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덕혜(德惠)
【정견망】
명나라 초기 안휘 휴녕현(休寧縣)에 조(趙)씨 성을 가진 부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조조봉(趙朝奉)’이라 불렀다. 송나라 때 관직 품계 중에 ‘조봉랑(朝奉郎)’, ‘조봉대부(朝奉大夫)’ 등이 있었다. 나중에는 점차 ‘조봉’이 선비에 대한 존칭으로 변했고 남송 이후에는 또 부호나 상점 주인 등 돈 있는 사람에 대한 존칭으로 쓰였으며 청나라 이후로는 사장이나 점원을 조봉이라고 했다. 기록에 따르면 조조봉은 해상(海商 무역상)이었다.
조조봉이 어느 날 동료와 해외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열병에 걸려 혼미해졌다. 동료는 그가 죽은 줄 알고 그를 해안 모래밭에 버려놓고 돛을 올리고 떠나버렸다. 조조봉은 해풍에 의해 깨어났는데 바다는 끝없이 넓고 아무도 없었다. 돌아갈 길을 찾기 위해 그는 풀을 헤치고 곡절을 겪은 끝에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갑자기 전방에 큰 절이 있는 것을 보고 절로 들어가서 스님에게 고향에 돌아갈 수 있도록 거둬달라고 했다.
스님은 자비로운 분이라 그더러 절에 몇 달을 머물 수 있도록 했다. 어느 날 그가 우연히 어느 스님에게 물었다. “여러 스님들이 아침 공양하는 것을 보았는데 점심시간이 되어 다 보이지 않으니 무슨 일인가요?” 스님이 대답했다. “시주에게 재를 지내러 갔습니다.”
조조봉은 이것이 어쩌면 돌아갈 기회라고 생각하여 시주 집에 따라가게 해줄 것을 부탁했다. 스님이 동의하자 갑자기 신통을 드러내어 그를 승복의 소매 속에 집어넣고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닭, 개와 사람들의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여러 스님들은 초도 법사를 열고 있는 어느 집의 마당에 모였는데 죽은 조모를 위해 법사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조모가 잘 들어보니 원래 자기 집 식구들이 자기가 죽은 줄 알고 법사를 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봉이 막 식구들에게 알리려고 했는데 그 스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를 비롯한 여러 나한들은 그대가 평소 선을 많이 쌓았기 때문에 이곳에 데려온 것이다.” 그리고 나한은 그를 소매 속에서 꺼내 용마루 위에 놓고는 사라져 버렸다.
조조봉의 가족들은 갑자기 지붕에 한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여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보니 바로 조조봉이었다.
그들은 이런 신적의 방법으로 가족이 모였으니 놀랍고 기뻐하며 불법(佛法)에 감사드렸다. 알고 보니 조조봉이 구도 받은 까닭은 그가 평소 선을 행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나한이 신통으로 그를 구했으며 절을 연화해 내었고 또 그 집에서 법사를 할 때 그를 돌려보낸 것이다. 조조봉은 집에 돌아온 후 이 일을 기념하고 부처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에 근거해 자신이 머물렀던 절의 형상과 배치 등을 따라서 큰 절을 지었고 이름을 ‘건초사(建初寺)’라 했다.
휴녕 건초사는 한때 매우 유명했으며 청나라 초기 4대 고승 중 한명인 홍인(弘仁)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비록 휴녕 건초사는 역사의 변동을 따라 완전히 사라졌지만 그 내력은 기록되어 내려오며 불법의 위대함, 선악에 보답이 있다는 진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 널리 전파된 파룬궁은 바로 기공의 형식으로 중생을 구도하는 진정한 불법(佛法)이다. 무릇 파룬궁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파룬따파하오에 찬동하며 파룬궁 수련자를 선하게 대하는 사람은 장래 큰 복을 받을 것이다. 마치 이 이야기 속의 조조봉처럼 위험이 있을 때 신불(神佛)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자료출처:《송봉설역(松峰說疫)》 《현과수록(現果隨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43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