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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영웅인물】 당태종(5): 무뢰신위(武牢神威)

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무뢰신위(武牢神威)

두건덕(竇建德)은 수 양제 대업(大業) 말년 청하군(清河郡 지금의 하북성 형대시 청하현)의 고사달(高士達) 기의군(起義軍)에 처음 가담했다. 일찍이 수나라 탁군통수(涿郡通守) 곽현(郭絢)을 물리치고 탁군유수(涿郡留守) 설세웅(薛世雄)을 크게 이겼다. 또 강도(江都 지금의 강소성 양주)에서 수 양제를 시해하고 북상하던 우문화급(宇文化及)을 우두머리로 하는 수나라 잔존세력을 소멸시키고 당나라 무덕 원년(618년)에 정권을 건립했다. 국호를 하(夏)로 했는데 군사적인 역량이 상당히 강했다.

이세민의 낙양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왕세충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원래 앙숙이었던 두건덕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무덕 4년(621년) 두건덕은 맹해공(孟海公 역주: 수말 기의군의 하나로 산동 일대에서 왕을 칭했다)을 물리치고 안하무인이 되었다. 십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자칭 30만 대군이라 하면서 왕세충을 구원하러 나섰다. 가는 길에 관주(管州),형양(滎陽)을 잇달아 함락시키고 수군과 육군이 함께 나아갔다. 또 배로 식량을 운반해 왕세충을 지원했다.

성고(成皋 지금의 하남성 형양현 호뢰虎牢라고도 한다)의 동쪽 들판에 진을 치고 판저(板渚 역주: 성고 근처 황하를 건널 수 있는 나루)에 행궁(行宮)을 세우고는 사신을 보내 왕세충에게 소식을 전했다. 이때 당나라 군사들은 갑자기 배후에서 대군이 닥치자 거대한 위협을 느꼈다.

이세민은 일찍이 두건덕에서 서신을 보내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지 말라고 권했다. 즉 대의(大義)와 이해관계를 분명히 밝히면서 출병할 명분이 없으니 신중히 생각하라고 했다.

하지만 두건덕은 고집을 피워 마침내 십만이 넘는 대군으로 왕세충을 구원하러 나선 것이다. 그러자 당군 진영에서 소우, 굴돌통, 봉덕이 등이 모두 앞뒤로 적을 맞서기 어려우니 일단 곡주(谷州)로 군사를 물려 사태를 지켜보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이세민은 생각이 달랐다.

“왕세충은 식량이 이미 떨어지고 안팎으로 민심을 잃어 우리 군이 공격하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서 적을 물리칠 수 있다. 두건덕은 지금 막 맹해공을 이겨 장수는 교만하고 병사들은 나태하니 우리가 무뢰관(武牢關)을 들어가 차지하고 그들의 목을 잡아야 한다.

적이 만약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 군과 승부를 겨루려 한다면 우리가 저들을 빼앗는 것은 아주 쉽다. 만약 적이 싸우려하지 않고 버틴다면 열흘이면 왕세충이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만약 우리가 신속히 나아가지 않아 적들이 무뢰를 차지하고 주변 성들이 여기에 붙게 되면 반드시 지킬 수 없을 것이다. 두 도적이 힘을 합하면 장차 그들을 어떻게 하겠는가?”

굴돌통이 또 포위를 풀고 시험 삼아 변화를 지켜보자고 청했지만 이세민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굴돌통을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과 함께 남겨 왕세충을 포위하게 하고 자신은 현갑군 및 기병 3500명을 이끌고 무뢰(武牢 지금의 형양 니수진)로 갔다.

이세민은 무뢰에 도착한 다음날 날랜 기병 5백을 거느리고 두건덕 진영에 대한 정찰에 나섰다. 양 군의 진지는 서로 2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이세민은 가는 도중 길목마다 병사들을 나눠서 매복시키고 이세적, 진숙보, 정지절에게 지휘를 맡겼다. 자신은 울지경덕 등 4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직접 두건덕의 대장 진영을 찾아갔다.

이때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말했다.

“내가 활과 화살을 잡고 그대가 삭(槊 긴 창)을 잡으면 비록 천군만마라 할지라도 우리를 어찌하겠는가?”

두건덕의 군영에서 3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적의 순라병과 마추지자 이세민은 “내가 진왕(秦王)이다.”라고 소리쳤다. 또 활을 당겨 상대 장수 한명을 쏘아 죽였다. 두건덕 군영이 깜짝 놀라 곧 5~6천 명의 기병들이 추격해왔다. 이세민과 울지경덕은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움직이면서 추격병이 오면 활을 쏘면서 번번이 한사람씩 쓰러뜨렸다. 그러자 추격병들이 놀라서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잠시 후 또 추격에 나섰지만 또 여러 명이 죽었다. 이렇게 두세 번을 하자 어느덧 이세민이 미리 군사를 매복시킨 곳까지 오게 되었다. 이세적 등이 떨쳐 일어나 공격에 나서며 추격병들을 크게 물리치자 당황한 적들이 도망갔다.

두건덕은 형양에서 서쪽으로 진출한 이래 판저에 보루를 쌓았지만 이세민이 무뢰관을 차지하자 서로 대치하기를 20여 일이 지났다. 당나라 첩자가 “두건덕이 당나라 군의 말 사료가 떨어져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가 말을 풀어놓으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는 무뢰를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이세민이 이 음모를 알고 황하를 건너가 말을 풀어놓고 적을 유인했다. 이튿날 두건덕이 과연 모든 무리를 데리고 도착해 강을 끼고 진을 펼쳤다. 왕세충의 부장 곽사형(郭士衡)이 그 남쪽에 진을 쳤는데 20리를 이어 북을 치며 진군하자 당군의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했다. 이세민이 기병 몇을 거느리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 살펴본 후 제장들에게 말했다.

