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简体 | 正體 | English | Vietnamese

【중국역사정술】 오제(五帝) 5: 의상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리다

5. 황제 (4)

(1) 중의학을 다지다

황제는 또 중국 전통의학의 기초를 다졌다. 《제왕세기》 등 문헌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대신인 기백(岐伯 이외에도 귀유구鬼叟區, 백고伯高, 소사少師, 소유少俞, 뇌공雷公을 포함) 등과 의학을 담론한 것을 기록해 책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황제내경(黃帝內經)》이다. 《황제내경》은 전통의학의 음양오행학, 맥상학(脈象學), 장상학(藏像學), 경락학, 병인학, 병기학(病機學), 병증(病症), 진단법, 논치(論治) 및 양생학(養生學)과 운기학(運氣學) 등의 기초 원리를 수립해 중의학의 시조로 불린다. 《소문(素問)》과 《영추(靈樞)》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각각 81편이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 《난경(難經)》, 《상한잡병론(傷寒雜病論)》과 더불어 소위 중의학 4대경전이다.

황제는 양생을 잘하는 사람은 안을 기른다(善養生者養內)고 말했다. 명나라 만력 48년 봉양(鳳陽)에서 간행된 《어세인풍(禦世仁風)》의 삽화.

기백은 상고시기 저명한 신의(神意)로 황제의 신하였다. 《황제내경》은 도가가 천인상응(天人感應)의 측면에서 장생(長生)의 도(道)와 양생(養生)의 술(術)을 설명했고 의료이론 및 방법을 논술한 경전으로 주로 기백과 황제의 문답형식으로 이뤄졌다. 역대로 중의에서는 기백과 황제를 ‘기황(岐黃)’이라 병칭하거나 또는 ‘기황의 술(術)’이라 했으니 《황제내경》이 중의학에서 태두와 같은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설에 따르면 기백과 뇌공 등이 의학을 담론하면서 맥상, 경락, 장부, 질병, 수혈(腧穴), 침법(針法) 등의 내용과 관련해 문답 형식으로 모두 81개의 질문을 기록한 것을 81난(難)이라 하는데 이것이 《난경(難經)》이 되었다.

이외에도 기백은 또 황제의 명령을 받아 《내외술경(內外術經)》 18권을 저술하고 9가지 침구(針灸)방법을 가르쳤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미 실전되었다.

황제, 기백 등은 모두 수련해서 성취를 이룬 수도인(修道人)으로 중의학은 도가의 기초 위에 건립되었고 도가에서 내원한 것이다. 초기 중의학 저작 중 대부분은 도가 수행원리와 방법 및 양생・수련과 밀접해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었으니 세간에서 도가 체계의 일부분이었다. 황제와 기백 등은 후세를 위해 의학을 건립했고 중국전통의학의 기초를 다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중의학이 수련과 반신(半神)문화에서 근원했다는 이런 관계를 확립했다.

(2) 한복(漢服)을 개창하다

황제는 또 중국 전통복식의 시조였다. 《주역》에서는 “황제, 요, 순이 의상(衣裳)을 드리우고 천하를 다스리니 모두 건곤(乾坤)에서 취했다.”고 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 이전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이나 마나 칡으로 된 짧은 옷으로 몸을 가리고 보호하거나 바람과 추위를 막는데 사용했다. 황제부터 시작해 중국인들에게 비로소 정식 의상이 생겨났고 복식(服飾)을 일종의 예의와 제도로 삼아 천하를 교화(敎化)했으며 중화문화의 일부분이 되었다. 황제가 의상을 만든 것은 중화 한복문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황제가 한복문화를 개창한 것에서 그의 정비(正妃)인 누조(嫘祖)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누조는 서릉씨(西陵氏)의 딸로 역사상 최초로 사람들에게 뽕나무를 심고 누에를 기르며 비단 제작을 가르친 사람으로 이때부터 인류는 비단옷을 입기 시작했다. 비단의상은 아름답고 화려하며 신선처럼 표일(飄逸)해 화하(華夏)가 의관상국(衣冠上國)이 된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수천 년 간 중국 비단제품은 세계 으뜸이었고 세계 각국의 인정과 사랑을 받았다. 이 모든 것이 누조의 공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녀는 후세에 잠신(蠶神 양잠의 신) 또는 선잠(先蠶)으로 존경받았다. 북주(北周) 이후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모두 누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선잠례(先蠶禮)를 국가 최고 제사의 하나로 삼아왔고 보통 황후가 직접 제사를 주관했다.

누조(嫘祖) 원나라 왕정(王禎) 《농서(農書)》의 삽화.

(3) 황제의 후예

황제는에게는 모두 4명의 비가 있었다. 정비는 누조였고 그 외에도 방뢰씨(方雷氏), 동어씨(彤魚氏),모모(嫫母)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모모는 외모가 아주 추했지만 덕행(德行)이 고상해 황제의 존중을 받았다고 한다. 《사기》에는 황제에게 2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14명이 자신의 성씨(姓氏)를 만들어 후대에 전했다고 한다. 이 14명에게 모두 12개 성(姓)이 있었으니 바로 희(姬), 유(酉), 기(祁), 기(己), 등(滕), 짐(葴), 임(任), 순(荀), 희(僖), 길(佶), 현(儇), 의(衣)씨다.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및 하조(夏朝), 상조(商朝), 주조(周朝)의 군주들은 모두 황제의 자손이었다. 이외에도 《산해경》 기록에 따르면 견융(犬戎), 북적(北狄) 등의 이민족들 역시 모두 황제의 후예다.

