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제2절 해외에 끼친 영향
천조풍채(天朝風采)
중국 신전문화(神傳文化)의 전성기였던 당대(唐代)와 그 번영한 문화는 세계적으로도 비교할만한 대상이 없다.
당나라의 문학적 성취를 들자면 시가(詩歌)가 가장 발달했다.청나라 사람이 편찬한《전당시(全唐詩)》에는 당나라 시인 약2천여 명의 작품4만8천여 수가 수록되어 있다.당초(唐初)에 시인으로는 초당사걸(初唐四傑)이 유명한데 바로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이 있었다.성당(盛唐)시기의 시선(詩仙)이백은 특히나 당시(唐詩)천년 역사의 빛나는 봉우리가 되었다.
대당의 회화예술은 당나라 초기 염립본(閻立本),염립덕(閻立德)에서 시작되었다.능연각의24공신도는 바로 염립본의 작품이다.나중에 성당시기에 이르면 오도자(吳道子)가‘화성(畫聖회화의 성인)’의 칭호를 들으며 대당 회화예술을 더 아름다운 경지로 이르게 했다.
대당은 벽화가 특히 발달했다.유명한 막고굴(莫高窟)의 벽화와 조각 예술은 수당시기에 그 기술이 최고봉에 달했다.당나라 때는 또 많은 서법가(書法家)들이 배출되었다.구양순(歐陽詢),우세남(虞世南)은 모두 당초(唐初)의 저명한 서법가들이다.구양순의 해서(楷書)는 필력이 엄정하며《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은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 일가를 이뤘다.우세남 해서의 대표작은《공자묘당비(孔子廟堂碑)》,《여남공주묘지(汝南公主墓志)》,《모난정서(摹蘭亭序)》등이 있다.
대당은 또 음악과 무용도 크게 발달했다.태종은 궁정에서 대규모 음악과 무용공연을 펼치곤 했는데 앞서 언급한120명의 무용수가 참여한‘진왕파진악(秦王破陣樂)’은 멀리 해외에까지 그 명성이 전해졌다.
의학도 발달해서 약왕(藥王)손사막(孫思邈)이 편찬한《천금요방(千金要方)》과 그 후속서인《천금익방(千金翼方)》에는 각종 약물의 근본,진료와 치료의 구결,침구법,양생술 등을 포함한 방대한 저술로 세상에 구하기 힘든 귀한 의서다.
대당은 건축계획이 엄정하면서도 규모가 웅대했다.수도인 장안과 동도(東都)낙양은 모두 건축 역사상 경전(經典)이 되어 후세 도시계획의 모범이 되었다.당시 일본의 헤이안쿄(平安京지금의 교토 성),신라 경주의 금성(金城),고구려의 평양성과 발해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등 주변 국가들의 수도는 모두 장안을 모방해 건설되었다.
대당은 도시의 상업과 교통 역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달했다.육로(陸路)교통은 장안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도로가 분포되었다.수로(水路)는 남북으로 연결된 대운하가 중심이 되었다.전국 각지에 육역(陸驛육상 역참)과 수역(水驛수상 역참)이 곳곳에 있었다.편리한 교통과 관리제도는 국제교류에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육로와 수로가 사통팔달로 통한 것 외에도 대당의 해로(海路)역시 활성화되었다.당시 일본으로 가는 해로만3가지가 있었고 광주(廣州)나 월남에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및 이집트와 동아프리카까지 해상교통로가 열렸다.
대당은 한국,일본 및 동남아,남아시아 각국과도 활발한 경제 및 문화교류를 가졌으며 특히 일본문화는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
사방에 혜택을 주다
대당(大唐)의 선진적인 문화사상과 사회생활 등은 다양한 방면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다.그중 영향이 가장 컸던 것은 정관(貞觀) 20년(646년)일본‘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다.
서기645년6월19일 고토쿠 천왕(孝德天王)이 중국식 연호를 모방해‘다이카(大化)’란 새로운 연호를 제정하고645년을 원년으로 삼았다.다이카2년(646년)정월 초하루 고토쿠 천왕이‘개신의 조서(改新之詔)’를 반포해 개혁을 정식으로 시작했고 역사에서는 이를‘다이카개신’또는 을사의 변화(乙巳之變)라고 한다.혁신파들이 당나라 식 율령제도를 본받고 일본의 예전 관습을 참고해 경제는 물론 정치방면에서 개혁을 진행해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규정하고 조서를 통해 개신의 내용 및 율령 등을 반포했다.다이카 개신은 일본의 통치제도를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으며 중화신전문화를 끌어들여 당 태종 및 같은 시대 천조(天朝)의 중생들과 역사적인 연원을 맺었다.
원래 일본의 나라 이름은‘왜노국(倭奴國)’이었다.《송사(宋史)‧일본국전(日本國傳)》에는“당태종이 그 나라가 위치한 곳이 해가 뜨는 동해에 의지하기 때문에 국명을 일본이라고 하사하니 태양의 근본이라는 뜻이다.”라는 기록이 있다.일본에서는 다이카 개신 이후에 정식으로 예전에 태종이 하사했던 국명을 채택해 나라 이름을‘일본’으로 고쳤다.
