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찬란한 5천년 신전문화의 천고영웅인물 연구팀
【정견망】
5. 대만건설
1946년 10월 대만광복 1주년을 맞아 장개석은 부부 동반으로 대만을 시찰했다. 대륙으로 돌아온 후 쓴 일기에서 그는 “오직 대만만 있다면 공산당이 나를 어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후 내전에서 불리해짐에 따라 장공은 점차 중심을 대만으로 이전하려 했다.
누란지위(累卵之危)
이때 중공은 승리를 자신하고 1950년 소위 ‘대만해방’ 계획을 제정했다. 1949년 10월 9천의 공산군들이 금문(金門) 고령두(古寧頭)에 상륙했다가 국군의 반격에 의해 전멸되었다. 장공은 이 첩보를 받은 뒤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이번 전투에서 우리는 완전히 승리했고” “대만은 안전해졌다.”고 했다. 1950년 6월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중공의 ‘대만해방’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장공이 처음 대만에 왔을 때만 해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임시 총통이던 이종인(李宗仁)은 멀리 미국으로 가버렸고 많은 고위 관리들이 돈을 갖고 홍콩으로 도망쳐, 국가 재정은 고갈되고 군사도 와해되어 몹시 위험한 상황이었다. 1950년 한해의 마지막 날 일기에서 장공은 이렇게 탄식했다.
“(지난) 1년의 비극과 참상은 진실로 반성하며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군대가 작전 때문에 소멸된 것은 열에 둘에 불과했고 기회를 엿보다 투항한 자들이 열에 둘이었으며, 전투를 피해 도망치다 멸망한 자들이 열에 다섯이었다. 대만이나 각 섬에서 제대로 훈련받고 남은 사람은 불과 열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했다.”
1950년 2월 15일 일기에서는 “실로 20여 년의 분투로 얻은 기초가 완전히 전복되어 거의 사라져버렸다.” “만약 내가 더는 나서서 책임지지 않는다면 겨우 남아 있는 대만도 길어야 석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썼다. 결국 장공은 이해 3월 1일 총통 직위에 복귀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토지개혁
장공은 민생의 개선에 큰 힘을 쏟았다. 1949년 2월 1일 일기에서는 “집정한 지 20년간 사회개조 및 민중 복지에는 손을 댄 게 아주 적었다. 특히나 당정(黨政) 군사(軍事) 교육위원들은 아직도 삼민주의의 실행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모든 교육에서 마땅히 민생(民生)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긴 하지만 아직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토지는 민생의 가장 원시적인 자원이자 주요한 버팀목이다. 사실 중공이 대륙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주로 폭력적인 토지개혁 정책에 의지해 지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농민들에게 나눠주고 대신 농민의 자제들을 군대에 보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닭을 죽이고 계란을 빼앗는 정책은 중국사회의 기초구조였던 향신제도(鄉紳制度)를 파괴하고 ‘부자를 죽여 빈자를 구제’하는 공공연한 약탈정책을 채택해 크고 작은 지주들과 부농들을 무수하게 해쳤으며 또한 가난하고 고통 받던 수많은 농민들을 대역부도하게 만들어 도덕윤리를 몰락시켰다.
대만에서 장공의 토지정책은 삼민주의의 ‘평균지권(平均地權)’이념에 따른 것으로 토지를 사유(私有)하되 일정 한도 이상은 공유로 충당했다. 장개석은 “민생주의의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바로 평균지권이다. 이것이 바로 토지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토지문제는 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폭력이나 강제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면 반드시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중국경제학설(中國經濟學說)》 1943년) 라고 했다.
‘토지국유(土地國有)’ 정책에 관해 장공은 “‘균부(均富)’란 누구에게나 경작할 땅이 있고 누구나 돈을 벌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한도 이상의 토지를 독점해 대지주가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는 “절대 오늘날 주모(朱毛 주덕과 모택동)의 간사한 무리들처럼 ‘토지국유’를 구실로 국가가 인민에게 준 토지를 멋대로 하여 간사한 당이 전국의 토지를 전부 수집해 그것의 유일한 ‘전제(專政)’ 마왕(魔王)인 모택동의 손에 장악시켜 나라에서 유일한 ‘대사유주의(大私有主義)’의 대지주를 완성하도록 해선 안 된다.”(《토지국유의 중요한 의미》 1952년)
1962년 대륙에서 기근이 끝나자 장공은 미국 ‘가정주간(家庭周刊)’에 글을 발표해 대만의 (토지개혁) 경험을 대륙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 13년간 우리 대만에서는 이미 경제・교육 및 사회적으로 현저한 진보를 이뤘고 특히 토지정책에서 이미 농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경자유전과 평균지권 정책을 완수했다.”
