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성탕의 성대한 덕
왕해(王亥) 이후 또 7대가 지나자 상족(商族) 사람들은 14대 군주를 맞이한다. 그가 장차 상조(商朝)라는 또 다른 조대를 개창한 첫 번째 임금이 된다.
이 왕에게는 모두 7개의 이름이 있는데 첫 번째 이름은 성생(姓生), 두 번째 이름은 이장(履長), 세 번째 이름은 척두(瘠肚), 네 번째 이름은 천성(天成), 다섯 번째 이름은 천을(天乙), 여섯 번째 이름은 지갑(地甲), 일곱 번째 이름이 성탕(成湯)이다. 후세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 바로 성탕이다.
성탕의 출생은 십 수 대(代) 만에 또 일반인들과 완전히 달랐다. 그 역시 모친이 뜻에 감응해 임신된 후 출생했다. 《송서(宋書)》에 따르면 “주계(主癸)의 비(妃)는 부도(扶都)라 하는데 어느 날 흰 기운이 달을 관통하는 것을 보고 감응해서 을(乙)일에 탕을 낳아 이름을 천을(天乙)이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주계란 누구인가? 성탕의 부왕(父王)으로 설(契)의 13세 손이다.
성탕 역시 내력이 있어서 골격이 기이하고 장대했으며 외모도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아래가 풍만하고 위는 뾰족했으며 피부는 희고 수염이 있었는데 몸이 굽었고 목소리가 컸다. 신장이 9척이었고 팔이 아주 길었다.”
성탕이 성장한 후 부친의 왕위를 이으니 이때 상족은 여전히 하조의 제후로 봉지는 칠십 리였다. 성탕은 또 ‘하방백(夏方伯)’으로 불렸는데 다시 말해 하나라의 방국으로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하방백에게는 인근 제후들을 정벌할 권한이 있었다.
성탕은 세수 대야에 “진실로 날로 새롭고 날마다 새로우며 또 날로 새롭게 하라(苟日新,日日新,又日新)”란 구절을 새겨놓았다. 즉 하루를 새롭게 하려면 마땅히 날마다 새로워져야 하고 새롭고 또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3개의 ‘신(新)’자는 중의적인 뜻이 있으니 하나는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심(內心)을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고대인들은 품덕(品德)의 함양을 중시해 늘 기거하는 곳에 자신을 일깨워주는 말을 새겨놓고 수시로 본성을 기르며 수행(修行)하게 했다. 이것이 나중에 ‘좌우명(座右銘)’으로 변모하거나 또는 후인들이 벼루나 찻상, 지팡이나 기둥 등 도처에 경고의 말을 남겨놓게 했다. 성탕의 대야에 새긴 이 명문이 최초는 아니었고 이전부터 존재했다. 가령 황제(黃帝) 시대에 남겼다는 6편의 명문이 《한서・예문지》에 수록되어 있다.
또 성탕과 관련해 유명한 고사 성어인 ‘그물의 한 면을 벌린다(網開一面)’는 말이 있다. 이 이야기는 《여씨춘추》와 《사기》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상탕이 외출하는데 숲에서 어떤 사람이 그물을 펼쳐 놓고 새를 잡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은 동서남북 4방향에 모두 그물을 설치하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천하 사방에서 오는 새와 짐승들이 모두 내 그물 안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탕이 이 모습을 보고는 “아! 이렇게 하면 새나 짐승의 씨를 말리겠구나!”라고 여겼다. 이에 세 곳의 그물을 철거하고 오직 한쪽 면만 남겨놓고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새와 짐승이 왼쪽으로 가고 싶으면 왼쪽으로 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으면 오른쪽으로 가게 하소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살 생각이 없는 것들만 그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세 방향의 그물을 열고 오직 한쪽만 남긴 이것이 바로 “그물의 한 면만 벌려놓는다(網開一面)”는 성어의 출처이자 진정한 의미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몰라도 애석하게도 현대인들은 오직 한 가닥 살길만 남겨놓았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얼마나 많은 새와 짐승이 스스로 그물에 걸렸는지 모르지만 탕의 큰 인덕(仁德)이 인심에 감동을 주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상탕 본국의 백성들이 그를 추대한 은 말할 필요도 없고 상탕의 인덕이 아주 높아서 이미 극에 도달했고 심지어 새나 짐승에게까지 미친 것이다. 때문에 제후들이 이로 인해 다투어 귀부(歸附)했으며 이 역시 상탕이 후세에 성현(聖賢)의 왕으로 찬송 받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된다.
