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태평(太平) 정리
【정견망】
불도징(佛圖澄)은 서역(西域) 사람으로, 본래 성은 백(帛)씨다. 일찍이 출가했고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했다. 경서(經書) 수백 만 자를 외울 수 있다.
진(晉)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 중국에 와서 낙양(洛陽)에 와서 불법(佛法)을 널리 펼쳤다. 그는 신비한 주문[神呪]을 잘 외워서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삼 씨 기름[麻油]을 연지(胭脂)에 섞어 손바닥에 바르면,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손바닥에 있는 그대로 환히 드러났다.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한 것 같았다. 깨끗하게 목욕재계한 사람도 역시 볼 수 있게 했다. 또한 불탑 위의 방울소리에 근거해 길흉화복을 말하면 징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본래 낙양에 절을 세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때마침 전조(前趙)의 왕 유요(劉曜)의 군대가 낙양을 쳐들어오자 낙양이 소란해져서 절을 세우려는 불도징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초야에 숨어 세상의 변화를 관찰했다.
당시 석륵[石勒 유요 휘하에 있다가 유요를 죽이고 후조의 초대황제가 됨]이 갈파(葛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무고한 사람들을 함부로 죽여 위신(威信)을 세웠다. 많은 불문(佛門) 제자들도 그에게 살해당했다. 불도징은 창생(蒼生)을 가엾게 생각하여 도로써 석륵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이에 지팡이를 짚고 군문(軍門)에 도달했다.
다행히 석륵의 대장군 곽흑략(郭黑略)은 평소 불법(佛法)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불도징은 곧 곽흑략의 집에 몸을 숨기고 그곳에 머물렀다. 곽흑략은 불도징에게서 오계(五戒)를 받고 제자의 예로 그를 스승처럼 모셨다. 그 후 곽흑략은 석륵을 따라 정벌에 나섰는데 매번 승패를 미리 알았다.
석륵이 의아해서 그에게 물었다.
“경에게 출중한 지모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런데 매번 행군할 때마다 길흉을 아는 것은 어째서인가?”
곽흑략이 대답했다.
“장군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신무(神武)를 지니신 분이라 신령(神靈)이 돕습니다. 도술과 지혜가 비상한 한 승려가 계신데 장군께서 중원을 차지할 기연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미 그분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신이 아뢴 길흉은 모두 그분이 알려주신 것입니다.”
석륵이 기뻐하며 말했다.
“정말로 하늘이 내리셨구나.”
이에 불도징을 불러 물어보았다.
“불도(佛道)에는 어떤 영험(靈驗)이 있는가?”
불도징은 석륵이 심오한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도술(道術)로 그를 교화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불도(佛道)는 비록 깊고 오묘하지만, 주변의 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곧 적당한 그릇을 가져와, 물을 담고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푸른 연꽃이 피어났는데 눈이 부시게 빛났다.
석륵이 이에 믿고 따르겠노라고 했다.
불도징은 이어서 석륵에게 간언했다.
“무릇 왕이 된 사람은 덕(德)에 의한 교화로 우주를 널리 다스리면 네 가지 신령한 영물이 상서로움을 드러냅니다. 반대로 정치가 피폐하고 무도(無道)하면 혜성이 하늘에 나타나게 됩니다. 변치하는 상(象)이 나타나면 길흉도 따라갑니다. 이것은 고금을 통해 변치 않는 이치로 천인(天人)의 밝은 훈계입니다.”
석륵이 듣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따랐다. 이후 마땅히 주살당해야 했으나 살아 남은 사람 가운데, 불도징의 도움을 입은 사람이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 되었다. 이로써 중국의 오랑캐들이 모두 부처님을 받들고자 했다.