“중국 대륙이 공산폭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대만에서 실시했던 성공적인 토지개혁을 장차 대륙에서도 계속 실시할 수 있을 것이다.”(《공비에 대한 우리의 투쟁》 1962년)라고 했다.
토지개혁의 성공은 대만 상공업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1975년 장개석이 서거할 때 대만의 1인당 국민소득은 이미 697불로 일본에 이어 아시아 2위였다. 균부정책이 실제 효과로 나타나자 대만 상위 20% 가구의 소득과 하위 20% 가구의 소득 격차는 1952년 20배에서 1980년 4.2배로 줄었고 경제성장과 동시에 빈부격차가 축소되는 기적을 낳았다. 1980년대까지 대만의 지니계수는 줄곧 0.5이하였고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전체 국민의 51%에 달했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유럽이나 미주를 포함해 아주 드문 일이다.
조국을 마음에 두다
장공은 비록 몸은 대만에 있어도 마음은 늘 대륙에 있었다. 1954년 무한(武漢)에서 홍수가 나자 장개석은 큰 관심을 가졌고 일기에도 당시 재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지금이야말로 대륙에 반격할 좋은 시기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장공은 현재 우리는 마땅히 재난구호에 힘써야 하며 반격을 말할 때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1959년 대륙에 대기근이 발생하자 장공은 대만 사람들에게 1인당 1원의 돈을 모아 대륙 동포들을 지원하자고 호소했다. 또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 대륙에 10만 톤의 식량을 제공하려 했지만 대륙 민중들의 생활 곤란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중공에 의해 거절당했다.
장개석이 고려했던 군사행동은 중공의 폭정을 뒤집고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하는데 초점이 있었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대륙 백성들이 피해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한국전쟁 기간 트루먼 대통령이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했을 때 장개석은 몹시 불안해했다. 그는 1950년 12월 1일 일기에서 “트루먼과 미국 조야에서 중공에 대해 원자탄을 사용해 격파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썼다.
1968년 12월 장개석은 미국의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당신들은 영원히 핵무기를 사용해 중국에 대처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며 중공에 대한 핵폭탄 사용에 반대하고 천안문 폭격계획을 취소시켰다. 이는 장공의 위대한 인격을 체현한 것이다.
1969년 진보도(珍寶島 역주: 중국과 소련 사이에 무력충돌이 발생한 우수리 강에 위치한 섬 이름)에서 충돌이 발생한 후 소련은 대만 측에 중공을 무력으로 공격하고 대륙에 반격을 가하자고 제안했다. 장공은 이 문제를 신중히 고려한 후 최종적으로는 반대했다.
그는 7월 5일 일기에서 “대륙 영토와 주권을 회복하는 문제에 소련이 개입하면 우리가 먼저 해결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겉으로는 협력하는 척하면서 속으로 성의 없이 한다면 협력할 수 없다.”고 했다. 10월 17일 일기에는 “우리 정부는 마땅히 그 내부변화를 조용히 지켜보아야 하며 절대로 지금 반격해 소련이 화북(華北)을 차지한 후 또 다른 괴뢰정권을 세우게 할 순 없다.”고 썼다.
6. 안정적으로 전진의 키를 잡다
1949년 1월 초 장개석 총통이 하야하면서 이종인이 대리총통이 되었고 장공은 국민당 총재 한 자리만 남겼다. 이해 8월 장개석은 큰아들 장경국과 함께 보타산(普陀山) 자죽림(紫竹林)에 가서 점을 쳐서 제비를 하나 뽑았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신선을 배우려 고산에 직접 오르니
어찌 하루아침에 제왕을 선언할 줄 알았으랴
청천백일이 늘 밝게 비추나니
충정(忠正)한 목소리 사해에 전해지네.
直上高山去學仙 직상고산거학선
豈知一旦帝王宣 기지일단제왕선
青天白日常明照 청천백일상명조
忠正聲明四海傳 충정성명사해전
중화민국의 법통은 대만에
장위국은 장공이 대만에 5가지 크고 소중한 자원을 가져다주었다고 했다.
