영웅인물】 진시황(3): 백세(百世)의 기초를 다진 명군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제3장 백세의 기초를 다진 명군

1. 천하평정과 영토개척

진시황은 웅대한 포부와 큰 뜻을 지닌 명군(明君)으 평생 정사에 부지런했다. 《한서(漢書)》에는 진시황이 “낮에는 옥사를 판결하고 밤에는 업무를 처리했다(晝判獄而夜理書)”는 기록이 있다. 즉 그가 밤에도 낮처럼 부지런히 일했다는 뜻이다.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이 매일 처리한 각종 문서의 무게가 약 130여 근에 달했다고 한다.

통일 대업을 완수한 후 진시황은 또 비범한 재주와 웅대한 전략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일련의 독창적인 법령과 조치들을 신속히 제정하고 반포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통일 황조(皇朝)를 세우고 완벽하게 했다. 그가 다져놓은 황조체제(皇朝體制 황제를 중심으로 한 통치체제)는 이후 2천 년 중국역사에 견실한 기초를 다져주었고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진나라 이전 하(夏)·상(商)·주(周) 세 왕조는 모두 큰 나라였다. 중간 정도 나라를 가리켜 방국(方國) 혹은 제후(諸侯)라 했고, 작은 나라는 종족명을 따라 이름을 붙였는데 별처럼 촘촘히 분포해있었다. 이들의 생존상태는 줄곧 융합과 병탄과정에 처해 있었다.

하(夏)나라의 영토는 오늘날 황하 중류의 남북 양측이었다. 하나라를 멸망시킨 상나라는 영토를 황하 중하류 양측 일대로 확장했으나 당시에는 국경이 명확히 설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후 서주(西周)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천하에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溥(普)天之下,莫非王土)’(《시경·소아(小雅)·북산(北山)》)고 했다.

춘추시대 전기(前期) 주나라 왕실의 대부였던 첨환백(詹桓伯)은 “우리 주나라는 하나라부터 후직(後稷)까지 위(魏)·태(駘)·예(芮)·기(岐)·필(畢) 지방을 서쪽 영토로 삼았으며 무왕께서 상나라를 이긴 후에는 포고(蒲姑)·상(商)·엄(奄) 지방을 동쪽 영토로 삼았고, 파(巴)·복(濮)·초(楚)·등(鄧) 지방을 남쪽 영토로 삼았으며, 숙신(肅慎)·연(燕)·박(毫) 지방을 북쪽 영토로 삼았다.”(《좌전·소공(昭公) 9년》)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나라 왕실은 이들 범위 내조차 통일하지 못했고 단지 방기(邦畿) 이내의 지역만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모두 크고 작은 봉국(封國)들이 독립 또는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춘추시기에 주나라 왕실이 쇠약해짐에 따라 대국들이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고 전국시기에 이르러서는 칠웅(七雄 7대 강국)이 서로 전쟁을 벌여 통일은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직 진시황 때에 이르러서야 원래 영토와 형세에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생겨났다.

진시황은 6국을 멸망시킨 후에도 여전히 전진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초나라를 멸망시킨 총사령관 왕전(王剪)에게 계속해서 동남쪽으로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동월(東越)이 투항한 후에는 그 영토를 회계군(會稽郡 지금의 소주)으로 편입시켰다. 민월(閩越)이 투항한 후에는 그 영토에 민중군(閩中郡 지금의 복건성 복주)을 설치했다. 이후 장군 도휴(屠睢) 등을 영남(嶺南) 지역에 진군시켜 남월(南越) 북쪽 지역에 남해(南海 지금의 광주), 계림(桂林, 지금 광서 계평), 상(象, 지금의 숭좌崇左) 3군을 설치했다. 또한 상알(常頞)을 서남이(西南夷)로 진군시켜 오척도(五尺道)를 열었다. 오척도는 오늘날 사천 의빈(宜賓) 남쪽에서 운남 곡정(曲靖)까지 이어지는 길로 폭이 오척에 불과해 오척도라 한다.

기원전 770년~221년까지 총 549년간 지속된 춘추전국시대 동안 제후들 간에 혼전이 끊이지 않자 전쟁을 피하느라 갈 곳이 없어진 백성들은 이곳저곳을 떠돌아 논밭이 대량으로 황폐해지고 농업에 극심한 타격을 주었다. 또 중원 각국이 서로 전쟁을 벌이느라 북방을 돌아볼 여력이 없는 틈을 타서 흉노가 남쪽으로 침략해 진(秦)나라, 조나라, 연나라 3국의 북쪽 변경 지대를 공략했다. 이들은 또 주변 지역까지 남하해 백성들을 괴롭혔고 화하 자손들의 생산 및 생활에 커다란 재난을 가져다주었다.