당시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지만 세상에서 아무도 치료하지 못했다. 불도징이 이들을 의술로 치료하여 때에 맞추어 병이 줄어들었다. 그가 남몰래 도움을 베풀어 도움을 받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양(襄)나라 성의 해자로 흘러드는 물의 근원은 성 서북쪽 5리 되는 곳에 있었는데 그 물이 갑자기 메말랐다. 석륵이 불도징에게 어떻게 해야 물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불도징이 말했다.
“지금 당장 용에게 물을 가져오게 하십시오.”
석륵의 자(字)가 ‘세룡(世龍)’이라 불도징이 자기를 조롱하는 줄 알고 대답하였다.
“바로 나의 이 용(龍)으로도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물어보았네.”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는 진심으로 드린 말씀으로 농담이 아닙니다. 샘물의 원천에는 반드시 신룡(神龍)이 삽니다. 지금 그곳에 가서 칙명을 내리시면, 반드시 물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곧 제자인 법수(法首) 등 몇 사람과 함께 샘물의 상류원에 이르렀다. 그 근원이 있던 곳은 이미 오래 전에 말라버려 마치 수레바퀴 자국과 같았다. 따라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의심하며, 물을 얻는 게 어렵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불도징은 의자에 앉아 안식향(安息香)을 사르고 입으로 수백 마디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연속 사흘이 지나자 비로소 물이 솟아나 한 가닥 미세한 흐름이 생겼다. 이 때 길이가 대여섯 치 가량 되는 작은 용(龍) 하나가 물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여러 승려들이 다투어 그곳에 가서 이것을 보려 하자 불도징이 말했다.
“용에게는 독이 있으니 옆에 가까이 가지 마라.”
잠시 후에 물이 크게 솟아나 성의 해자가 가득 찼다.
진(晉) 성제(成帝) 함화(咸和) 5년(330) 석륵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자칭 조천왕(趙天王)이라 하고, 연호를 건평(建平)이라 했는데 불도징을 더욱 독실하게 섬겼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의 의견을 구한 후 행동했고 그를 일러 ‘대화상(大和尙)’이라 했다.
석호(石虎)에게 빈(斌)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석륵이 자기 아들로 삼고 몹시 총애했다. 그런데 석빈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 이미 이틀이 지났을 때, 석륵이 말했다.
“예전에 괵(虢)나라의 태자가 죽었을 때, 편작(扁鵲)이 그를 살렸다고 짐은 들었다. 대화상은 우리나라의 신인(神人)이니, 급히 찾아가서 알리는 게 좋겠다. 반드시 살려내실 수 있을 것이다.”
불도징이 곧 버들가지를 들고 와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죽은 아이가 일어났다. 얼마 후에는 예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석륵의 모든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사찰 안에서 길렀다.
매년 4월 초파일이면 석륵이 몸소 절을 찾아와 불상(佛像)을 씻으며, 아이들을 위해 발원했다.
건평(建平) 4년 4월에 하늘은 고요하여 바람이 불지 않는데, 탑 위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렸다. 불도징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방울이 내게 ‘나라에 초상이 나며, 그 시기는 올해를 넘지 않는다’고 알려주는구나.”
이 해 7월 석륵이 죽고, 아들인 석홍(石弘)이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석호(石虎)가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도읍지를 업성(鄴城)으로 옮기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했다.
석호는 마음을 기울여 불도징을 섬겼으며 석륵보다 더 존경했다.
불도징은 당시 업성 안에 있는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제자 법상(法常)을 북쪽으로 보내 양(襄)나라에 이르게 하였다. 제자 법좌(法佐)는 양나라에서 업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양기성(梁基城) 아래에서 서로 만나 함께 묵었다. 수레를 마주 대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승의 일을 언급하였다. 아침 무렵에 각기 길을 떠났다. 법좌가 업성에 이르러 절에 들어가서 불도징에게 문안을 드리니, 불도징이 웃으며 맞이했다.
“어젯밤에 너와 법상이 수레를 맞대고 함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구나. 선인(先人)들 말씀에, ‘공경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 것이다. 삼가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홀로 있어도 나태해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고요히 홀로 있는 것이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근본임을 너는 모르느냐?”