한편 성탕이 상림(桑林)에서 기우제를 지낸 것은 고대에 아주 많은 전적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상림’이란 무엇일까? 《회남자》 고유(高誘) 주에 보면 “상림이란 상산(桑山)의 숲으로 구름과 비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이다.”라고 했다. 고대에 기우제를 지낼 때 흔히 상림 속에서 지낸 것이다.
상조(商朝) 시기 상림의 제사는 국가급의 대형제사로 의식이 장엄하고 성대했으며 또 예악(禮樂)을 배치해 신령(神靈)에 대한 경건과 존중을 표현한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 각종 희생을 바쳤는데 공양품을 장작더미 위에 놓고 불태워 푸른 연기가 곧장 하늘로 오르게 했으니 이를 요(燎 역주: 하늘에 지내는 제사)라 했다.
상조가 건립된 초기 해마다 큰 가뭄을 만났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가뭄이 해결되지 않고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자 신(神)께 기도를 올리고 점복(占卜)을 친 결과 ‘사람희생’을 써야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사람을 제사의 희생으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성탕은 자신이 제사의 희생이 되어 비를 빌기로 했다.
당시에 희생이 되려면 먼저 재계(齋戒)하고 몸을 정결하게 해야 했으며 더는 술을 마실 수 없었고 채식만 해야 했다. 또 머리카락을 자르고 손톱과 발톱을 자른 후 제사 당일에 또 목욕을 해서 몸을 씻어 가장 정결한 정도에 도달해야 했다. 제사 당일 흰 천으로 만든 옷을 입고 몸에 띠를 두른 후 검은 황소와 함께 바쳐져 장작더미 위에서 불태워졌다.
불을 붙이기 전 성탕은 제대(祭臺) 위에서 여섯 가지 방면에서 자신을 책망했다.
“나의 정령이 합당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사람을 잘못 쓴 것은 아닌가? 궁궐을 너무 사치스럽게 건축한 것은 아닌가? 베개머리 송사가 너무 많았던 것은 아닌가? 관리가 뇌물을 수수한 것은 아닌가? 선량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해치는 참소가 창궐했던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그는 하늘에 간절히 청했다.
“만약 각 방면에서 잘못을 범했다면 이는 모두 저 성탕의 재주와 덕이 부족해서 생긴 일입니다. 부디 제게 죄를 내리시고 저의 죄로 인해 백성들이 연루되지 않게 하소서.”
그의 말이 아직 끝나기도 전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이 그의 성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상탕은 정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늘에 “백성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으니 실로 존경할 만 하다. 이는 그가 후세에 성현의 왕으로 칭송받게 된 원인의 하나가 된다.
이 해에 또 큰 풍년이 들어 전국이 위아래로 즐겁고 화목해지자 대신 이윤(伊尹)이 명령을 받아 《대호(大濩)》라는 악곡을 만들었다. 여기서 호(濩)의 갑골문 자형을 보면 큰 비가 흠뻑 내리는 모습이다.
《장자・천하》에서는 황제는 《함지(鹹池)》, 요임금은 《대장(大章)》, 순임금은 《대소(大韶)》, 우임금은 《대하(大夏)》, 탕은 《대호(大濩)》, 문왕은 《벽옹(辟雍)》이란 음악이 있었고 무왕과 주공이 《무(武)》를 지었다고 했다. 여기서 《대호》는 상나라 왕의 제사의식에만 사용되었고 후대 상왕들은 이 음악과 춤으로 제사를 지내 하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탕왕이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성덕(聖德)에 감사드렸다. 이는 또 유명한 고대 6대 악무 중 하나다.
성탕이 기우제를 올린 상림은 오늘날 하남성 형양현(滎陽縣)이다. 이 지역에는 탕왕묘구(湯王廟溝 역주: 탕왕의 묘가 있던 도랑)와 기우묘(禱雨廟 역주: 기우제를 지낸 묘)란 지명이 3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1. 《금루자(金樓子)》
2.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3. 《대학》
4. 《여씨춘추》
5. 《사기》
6. 《묵자》
7. 《장자》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785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