진시황 32년(기원전 215년), 명장 몽염(蒙恬)에게 명령해 30만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흉노를 몰아내 하남(河南, 지금의 내몽골 이커자오멍)을 수복하고 34개의 현을 설치했다. 또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음산(陰山)을 차지하고 예전의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의 장성을 하나로 이었다. 서쪽으로는 임조(臨洮 지금의 감숙성 민현)에서 동쪽으로는 압록강까지 1만 리를 연결해 북으로 흉노를 방어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다.

흉노의 위협을 제거한 후 진시황은 또 곧장 공격 방향을 바꿔 월족(越族) 지역을 항복시키고 대대적으로 개발할 결심을 내렸다. 그는 약 50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월족 지역과 월인(越人)들과 뒤섞인 지역으로 이주시켜 주변지역과 그 주민들에게 중화문화를 전파시켰다.

진시황 재위 시기 진나라의 영토는 전국시대의 지도를 기준으로 볼 때 전국 칠웅이 통제하던 범위의 약 2배에 달한다. 진시황은 ‘군현을 설치해’ 정복한 토지에 대한 관리와 제도 수립에 힘썼고 이를 통해 통일 이후 해당 지역에 대한 통치를 안정시켰다. 후세인들이 ‘공은 진시황과 한무제보다 클 수 없다(功莫大過秦皇漢武)’고 하는데 이는 공적(功績)의 측면에서 볼 때 중국역사상 진시황의 공이 한무제와 함께 가장 크다는 뜻이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원 남북의 영토를 크게 통일했다. 진나라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조선에 미쳤으며, 서쪽으로는 임조(臨洮)와 강중(羌中)에 다다랐고,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向戶, 지금의 베트남 중부), 북쪽으로는 황하를 요새로 삼아 음산(陰山)에서 요동까지 이르렀다.”(《사기 진시황본기》) 이는 서주(西周) 시기 영토에 비해 적어도 5배 이상 확대된 것으로, 현대 중국 영토 판도의 기초를 다져주었다. 아울러 중화문화가 보다 많은 종족 및 지역까지 확대되게 했다.

2. 황제를 중심으로 3공과 9경을 두다

진시황은 ‘왕(王)’이라는 호칭을 없애고 ‘황제(皇帝)’라 칭했는데 황제를 국가원수로 설치한 것은 역사를 개창한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전에는 삼황(三皇)과 오제(五帝)만 있었을 뿐 황제라는 칭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단순히 옛 제도상 본족(本族)의 ‘대종(大宗 종족의 시조를 계승한 적장자)’이 아니라 지고무상(至高無上)한 국군(國君)이었다. 이에 상응해 황후 역시 옛 제도상 국왕의 여러 비빈 중 정실(正室)에서 육궁(六宮)을 관장하는 천하의 어머니로 탈바꿈했다. 황태자 또한 더 이상 옛 제도상 본족 중 ‘종손[宗子]’이 아니라 법률상 황위 계승자인 저군(儲君)이 되었다.

황제는 군(君)・왕(王)의 위에 위치한 존재로, 군・왕에 대한 임명권을 가졌다. 황권은 신에게 받은 것으로 인간세상에서 지고무상하다. 진시황은 위로는 2천여 년에 걸친 선진(先秦)시기를 종결시켰고 아래로는 후세 2천여 년의 선구를 열어 이번 차례 인류의 중화 역사상 최초의 황제가 되었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진시황이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후 승상과 어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예전에 한나라 왕은 영토를 헌납하고 옥새를 바치면서 번신(藩臣)이 되기를 간청했던 바 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약속을 어기고 조나라, 위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를 배반하였기에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토벌하고 한나라 왕을 사로잡았다. 과인은 이렇게 하기를 잘했다고 여기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대했다. 이후 조나라 왕이 상국 이목(李牧)을 사신으로 보내 맹약했기에 그의 볼모로 잡은 아들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얼마 후 맹약을 어기고 태원(太原)에서 나에게 모반했기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조나라 공자 가(嘉)가 스스로 대(代)나라 왕에 즉위했으므로 다시 군사를 일으켜 공격해서 멸망시켰다.