“적들이 산동(山東)에서 기병한 이래 아직 강력한 적수를 만나보지 못했다. 지금 험한 곳을 건너면서도 오히려 시끄럽게 하고 있으니 이는 기율과 군령이 없는 것이고 성 가까이에 진을 친 것은 우리를 얕잡아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병사들을 다독이며 움직이지 않으면 적들의 기세가 자연히 쇠퇴할 것이며 진을 친 시간이 오래되면 병사들이 굶주리게 되어 형세상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추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공들과 약속하건대 정오가 지나면 반드시 저들을 격파할 것이다.”

두건덕이 진을 펼친 후 진시(辰時 오전 7~9시)에서 오시(午時 11시~13시)에 이르자 병사들이 배가 고프고 나른해져서 모두 늘어서 앉아 있었다. 또 물을 갖고 서로 다투고 우물쭈물하면서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세민이 “공격할 수 있다!”고 말하고는 친히 경기병(輕騎兵)을 이끌고 먼저 나가면서 대군이 뒤를 따르게 했다. 두건덕이 군대를 돌이켜 진을 펼치려 했으나 미처 진을 정렬하기도 전에 이세민이 먼저 공격해오니 가는 곳마다 적들이 쓰러졌다.

곧이어 대군이 합류해 여러 병사들이 싸우자 흙먼지가 도처에서 일어났다. 이세민은 사대나(史大奈), 정지절, 진숙보, 우문흠(宇文歆) 등을 인솔해 깃발을 휘두르면서 적진에 뛰어 들어가 뚫고 나오면서 당나라 군의 깃발을 내걸었다. 적병들이 이를 보고는 크게 무너졌다. 이세민이 30리를 쫓아가며 목을 벤 것이 삼천여 급이었고 5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두건덕도 말에서 떨어져 생포되었다.

이세민이 그를 나무라며 말했다.

“내가 군대를 일으켜 죄를 물은 것은 본래 왕세충을 겨냥한 것으로 그대의 일과는 관련이 없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경계를 넘어와 우리 군사들의 칼날을 침범했는가?”

두건덕이 두려워하며 대답했다.

“만약 지금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멀리까지 원정 오는 수고를 끼쳤을 것이오.”

고조는 이세민이 적을 대파하고 두건덕을 생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직접 조서를 내려 “수나라가 붕괴된 이후 효산과 함곡관이 분리되었다. 두 영웅이 합세한 것을 하루아침에 깨끗이 쓸어버렸다. 병사들이 빨리 승리했고 더욱이 사상자도 거의 없었다. 신하로서 부끄럽지 않고 아비를 근심하지 않게 한 것은 모두 너의 공이다.”라며 이세민을 칭찬했다.

이세민이 두건덕을 낙양성 아래로 데려오자 이를 본 왕세충이 몹시 두려워하며 2천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군문에서 나와 항복을 청했다. 이로써 산동이 모두 평정되었다. 원래 정(鄭), 하(夏), 당(唐) 삼국이 정립(鼎立)했던 것을 이세민이 하나로 통일한 것이다. 이때까지 이세민은 전투에서 나서면 늘 승리했고 공격하면 늘 성공해 이미 천하의 절반 이상을 대당(大唐)의 천하로 다져놓았다.

이세민은 낙양성 궁궐에 들어간 후 소우, 두궤 등에게 명해 부고(府庫 창고)를 봉인하고 단 하나의 물건도 함부로 취하지 못하게 했다. 또 기실(記室 대장군부의 서기에 해당하는 관직) 방현령(房玄齡)에게 명령해 수나라의 도적(圖籍 호적이나 농지에 관한 정부문서)과 제조(制詔 각종 명령들)들을 거두게 했다.

그리고 왕세충의 수하 가운데 단달(段達) 등 죄가 무거운 50여 명의 목을 베고 그 외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자들은 모두 석방했다. 또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지내 추도했다. 군사들에게 큰 잔치를 베풀고 공에 따라 선물을 하사했다. 고조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배적(裴寂)을 군중에 보내 병사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무덕 4년(621년) 6월 이세민이 개선해서 돌아왔다. 이세민은 황금갑옷을 입고 1만의 철기와 1만의 기병 3만 갑사를 거느렸다. 앞뒤로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왕세충과 두건덕을 포로로 잡고 수나라의 각종 기물 등을 태묘(太廟)에 바쳤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지극한 예로 연회를 베풀었다. 고조는 옛날 관직으로는 특별한 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 따로 휘호를 드러내고 깃발을 사용해 공과 덕을 기렸다.

대당이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이세민은 수천의 현갑군을 거느리고 여러 차례 10배가 넘는 적을 크게 물리쳤다. 무뢰관 앞에서도 이세민은 직접 현갑군의 선봉에 서서 신위를 떨쳤다. 3천의 철기를 이끌고 직접 적진을 부수고 10만이 넘는 두건덕의 군대를 대파해 5만이 넘는 포로를 잡았다. 또 두건덕을 생포해 왕세충이 투항하도록 압박했다. 이때부터 당나라는 통일대업을 확실히 다지게 된다.

고조는 이세민의 이 전공 때문에 그를 천책상장군(天策上將軍)에 임명했는데 왕공(王公)보다 더 높은 지위였다. 이제 이세민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위에 올랐다. 천책상장은 실질적으로 황제 및 태자와 차이가 없는 존귀한 직책이었다. 고조가 그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