(1) 중화민국 헌법
(2) 80톤의 황금과 120톤의 은
(3) 6800명의 문화, 과학기술계 엘리트 및 정치경제 전문가
(4) 60만 군인과 군관계자 및 상공업의 의인
(5) 60만 건의 문물과 국보
“이들 자산(資産)은 중화민국의 법통(法統)이 대만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게 했다.”
(장위국 《나의 부친 장중정》)
1949년 5월 9일 장공은 대만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해 공산당의 파괴활동을 강력히 제재하고 사회질서를 안정시켰다. 이를 통해 훈정(訓政) 과도기의 안전과 질서를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었다. 당시 계엄 중의 대만은 상당히 느슨했으며 엄혹한 폭정에 시달리던 대륙과는 천양지차였다. 양자의 목적・성격・수단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중공의 무산계급전정은 계급의 적을 소멸시키고 그것의 ‘공산주의’ 천당에 진입시키려 했다. 반면 대만의 계엄은 헌정으로 나아가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었다.
1987년 장경국은 국부 손중산과 장공의 유지를 받들어 계엄을 해제했고 당금(黨禁 정당활동 금지)과 보금(報禁 보도금지)을 개방해 전면적인 헌정(憲政)을 실시했다. 충분한 자유를 누리던 대만인들이 계엄에 대해 공개적으로 소위 ‘백색테러’라고 비판하고 장공을 ‘독재자’로 비방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의 진상을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다. 전(前) 행정원장 학백촌(郝柏村)에 따르면 “당시 계엄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민주와 자유는 없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대만은 1950년부터 지방자치를 실시해 민중들이 현장(縣長), 시장(市長) 및 지방의원을 직접 선출했다. 지방자치는 국부(國父)의 건국방략에서 중요한 원칙이었지만 중국 역사상 단 한 번도 전례가 없었다. 민선의 지방관은 대만 본성 출신에게 유리한 반면 국민당에 불리했다. 때문에 당내에 반대의 목소리가 퍼지면서 위험이 너무 크니 시행을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공은 이들의 여러 의견을 물리치고 지방자치 실시를 견지했고 지방정부의 재정을 충실하게 하기 위해 특별히 담배세와 주세(酒稅), 임업에 대한 관리 및 세수를 지방정부에 넘겼다.
중화민국은 또 1996년 마침내 대만에서 총통 직선을 실현시켰다. 이에 이르러 대만 지방자치의 실천은 큰 성공을 거뒀다.
‘민족교육’과 ‘도덕교육’을 모두 중시
반세기에 달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계획적이고 점진적으로 대만인들의 민족성을 약화시키려 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소위 ‘국어(國語)’로 가르쳤고 중국어 교육의 비중은 날로 축소되었다. 항전이 시작된 후에는 소위 대만의 ‘황국신민화(皇民化)’를 추진해 중국어 교육을 취소하고 중국어 신문을 폐간시켰으며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요구했다. 장기간 식민지 교육을 받은 대만인들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조국에 대한 공동체 의식도 점차 옅어졌다. 대만이 광복된 후 국민정부는 진짜 ‘국어’인 중국어를 대만에 보급했다.
장공은 중화전통문화를 교육의 중점으로 삼았으며 ‘민족교육’과 ‘도덕교육’을 모두 중시했다. 항전 이전 아미산 군사훈련단 훈화에서 그는 현대국가의 생명력은 “첫째가 교육 둘째가 경제 셋째가 무력이다.”(《현대국가의 생명력》 1935년)라고 했다.
대만에 건너온 후 쓴 문장에서 장공은 “교육의 내용은 지육(智育 지혜 기르기)・덕육(德育 덕성 기르기)・체육(體育 체력 기르기)과 군육(群育 공동체 정신 기르기)을 포함한다.”고 했다.
“우리 중국 고대의 교육은 예(禮 예의)・악(樂 음악)・사(射 활쏘기)・어(禦 수레 몰기)・서(書 글쓰기)・수(數 셈하기)인 육예(六藝)를 내용으로 했다. 육예 교육의 효과는 바로 심신이 균형을 이루고 몸과 머리를 다 쓰면서 지혜와 덕성을 겸비하고 문무(文武)가 합일된 건전한 국민을 훈련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를 통해 중국의 윤리습성인 아비는 자애롭고, 아들은 효도하며, 형은 아우를 사랑하고, 아우는 형을 사랑하며, 남편은 의리가 있고, 아내는 순종하는 여섯 항목의 바른 덕(正德)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학교 교육에서는 특히 중국역사와 중국지리를 중시해야 한다. 이 두 과목이 있어야 비로소 진정으로 학생의 애국심과 민족정서를 개발할 수 있다.”