위나라 왕이 처음에는 진나라에 복종하기로 약속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나라, 조나라와 함께 진나라를 습격할 것을 도모했다. 이에 진나라 군사들이 그들을 주살하고 마침내 쳐부쉈다. 초나라 왕이 청양(青陽) 서쪽 땅을 바쳤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을 어기고 우리의 남군(南郡)을 공격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고 마침내 초나라 땅을 평정했다. 연나라 왕이 어리석고 문란해 태자 단(丹)이 몰래 형가(荊軻)를 시켜 나를 죽이려 했기에 군사를 보내 물리치고 연나라를 멸했다. 제나라 왕이 후승(後勝)의 계책을 사용해 진나라와 왕래를 끊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기에 군사를 보내 토벌하고 그 왕을 사로잡아 제나라 땅을 평정했다.

과인이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군사를 일으켜 폭란을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은 조상님의 혼령이 돌보아주셨기 때문이다. 이에 6국의 왕들이 모두 자신들의 죄를 승복하니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이제 호칭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간 이룩한 공적에 걸맞지 않아 후세에 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대들이 제왕의 호칭에 대해 논의해보라.”

그러자 승상 왕관, 어사대부 풍겁, 정위(廷尉) 이사 등이 모두 아뢰었다.

“옛날 오제는 영토가 사방 천 리에 지나지 않았고, 그 바깥의 후복(侯服) 이복(夷服) 등의 제후들은 어떤 자는 조회에 들고 어떤 자는 들지 않았으나 천자가 그들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잔적(殘敵)들을 주살하고 천하를 평정해 전국에 군현을 설치하고 법령을 하나로 통일시켰으니 이는 상고(上古) 이래 없었던 일로 오제라 할지라도 미치지 못합니다. 신들이 삼가 박사(博士)들과 함께 의론하니 ‘고대에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이 있었는데 그 중 태황이 가장 존귀했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존호를 올리나니 왕을 ‘태황’이 하시고 명(命)을 ‘제(制)’라 하시고 영(令)을 ‘조(詔)’라 하시며 천자가 자신을 칭할 때는 ‘짐(朕)’이라 하십시오.”

그러자 왕이 “‘태(泰)’를 없애고 ‘황(皇)’을 취하고 상고 시대 ‘제(帝)’라는 호칭을 받아들여 ‘황제(皇帝)’라 칭할 것이다. 다른 것은 논의한 대로 하라.”라고 말했다.그리고는 “허락하노라”라고 명을 내렸다.

또 부친인 장양왕(莊襄王)을 태상황(太上皇)으로 추존하고, 다음과 같이 제(制 황제의 칙령)를 내렸다.

“짐이 듣건대 태고(太古)에는 호(號)는 있었으나 시호는 없었으며, 중고(中古)에는 호는 있었으나 죽으면 행적에 근거에 시호를 정했다고 한다. 이와 같다면 자식이 아비를 논의하고, 신하가 군주를 논의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니 짐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지금부터는 시호를 정하는 법을 없애노라. 짐이 시황제(始皇帝)가 된다.”

진시황은 이번 화하 문명 최초의 황제로 명실상부 ‘시황제’라 할 수 있다. 진시황은 승상(丞相), 삼공(三公), 구경(九卿)을 두어 조정 각 부문의 업무를 책임지게 했다. 승상 등은 각자 황제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모든 것은 황제의 명령에 따랐다. 승상·어사·정위는 각각 국가의 행정·감찰·사법을 책임졌으며 분업이 명확해서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이는 오늘날 서양의 삼권분립체제와 무척 흡사한 것이다.

진시황은 또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폐지해, 중앙에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관원의 직위를 세습하지 않고 모두 황제가 임명하게 했다. 비록 한 왕조의 천자에 한 왕조의 신하, 한 왕조의 중생, 한 왕조의 문화라서 각 조대(朝代)의 중생들은 모두 각기 다른 천국(天國)에서 왔지만, 진시황이 건립한 황권체제는 역대로 다양한 조대를 거치면서 청나라가 끝날 때까지 2천여 년에 걸쳐 줄곧 유지되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중국에만 황제가 존재했으며 군·왕 역시 모두 황제에 의해 분봉된 것이다.