새왕의 정권이 세워진 지 얼마 후 일본 왕은 중앙집권지도사상을 수립하기 위해 신하들을 대대적으로 소집해“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는 것처럼 제왕의 도가 유일”함을 맹세하게 했다. 647년7색(色) 13계(階)의 관위(官位)를 제정했다. 2년 후에는 다시19단계 관위를 제정했다. 649년에는 조서를 내려 국박사(國博士)다카무코노 구로마로(高向玄理)와 백제 출신의 승려 민(旻)에게 명령해‘팔성백관(八省百官)’을 설치하게 하고 중앙기구를 건립했다.지방에는 국(國),군(郡),리(里)를 설치해 각각 국사(國司),군사(郡司),이장(里長)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팔성백관(八省百官)’제도와 국(國)・군(郡)・리(里)제도는 모두 당나라의 삼성육부제(三省六部制)와 주현(州縣)제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다이카 개신은 일본이 당나라를 지향한 율령제를 건립한 시작이 되었다.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은 국력이 강화되었고 각 방면에서 당나라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일본의 중앙관직은1869년 메이지유신에 이르기까지 약1200년 간 줄곧 당나라 관직제도를 따랐다.
630년부터 일본은 당나라에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했다.사절단의 규모는 가장 많을 때는5백 명에 달할 정도로 규모가 아주 컸다.견당사는 당나라의 신전문화와 각종 다양한 제도와 율령을 일본에 가져다주었다.
일본 천왕은 조정에서 유가(儒家)와 불가(佛家)를 핵심으로 하는 치국이념을 수립했다.불교는 처음엔 고구려나 한반도를 통해 들어왔으나 당나라에 들어간 일본 유학승들이 중국 불교의 각 종파를 일본에 가져오면서 귀국할 때 많은 불전(佛典)들을 가져왔다.조정에서는 적극적으로 유학을 제창했다.정부는 관리를 양성하는 당나라 제도를 본받아 중앙에는‘대학(大學)’을 설립하고 지방에는‘국학(國學)’을 설치했다.대학의 과정에는《논어》,《효경》등의 유교 경서를 배우는‘명경도(明經道)’와 율령을 학습하는‘명법도(明法道)’및 한문으로 된 역사를 학습하는‘기전도(紀傳道문장도라고도 함)’가 있었다.
이후 몬무(文武)천왕 때인 대보(大寶)원년(701년)대보율령(大寶律令)을 반포했고 양로2년(718년)에는 양로율령(養老律令)을 만들었는데 당나라 율령제도를 모방한 게 아주 많았다.전제(田制)를 반포하고 호적을 만들며 경사에 관서(官署)를 설치하고 지방에 역참을 만든 등의 조치도 당나라를 모방했다.
당시 일본의 도성 헤이조쿄(平城京)역시 장안을 모방했는데 심지어 거리의 폭과 배열방법마저 거의 동일하다.또‘태극전(太極殿)’, ‘주작가(朱雀街)’, ‘동시(東市)’, ‘서시(西市)’등의 명칭까지 따라 했다. 8세기 후반 일본의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지금의 교토 성)로 천도한 후에도 역시 장안성을 모방해 도성을 건립했다.일본은7세기 후반부터8세기 후반까지 건설된 나니와쿄(難波京),헤이조쿄,나가오카쿄(長岡京),헤이안쿄는 모두 장안의 특색을 그대로 모방했다.뿐만 아니라 호류지(法隆寺)와 도쇼다이지(唐招提寺)등의 사찰 역시 당대 건축을 모범으로 삼아 건축되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인들의 생활습관이나 명절 풍속 등도 당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예를 들면 중양절(重陽節)에 높은 곳에 올라간다거나,전통의상인 화복(和服와후쿠)에도 당나라 의상의 영향을 받았다.일본은 또 당나라로부터 두부,간장,제당,재봉 등의 공예기술도 배워왔다.바둑 역시 이때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다.나라에 있는 도다이지(東大寺)의 쇼소인(正倉院)에 보존된 수많은 문구,의상,병풍,악기 등도 당나라에서 온 것이다.천문역법과 서법예술,생활습관,의상,다도(茶道),금속화폐의 주조,문자 역시 모두 당나라와 아주 유사했다.
당시 일부 일본인들은 심지어 장안(長安)이 중국이 아닌 일본에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나중에 대원(大元)의 쿠빌라이 칸이 일본을 공격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은 일본에 남아 전해져오던 대당의 문화를 일부나마 보호하고 존속시키기 위한 것으로 이 역시 하늘의 뜻이다!
대당은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대당성세(大唐盛世)는 정관(貞觀)시기부터 시작해 수도 장안은 곧 세계의 문화,종교,예술,경제의 중심이 되었다.대당 문화예술의 독특한 매력은 주변 각국은 물론이고 멀리 세계 도처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깊고 큰 영향을 끼쳤다.게다가 대당은 종교와 신앙이 자유롭고 경제가 발달했으며 국력까지 강성해 세계적으로 선도적인 지위에 있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많은 나라에서 사신이나 상인,학자나 예술가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장안을 찾아와 배움을 구하거나 무역에 종사했다.