장공은 국문(國文)과 역사교육을 중시했다. 일제 강점기 대만 학교에서는 중국사 교육을 금지시켰다. 광복 이후 민족 정체성과 민족 자신감을 강화하기 위해 장개석은 “국문은 일국 문화의 근본바탕이니 문과나 이과 학생을 막론하고 모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면서 초중등학교 교과과정에서 국문・역사 및 중국문화 관련 과목이 반 이상을 차지하게 했다.
또 각급 학교에서 반드시 ‘생활과 윤리’, ‘중국문화 기본교재’ 등의 과정을 개설해 학생들의 고문(古文) 훈련과 전통문화의 훈도(薰陶)를 중시했다. 장개석은 각 학교의 공통교훈을 거의 모두 ‘예의염치’로 만들어 전통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길 기대했다.
신앙의 자유
장개석은 대만에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대만 최대의 종교는 불교와 도교였지만 기타 문파의 신앙 역시 각기 도를 행하며 서로 평화롭게 공존했다. 장공은 단 한 번도 권력을 이용해 기독교를 확대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종교가 개인이니 사회에 대해 모두 적극적인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만약 사람이 산산 조각난 심리를 수습해 완전한 인격을 양성하자면 과학은 오히려 아무 능력이 없으며 오직 종교 신앙과 인생철학의 기본사상이 있어야만 인격의 내재적인 안정력을 지닐 수 있다.”(《민생주의육악 두 편 보충논술(民生主義育樂兩篇補述)》 1953년)
7. 중화문화 부흥
중공의 파괴에 맞서다
1966년 중공은 문화대혁명을 발동해 홍위병을 이용해 대륙에서 “네 가지 낡은 것을 타파하고 네 가지 새로운 것을 세우자”며 문화를 훼멸하고 전통을 전복하면서 백성을 잔혹하게 박해한 것이 역사상 전무후무한 극한 상황까지 도달했다. 장공은 이를 몹시 가슴 아파하면서 대만에서 중화문화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1966년 9월 28일 그는 교사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공산당이 “미친 듯이 중학생과 초등학생들을 몰아 홍위병으로 삼고 우리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우리의 문화를 파괴하며 우리의 윤리도덕을 훼멸시켜 근본적으로 중국인이 될 수 없게 하고 치욕적인 금수(禽獸) 사회로 만들려 한다.”고 했다.
“우리 중화민족이 거대하고 오래 지속되면서도 역대로 5천 년간 추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인(仁)을 근본으로 하는 우리 민족문화가 연면히 이어지며 단절되지 않았고 또한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진보하면서 더 견고하고 새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문화는 근본적으로 일종 지능(智能)・덕성(德城)・군체(群體)의 결정이기에 인성(人性)의 존엄과 개인의 재지(才智 재능과 지혜)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역사전통의 계승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시대 생활행위의 구체적 표현이다. 문화부흥이란 바로 우리 국민의 덕성과 수양을 제고해, 인격의 존엄, 신앙자유, 심물(心物 마음과 사물)과 군기(群己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명확히 닦아 백성들의 생활과, 민족의 생존, 국민 생계와 군중 생명의 기본조건을 증진하는 것이다.”(《국부탄신 및 문화부흥절 기념대회 치사(國父誕辰暨文化複興節紀念大會致詞)》)
“오늘 우리의 문화부흥은 모택동 무리의 문화훼멸과는 첨예하게 대립하는데 바로 중공에 대한 우리의 투쟁이 문화와 사상의 투쟁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신과 물질의 투쟁이며, 자유와 전제의 투쟁인데, 근본적으로는 바로 문명과 야만, 도덕과 죄악, 광명과 어둠, 인성과 수성(獸性)의 투쟁이다. 또한 윤리・민주・과학을 지키는 문화와 민족・민권・민생을 훼멸하는 재앙의 투쟁이다.”(같은 자료)
중공의 전통파괴에 맞서 1966년 11월 1500명이 연명으로 발기해 국부 손중산의 탄신일인 매년 11월 12일을 중화문화부흥절로 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듬해(1967년) 7월 대만 각계에서 중화문화 부흥운동 추진위원회(나중에 중화문화부흥운동총회로 개명) 발기대회가 열렸고 장개석이 친히 회장을 맡았다.