(4) 장례를 만들고 확립

사서(史書)의 기록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까지 쓰고 있는 수많은 발명이 모두 황제 시기에 창조되어 나왔다고 한다. 예를 들면 가마솥과 시루, 수레, 배, 절굿공이 등이다. 《세본(世本)》 기록에 따르면 황제시기 백여(伯餘)가 의상을 처음 만들고 호조(胡曹)가 모자를 발명했으며 우칙(于則)이 신발을 발명했다고 한다.

황제는 이외에도 장례(葬禮)를 규범화시켰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 이전에는 사람이 죽은 후 땔감에 싸서 들판에 내다버렸고 매장하지 않아 시신이 야수들의 먹이가 되었다. 황제가 처음 장례를 만들어 중화 예의제도를 완벽하게 했으며 관곽(棺槨)을 만들어 사자(死者)를 매장해 사자가 땅 속에서 편히 쉬게 하는 동시에 인류의 존엄함을 분명히 드러내게 했다.

이런 것들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인류의 몇 천 년 발명에 영향을 끼쳤다. 아마도 황제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황제시기에 들어와서 중화 5천년 휘황한 문명이 가장 전면적이고 계통적인 기초를 다졌으며 중화 역사상 위대한 전환점이 되어 중화민족이 정식으로 인문(人文)시대로 접어들게 했다.

(5) 도를 얻어 신선이 되다

황제는 평생 도(道)를 닦았고 도로 나라를 다스렸다. 탁록(涿鹿)대전이 있기 전에 구천현녀(九天玄女)의 전수를 받았고 천하를 평정한 후에는 또 도처로 다니며 도를 묻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련했다.

황제가 광성자에게 몸을 다스리는 요령에 대해 묻다. 《어세인풍(禦世仁風)》 삽화

《장자》에는 황제가 재위에 오른 지 19년 후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崆峒山)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뵙고 지극한 도에 대해 물었다. 광성자는 처음에는 거절하면서 “구름이 다 모이기도 전에 비가 내리고, 나무와 풀은 단풍이 들기도 전에 떨어지는데 내가 어찌 지극한 도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황제는 궁궐에 돌아온 후 문을 닫아걸고 석 달을 생각한 후 다시 한 번 광성자를 찾아갔다. 광성자는 시기가 무르익은 것을 보고 기꺼이 황제에게 지극한 도의 정수를 전해주었고 또한 《자연경(自然經)》 1권을 전수해주었다.

황제는 광성자에게 도를 물은 후 또 왕옥산(王屋山)에 올라가 《단경(丹經)》을 얻었다. 또 현녀(玄女)・소녀(素女)에게 수도와 양생법에 대해 물었고 나중에 다시 처소인 진운당(縉雲堂)에 돌아와 수련했다. 수련원만한 후 용을 타고 승천했으며 약 100년간 재위에 있었다.

《사기》에는 황제가 수산(首山)의 구리를 채취해 형산(荊山)에서 솥[鼎]을 주조했다. 솥을 막 완성하자마자 하늘에서 한 마리 용(龍)이 내려와 신선이 된 황제를 맞이하러 왔다. 황제가 용의 몸 위에 올라타자 황제를 따라 수행하던 후궁과 대신들이 모두 합쳐 70여 명이 함께 용의 몸 위에 올라타자 용이 날아 올라갔다. 뒤에서 쫓아오던 일부 신하들도 황제를 따라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에 황급히 용 수염을 움켜쥐었지만 수염이 끊어지면서 이 신하들은 모두 땅에 떨어졌다. 황제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활 역시 땅에 떨어졌다. 백성들은 황제가 하늘에 올라가는 장면을 바라보다 황제가 떨어뜨린 활과 용 수염을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눈물을 흘렸다. 나중에 이곳을 정호(鼎湖)라 부르게 되었고 황제가 떨어뜨린 활을 오호(烏號)라 불렀다.

섬서성 중부지역에 황릉현(黃陵縣)이 있고 황릉현 북쪽에 교산(橋山)이 있다. 교산 정상에 거대한 능묘가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황제의 능묘라서 황릉(黃陵)이라 불린다. 이 현의 이름 역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가 수련해서 원만한 후 용을 타고 승천한 후 백성들이 그를 몹시 그리워하며 생각하다가 황제가 세상에 있을 때 입었던 의관을 가져다 교산에 묻고는 의관총(衣冠塚)을 만들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며 황제를 추도했는데 바로 지금의 황릉이다.

참고도서

1. 《제왕세기》
2. 《사기》
3. 《산해경》
4. 《고사고(古史考)》
5. 《세본(世本)》
6. 《장자》
7. 《포박자》
8. 《박물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556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