종교의 사회적 지위와 영향력에 있어서도 당나라 시기를 최고라 할 수 있다.당시 도교(道敎)는 국교로 존중되었다.현장은 서역에 가서 경전을 구한 후 천축에서 돌아오면서657부의 불경을 갖고 장안에 돌아왔다.그후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책으로 엮어《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했다.불교의 지위는 비록 도교만은 못했어도 그 전파 범위가 아주 넓었고 신도의 숫자 역시 매우 많았다.불교는 또 이때부터 한반도와 일본 및 주변 여러 나라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불도 두 종교 외에도 당시에는 또 이슬람교,경교(景敎기독교의 일파인 네스토리우스교),배화교(拜火敎)및 마니교 등 외래종교들도 중국에 전해들어오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대외개방시기였고 당시 대당과 교류한 나라는70여 개에 달한다.외국의 귀족들은 자제를 장안에 있던 태학(太學)에 보내 중국문화를 학습하게 했다.
당나라 때는 대외무역도 아주 발달했다.상인들은 광주(廣州)에서 말라카해협을 거쳐 인도양으로 들어가 인도,스리랑카로 갔으며 더 나아가 페르시아 만 및 홍해까지 도달했다.서방으로 통하는 해로와 신라와 일본으로 가는 뱃길은 당시에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유태인이나 페르시아인 및 아라비아 상인들도 앞을 다퉈 동쪽으로 건너왔다.중국 연해의 교주(交州),광주,천주(泉州),명주(明州지금의 절강성 영파),양주(揚州)등의 도시는 외국선박이 빈번하게 드나들었고 마치 비온 후 죽순이 자라나듯 대외무역이 번성했다.
세계적인 왕래가 날로 발달함에 따라 당나라 사람들 역시 처음으로 해외 여러 나라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대당 이후 해외에서는 대부분 중국인들을 당인(唐人)이라 불렀고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당인가(唐人街차이나타운)또는 대당가(大唐街)로 불렀다.지금까지도 세계 여러 나라의 대도시에서는 어느 곳이나 중국인들이 모여 사는 곳을 당인가라 하니 해외에서 대당성세의 성망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태종은 이처럼 바다처럼 넓은 흉금과 자신감으로 주변민족과 사방의 추장(酋長)및 해외 각국을 감화시켰고 여러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조공을 오게 했으며,본국 백성은 물론이고 조정의 문무백관 및 온갖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교화해 은택이 멀리까지 펼쳐지게 했다.
결론:만고에 이름 날린 위대한 대당
대당(大唐)의 태종황제 이세민은 열여섯 살부터 두각을 나타내 기묘한 책략으로 적을 물리치고 부친을 도와 기의(起義)했다.몸소 숱한 전투를 치르면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했고 공격하면 반드시 성공했으며 늘 선봉에 서서 적진을 무너뜨려 적수를 찾을 수 없었다.세상에 보기 드문 예지(叡智)와 신무(神武)로 장안을 공략했고 낙양을 취했으며 여러 도적들을 평정해 중원을 안정시키고 천하를 통일했다.
제위에 올라 천하에 군림한 후에는 동돌궐을 멸망시키고 토욕혼을 정벌했으며 토번과 화친했다.또 멀리 서역의 고창을 정벌했고 고구려를 원정했으며 설연타를 멸망시키고 천가한(天可汗)이란 존호를 받았다.신주(神州)의 주인이 된지 불과 몇 년 만에 약4백년 간 분열되어 전란이 끊이지 않던 중국을 대당의 깃발아래 통일시켰다.당 태종은 도가를 존숭하고 유가를 도왔으며 불가를 높여 정통 수련(修煉)문화를 널리 알렸으며 이를 통해 인류의 사상과 행위를 규범지었다.당 태종의 지도아래 대당왕조의 천민(天民)들은 사상 유례가 없는 만방(萬邦)이 태평한 정관성세를 창조했다.또 이 시기 정통적인 신전문화는 인근 여러 나라에 복택을 미쳤고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쳐 사방의 이민족이 조공을 바치며 만방이 내조(來朝)하게 했다.
이번 차례 인류의5천년 역사는 억년에 달하는 지구인류 역사의 장하(長河)중에서 손가락 한번 튕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불과하며 전체 우주의 만장한 세월 속에서 보자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미미한 시간이다.하지만 인류가 정법(正法)을 얻고 대도(大道)를 수련하기 위한 기초를 다지고 최후에 반본귀진(返本歸真)하기 위한 역사의 찬란한 대 연극은 바로 이곳에서 상연되었다.당 태종은 한 조대 천국(天國)의 중생을 이끌고 신주대지(神州大地)위에 중화 신전문화의 우뚝 솟은 최정상을 연기해냈으며,찬란한 가운데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장(章)을 만들어냈다.
위대한 대당의 명성,만고(萬古)에 남으리라!
주요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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董誥等編,《全唐文》,清
陶宗儀,《書史會要》,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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房玄齡等,《晉書》,唐
魏徵等,《隋書》,唐
劉知幾,《史通》,唐
(전문 완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3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