3. 지방행정 군현제도

진시황은 분봉 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관리하에 군(郡), 현(縣), 향(鄕), 정(亭), 리(里) 등 다층의 기층 행정구조를 만들었다. 이런 관리 구조는 이후 2천여 년 간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군현제에 의한 지방행정: 진시황은 처음에 천하를 36군으로 나눴고 나중에 40군으로 늘렸다. 군은 중앙 정부 직속으로 군수(守), 군위(尉), 군감(監)의 3장(長)을 두어 각각 행정, 군사, 감찰을 맡아보도록 했다. 군 아래에 현을 설치했고 현에는 현령(令, 또는 현장), 현승(丞), 현위(尉)의 3장을 두어 각기 행정, 문서와 사법[文獄], 군사를 관할하게 했다. 군과 현의 주요 장관은 황제가 직접 임면(任免)했다.

군현제는 중국 역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기원전 221년(진시황 26년) 최초로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에게 승상 왕관 등이 이렇게 아뢰었다.

“제후들을 막 무너졌지만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는 땅이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자제분들을 왕으로 세우길 청하나니 황상께서 허락하여 주십시오.”

진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토의하게 하자 모두들 좋은 의견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정위 이사(李斯)가 이의를 제기했다.

“주나라 문왕과 무왕은 자제와 성이 같은 이들을 제후로 많이 봉했지만 후손들이 사이가 멀어져서 서로 치고받는 것이 원수 같았고 심지어 제후들끼리 서로 주벌했음에도 주나라 천자는 막거나 그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천하가 폐하의 신령(神靈)에 의해 통일되어 모두 군현으로 삼았으니 자제나 공신들에게 국가의 부세로써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쉽게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천하에 다른 마음을 품는 이가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기술이오니 제후를 두는 것은 이롭지 않습니다.”

진시황이 말했다.

“천하에 전쟁이 멈추지 않아 모두 고통 받고 있는데 이는 제후왕(侯王)이 있기 때문이다. 종묘에 힘입어 이제 막 천하를 평정했는데 또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면 이는 전쟁의 조짐을 심는 것이니 안녕과 휴식을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견이 옳다.”

시황제는 이사가 상소한 내용을 인정하고 분봉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를 시행했다.

진시황은 대진(大秦)황조를 건립함으로써 이후 약 1700년 간 관리제도에서 중국은 서방 각국보다 선진적이었다. 소위 ‘한나라는 진나라 제도를 이어받았다(漢承秦制)’(《후한서‧반표전》)는 표현처럼 2천년 황권시대의 중국은 제도상 기본적으로 진나라의 제도를 답습했다.

진시황이 수립한 이 황조체제(皇朝體制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통치체제)는 고대 중국제도의 문명모범이자 중화 민족의 수호신이었다. 2천여 년 간 영토를 수호하고 신전(神傳)문화가 한층 더 풍부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황체제에서 이익을 얻은 것이다.

4. 치도 건설과 장성확장

전국을 통일한 다음 해에 진시황은 명령을 내려 원래 진나라의 영토와 과거 6국의 영토의 옛날 도로를 서로 연결하고 확대시켜 천자가 천하를 순행할 치도(馳道)를 만들게 했다. 치도의 중간 부분은 ‘어도(禦道)’, 좌우 양측 부분은 ‘방도(旁道)’라 불렀다. 치도는 폭이 넓고 평판한데다 좌우 폭이 일정했기 때문에 마차로 달리면 속도가 무척 빨랐다. 한나라 때 사람이 쓴 기록을 보면 치도 위에서는 반나절 만에 이백 리 이상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진시황은 함양(咸陽)을 중심으로 바퀴살 형태로 퍼져나가는 치도를 건설하도록 명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치도는 북쪽으로는 구원군(九原郡, 지금의 내몽골 바오터우), 동쪽으로는 성산두(成山頭, 지금의 산동 영성), 남쪽으로는 남해군(南海郡 지금의 광주), 남서쪽으로는 전(滇, 지금의 운남 전비滇池 부근), 서쪽으로는 농서부(隴西郡, 지금의 감숙성 민현)에 이르렀다. 치도의 좌우 폭은 10~15장인데 중간에 산을 만나면 산을 뚫었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았으며 노면은 석회와 아교를 섞어 단단하게 다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치도는 2천여 년 간 비바람을 견뎌냈고, 일부 구간은 오늘날까지도 당시의 노면 형태가 그대로 남아 있다. 당시 건축수준의 질이 얼마나 높았는지 보여준다.