장공은 “중화문화 부흥운동은 단순히 삼민주의 혁명문화를 건설하는 운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세계 적화를 억제하고 세계의 문화위기를 구원하기 위한 길이다.”라고 했다.
이는 신생활운동과 의미가 통하며 그를 계승한 것이다.
중화문화부흥운동의 3대 종지(宗旨)는 다음과 같다.
(1) 윤리도덕을 세상을 맑게 하는 근본으로 삼는다.
(2) 민주자유을 나라에 복을 주는 원칙으로 삼는다.
(3) 과학기술을 정덕(正德)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질로 삼는다.
이 3항목의 종지는 바로 민족, 민권, 민생에 대응하며 그 목적은 삼민주의를 보급하고 민족문화를 수호하려는 것이다.
1968년 11월 12일 장공은 《전국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告全國同胞書)》을 발표해 “중화문화 부흥은 삼민주의의 새로운 시대를 조성해 윤리・과학・민주정신을 발양하고 예의에 밝고 염치를 알게 하며 삼민주의 헌정을 관철해” “나라와 동포 및 문화를 동시에 구원하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대만에서는 또 ‘중화문화부흥 청년실천운동’을 추진하고 ‘국민생활수칙(國民生活須知)’을 제정해 사람들의 의식주행(衣食住行) 여러 가지 생활방면에 대한 기본요구를 제안해 풍속을 교화해 예의지국의 문명을 널리 알리려 했다. 1970년에는 새로 수정된 ‘국민예의범례(國民禮儀範例)’가 정식으로 반포되어 청년을 배양하려던 목포를 전사회적인 생활이상으로 확장시켰다.
전적(典籍) 정리
문화부흥 운동 초기 장개석은 어떤 일이든 몸소 실천했다. 그의 감독과 지도하에 대량의 고서(古書)들이 정리되었다. 중국 고대 100명의 사상가 논술(論述)을 출판했으며 100인의 충효인물 이야기를 편찬했다. 또 젊은 세대에게 전통의 정화를 보급하기 위해 앞뒤로 대량의 중국고서들을 출판했다. 몇가지 예를 들면 《주역금주금석(周易今注今譯)》, 《노자금주금석(老子今注今譯)》, 《시경금주금석(詩經今注今譯)》 및 《백화사기(白話史記)》, 《백화자치통감(白話資治通鑒)》 등이다.
또 조지프 니덤의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번역했다. 항전 기간에 니덤은 중국을 고찰한 후 중국 고대 ‘4대 발명’을 제출해 중화문명이 인류역사상 누렸던 주도적인 지위를 부각시켰다.
장개석이 일으킨 고서 정리・편집・인쇄 및 서방 유명 저서의 번역, ‘국민생활수칙’과 ‘국민예의범례’ 제정 등의 작업은 모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쳤다. 국내 정세가 안정되어감에 따라 장개석은 국민교육수준을 제고해 사람의 소질을 개선하기 위해 9년간의 의무교육을 추진했다.
세계에 희망을 주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퇴폐와 문화의 변이 추세에 직면해 있던 서방세계에 대해 장개석은 중국의 전통지혜가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1968년 가진 한 차례 강연에서 “지금 세계문화가 이미 약간 병적인 상황이 나타날 때를 맞아 우리는 더욱더 자기 문화 중에서 정화적인 일면을 발휘해 근본을 알고 근본을 구하며 조정하고 보완해줄 책임이 있다. 이것이 바로 중화문화 부흥운동의 세계적 의미다.”(《민국 57년 행헌대회 기념에 대한 치사(對五十七年行憲大會紀念致詞)》)
1970년 11월 12일 장공은 105주년 국부 탄신기념일 강연에서 “국부께선 평생 국민혁명에 애쓰셨고 원래 중화문화를 뿌리에서부터 구원해 장엄하고 화려한 신중국(新中國)을 다시 창조하고자 하셨다.” “우리 중화문화는 본래 동방문화의 원천이자 활력이었다.” “또한 세계를 위해 정신문명의 가치표준을 창조했으며” “인류로 하여금 ‘만물(萬物)이 존중하며 따르지 않음이 없는 고귀한 덕’인 삼민주의의 세기로 진입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공은 “중화문화는 그 누구도 훼멸할 수 없으며 우리의 문화부흥 운동은 바로 천하의 인심(人心)을 일깨워 타격에서 회복시키는 것”임을 굳게 믿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7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