법좌가 듣고는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면서 또 참회했다.
이후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 이렇게 알려주었다.
“나쁜 마음 품지 마세요, 화상께서 다 아십니다.”
이에 불도징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감히 울거나, 침을 뱉거나, 똥이나 오줌을 누지 않았다.
나중에 진(晉)나라 군대가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지방으로 진출하니, 농북(隴北) 일대의 모든 성이 침략당해 핍박받았다. 세 방면에서 다급함을 알려와 인심이 어지러워지자 석호가 화를 내며 말했다.
“나는 지금 부처를 받들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했다. 하지만 다시 많은 외침을 당하니, 부처는 실로 신의 위엄이 없구나.”
불도징이 이튿날 새벽에 일찍 궁중에 들어가니, 석호가 이 일에 관해 불도징에게 물었다.
불도징이 이에 석호를 책망하며 말했다.
“당신은 전생에 큰 상인으로 어느 사찰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큰 모임에 공양을 올릴 때 모든 경비를 제공했는데 법회에 60나한(羅漢)이 있었습니다. 저도 그 생에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그 때 어떤 득도한 사람이 내게 ‘이 모임의 주인(공양주)은 명이 다하면 아마 닭으로 태어났다가, 그 후 진(晉)나라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당신은 왕이 되었으니 이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국경에 적이 침범하는 것은 나라에서 일상적인 일인데 어찌하여 불법(佛法)을 원망하고 비방하며 한밤중에 나쁜 생각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석호가 깨닫고는 땅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석호는 불도징에게 늘 묻곤 했다.
“불법(佛法)이란 무엇입니까?”
불도징이 대답하였다.
“불법이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호가 말했다.
“불법(佛法)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지만 짐이 천하의 주인으로 형벌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천하를 평정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계율을 어기고 살생을 한 것입니다. 비록 다시 부처님을 섬긴다 하더라도 어찌 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불도징이 대답했다.
“제왕이 부처님을 섬기는 것은 마땅히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마음을 순수하게 하며 불법을 널리 알려 포악한 일을 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흉악하고 어리석은 무뢰한이라면 교화로 마음을 바꿀 수 없으니, 죄가 있다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나쁜 짓을 했으면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이고, 형벌을 내려야 할 사람에게만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포악하고 멋대로 날뛰는 무리를 죽이신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비록 나중에 형벌을 줄여주더라도 역시 재앙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욕심을 죽이고 자비심을 일으켜 널리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렇게 하시면, 불교가 영원히 융성해지고 복도 먼 훗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석호가 비록 이 말을 다 따를 순 없었지만 이 도움이 적지 않았다. 석호 밑에서 상서(尙書)로 있던, 장리(張離)와 장량(張良)은 집안의 부유함으로 부처님을 섬겨서 각기 큰 불탑을 세웠다. 불도징이 그들에게 말했다.
“불사(佛事)는 청정하고 욕심 없이 자비로운 마음과 긍휼함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시주들은 의례적으로는 대법(大法)을 받들면서도 탐욕하고 인색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사냥을 즐김에 한도가 없고, 재물을 모아 쌓기에 끝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현세에 그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인데, 어찌 미래의 복보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장리와 장량 등은 나중에 모두 살육 당하고 가문이 멸족되었다.
어느 한해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정월에서 6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석호가 태자를 임장(臨漳) 서쪽에 있는 부구(釜口)에 보내 기우제를 지내게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다.
석호가 다시 불도징에게 기우제를 행하게 하였다. 그러자 곧장 두 마리의 흰 용이 나타나더니 그가 기우제를 드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이날 사방 수천 리에 큰비가 내려 가뭄이 해갈되었고 그 해 농사가 대풍을 거두었다.