진시황은 북방 유목민족의 잦은 침범을 뿌리 뽑기 위해 장성을 수축(修築)해 외침을 방어하게 하는 한편 몽염으로 하여금 병사를 이끌고 토벌하게 했다. 원래 이전에도 각 국가들 사이에 장성이 존재하긴 했지만 북방의 장성은 완전하지 못했다. 통일 후 진시황이 명령을 내려 원래 각국 사이에 존재하던 장성은 철거하고 진나라, 조나라, 연나라 3국 북방에 있던 장성을 연결해 북방 흉노의 남침을 방비하게 했다. 이를 통해 저 유명한 만리장성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후세의 일부 사람들은 진시황이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고 모함하기 위해 춘추시대 제나라 장군 기량(杞梁)을 범기량(範杞梁)으로 와전시켜 맹강녀(孟康女)가 남편인 범기량을 찾으로 장성에 왔다가 울다 쓰러졌다는 전설을 만들어냈다. 또 어떤 이들은 맹강녀의 사당을 짓고 동상을 만드는데 쓸데없는 힘을 낭비하기도 했다. 사실 맹강녀가 울다 쓰러졌다는 장성은 진시황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제나라 장성이었다.

수백 년 전 명나라 작가 풍몽룡(馮夢龍)은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에서 이 사건에 대한 진상을 명확히 밝혔다. 제나라 장공(莊公)수하의 대장이었던 기량이 저우문(且於門)에서 전사하자 “그 처 맹강씨가 남편의 관을 모시고 3일간 노숙했다. 그녀는 관을 어루만지며 슬피 통곡했는데 눈물 콧물을 모두 흘려낸 나머지 피가 나왔다. 이때 제나라 성곽이 갑자기 수 척 가량 무너졌는데… 이는 통곡하는 소리가 너무나 애절한 나머지 그 정성에 감복한 것이리라. 후세 사람들은 진나라 범기량이 장성 공사에 차출되었다가 죽고 난 후 그 처인 맹강녀가 겨울옷을 공사 터로 가지고 왔다가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통곡하자 성곽이 무너졌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는 제나라 장군 기량의 이야기로, 와전되었을 따름이다”라고 기록했다.

만리장성 수축은 진시황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서도 위대한 업적의 하나다. 후세의 위인인 손중산(孫文) 선생님은 만리장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러므로 진한(秦韓) 이후의 사적 가운데는 그 무엇도 우임금의 구하(九河)와 진시황의 장성에 비교할 만한 것이 없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육상 건축물은 만리장성이다”, “지금에 와서 볼 때 만약 장성의 보호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북쪽 이민족에게 송이나 명나라까지 갈 것도 없이 초한(楚漢시대에 이미 멸망당했을 것이다.”

현재 세계 7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인 만리장성은 인류문화와 기술의 기적이 후대로 전해진 것일뿐만 아니라, 만리장성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라는 큰 무대 위에서 신전 문화가 펼쳐지는 것을 교란하는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해 중화 정통 문화가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진시황은 또 당시에 영남의 백월(百越) 지역을 중국 판도에 편입시키기 위해 도휴(屠睢)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50만 대군을 이끌고 백월 지역을 정벌하게 했다. 그러나 진의 대군은 백월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데다 영남 지방의 험한 산길로 인해 군량 운송에 어려움을 겪어 어려워 3년간 전진하지 못했다.

장강(長江 양쯔강) 유역과 주강(珠江) 유역은 본래 오령(五嶺) 산맥을 사이에 두고 분리되어 있어 연결하는 수로가 없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강의 지류인 상강(湘江) 상류와 주강 지류의 상류가 둘 다 모두 지금의 광서 흥안(興安) 경계에서 흘러나오며 거리도 1.5㎞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두 강을 서로 잇기만 하면 중원의 식량을 오령산맥 건너편인 영남까지 배편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이런 지리적 조건을 눈여겨본 진시황은 이를 교묘히 이용했다. 진시황 29년(기원전 218년) 감어사(監禦史) 녹(祿)에게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 광서 흥안현 경내에 식량 운반을 위한 인공 운하를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분수령 위에 물길을 뚫어 상강을 리강(漓江)으로 유입시킴으로써 인류 하운역사(河運史)에 불후의 전기를 남겼다.

진시황 30년(기원전 214년) 운하가 완성되었으니 바로 영거(靈渠)다. 이 운하는 상강과 리강을 연결해 장강과 주강의 수계를 잇고 중국 남부의 수운망을 연결시켜 진나라 군대에 지속적으로 식량을 공급하고 지원병력을 확보하게 했고 진나라 군사들이 신속하게 영남을 통일할 수 있게 했다. 영거는 도강언(都江堰), 정국거(鄭國渠)와 함께 ‘진나라 3대 수리공정’으로 일컬어지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운하 중 하나이자 또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152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