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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라는 단어의 박대정심한 문화적 내포

글/ 장하(長河)

【정견망】

인류문명과 문화의 박대정심(博大精深)을 신의 각도에서 보자면 역시 서서히 형성되고 축적되는 하나의 과정이다. 왜냐하면 삼계(三界) 내 특히 인류의 문명은 아득히 긴 우주의 변화과정 중에서 지금껏 나타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류문명의 하나하나는 모두 생명이 참여해야 했으며 인간 세상에 내려와서 연역하고 풀어내야 했다. 여기에는 간단한 언어와 문자도 포함하는데 ‘물건(東西)’이란 단어의 내원과 변화를 예로 들어보자.

‘물건(東西)’이라는 단어를 말하자면 우리가 갑자기 들어도 대답이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송나라의 대학자 주희(朱熹) 역시 이 단어의 내력에 대해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당당한 일대(一代)의 대유학자가 매우 호기심이 일어났다. 왜 사람들은 사람들이 ‘물건(東西)’을 산다고 하지만 ‘남북(南北)’을 산다고 말하지는 않는가? 이 문제는 주희마저도 마음속으로 오랫동안 해결할 수 없었다.

한번은 그가 한천사(寒泉社)에서 강좌를 열어 사서(四書)를 강의하자 당 아래 새까맣게 사람들이 모였다. 그중에는 유생도 있고 농한기의 농민도 있었으며 심지어 소치는 아이들도 있었다. 주희는 시골의 속어를 이용해 심오한 사서의 요점을 탐구했으며 수강생들에게 생동감 있게 설명해주었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안의 젊은 하녀 하나가 광주리를 메고 옆을 지나갔다. 일개 묘령의 소녀가 마당을 뚫고 지나가자 자연히 남자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주희는 수업을 받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광주리를 멘 젊은 하녀 쪽으로 눈길이 향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 갑자기 주희는 강의를 멈추고 웃으며 하녀를 멈추라고 했다. 그래서 하녀가 사람들 옆에 멈추어 서서 주희의 분부를 기다렸다.

그 후 주희는 자기 학생과 당 아래에 모인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다.

“자네들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아는가?”

그러자 학생들이 앞을 다퉈 대답했다.

“당연히 물건(東西)을 사러 가는 거지요.”

하녀도 입을 열어 말했다.

“광주리를 들고 물건을 사러가지 않으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선생님께선 왜 이리 간단한 문제를 물으십니까?”

주희는 이어서 또 학생들에게 물었다.

“그럼 자네들은 무엇 때문에 ‘물건(東西)’을 산다고 하면서 ‘남북(南北)’을 산다고는 하지 않는지 아는가?”

그러자 하녀는 아무소리도 못했고 학생들도 서로 마주보며 토론하다가 최후에 사람들은 ‘물건(東西)’이란 단어의 내원과 사용례가 이전 왕조의 도읍인 장안(長安) 성곽의 배치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당나라 때는 민간의 상업행위에 대한 규범이 상당히 엄격했는데 특히 도성(都城)에서는 더욱 엄했다. 장안성(長安城)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행위는 오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에서만 진행할 수 있었고 이 두 곳을 벗어나면 모두 당시의 법률을 위반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동시와 서시가 장안성의 같은 상공업 시장이었다. 다만 동시와 서시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에도 구별이 있었다.

‘동서시(東西市)’는 당나라 장안에서 매우 번영했고 이후 동서(東西)라는 단어에 대해 일정한 영향이 있게 되었다. 나중에 송나라에 이르러 지역이 바뀌고 사람들이 장사하는 장소도 더 이상 동서 양 지역에만 국한하지 않게 되었고 남행(南行), 북행(北行)이 나타났다.

심지어 수당(隋唐) 이전 남북조 시기의 목란사(木蘭詞)에서는 이미 “동시(東市)에서 준마를 사고 서시(西市)에서 안장을 사며 남시(南市)에서는 고삐와 재갈을 북시(北市)에서는 채찍을 산다”는 말이 나온다.

일설에는 몇 백 년에서 천년이란 오랜 시간을 거쳐 사람들이 비록 동서시(東西市)라는 개념에 익숙해져 “물건을 산다(買物品)”는 것을 “동서를 산다(買東西)”라고 말했다. ‘동서’도 점점 물건(物)이라는 이 단어를 대체했다.

하지만 주희는 근원을 추적하는 사람이어서 비록 이런 설에 대해 인정하긴 했지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기에 좀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으며 여전히 마음속 수수께끼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때 아래에 쥐 죽은 듯 조용하며 아무도 답을 하는 사람이 없자 좀 실망스러웠다.

갑자기 10살 정도 된 아이가 정적을 깨고 일어서더니 공경하게 말했다.

“제가 압니다.”

주희가 말해보라고 하자 이 아이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말했다.

“옛날 오행학설에서 동쪽은 목, 서쪽은 금, 남쪽은 화, 북쪽은 수입니다. 이 하녀가 광주리를 들고 금과 목만 담을 수 있지 수와 화는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동서만 살 수 있고 남북은 살 수 없습니다.”

이 신동의 말을 듣고 주희는 크게 기뻐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리고 화가 난 듯 당아래 제자들에게 훈계를 했다. “이 분명한 도리를 심지어 열 살 아이마저 아는데 자네들의 사상은 빈 광주리처럼 금목의 사상은 전혀 없고 수화의 생각만 마음에 침범해있으니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어쩌다가 여기까지 이르렀을까?”

앉은 여러 사람들은 몰래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다 흩어졌다.

이때부터 ‘동서’라는 단어에 정론이 있게 되었다. 신전문화 삼황오제부터 하상주(夏商周)에서 당송(唐宋) 원명청(元明淸)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런 식으로 조대마다 단어가 하나씩 누적되어 온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545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