당시 북방의 여러 이민족들이 원래 불법을 몰랐다. 이들이 불도징의 신비한 영험을 듣자, 모두 멀리서 불도징을 향해 예배를 드렸다. 불도징이 불법을 널리 말하지 않았음에도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그들을 교화한 것이다.
석호는 임장에서 낡은 불탑을 수리하는데 승로반(承露盤 감로를 받는 쟁반)이 없었다.
그러자 불도징이 말했다.
“임치성(臨淄城) 안에 옛날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탑이 있는데 땅 속에 승로반과 불상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 위에 무성한 숲이 있으니 그곳을 파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는 그림을 그려 사자에게 주었다. 석호가 사람을 파견해 그가 말한 대로 파보니, 과연 승로반과 불상을 얻었다.
석호는 늘 연(燕)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자 불도징이 충고하며 말했다.
“연나라의 운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내 이루기 어렵습니다.”
석호가 여러 차례 연나라를 정벌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훈계를 믿었다.
당시 위현(魏縣)에 한 유민이 있었는데 그의 씨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항상 위현 시장에 와서 구걸을 했는데 마유(麻襦 삼베 속옷)과 무명치마를 입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유라 불렀다. 그는 말솜씨가 비범했지만 모습은 꼭 미친 사람 같았다. 쌀이나 곡식을 구걸해서는 먹지 않고 큰길에 흩어두고는 천마(天馬)를 먹인다고 했다.
조흥(趙興) 태수 적발이 그를 거둔 후 석호에게 보냈다. 이에 앞서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나라 동쪽 2백 리에서 모월 모일에 아마 비상한 사람을 하나 보내올 것입니다. 그를 죽이지 마소서.”
과연 그가 말한 날짜대로 이 사람이 이르렀다. 이에 석호는 그와 더불어 대화하니 그는 단지 이렇게만 말했다.
“폐하께서는 아마 일주전(一柱展 기둥이 하나인 전각)에서 세상을 마치실 겁니다.”
석호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자 그를 불도징에게 보냈다. 그가 불도징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만나고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소. 융(戎 중국 서쪽 이민족)이 하늘의 명[玄命]을 받았으나, 왕조가 끊어지는 것은 정해진 기일이 있을 것이오. 금(金)은 땅에 녹기 마련이니 변방의 황무지 사람은 지존이 될 수 없소이다. 천자의 자리에 오른 흔적은 없어지고 끝없는 아름다움도 사라질 것이오. 후세 자손들이 번성해 면면히 이어지다 언제쯤 끝이 날 것인가? 그저 노래로 한탄할 뿐이로구나!”
불도징이 말하였다.
“하늘이 돌고 돌아 운이 다하면 막혀서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홉 목수(木水)가 난을 일으키면 도술로도 편안히 할 수 없습니다. 어질고 밝은 사람이 비록 세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기초가 무너짐을 바로잡을 수 없으니 오래도록 염부제에 노닐며 이런 근심에 괴로울 뿐이오. 구름을 넘나드는 집에 올라가 신령이 노니는 곳에서 만납시다.”
불도징과 마유가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눴으나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몰래 엿들은 사람이 있었지만 오직 이 몇 마디 말만 들었을 뿐이니, 짐작컨대 수백 년에 걸친 미래의 일을 논한 것처럼 보인다.
석호가 사자를 파견해 마유를 원래 고향으로 보내게 했다. 막 성 밖을 나서자 말에서 내려 걸어갈 수 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마땅히 방문해야 할 곳이 있소. 그렇지만 출발하기에는 아직 편안한 시간이 아니오. 합구교(合口橋)에 이르면 거기서 기다렸다가 만나는 것이 좋겠소.”
사자가 그가 시킨 대로 말을 달려 떠났다. 아직 합구교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마유는 다리 위에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를 생각해보면 날아가는 도술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석호가 낮잠을 자는데 꿈에 양떼들이 물고기를 업고 동북방향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어찌된 일인지 불도징에게 묻자 불도징이 말했다.
“이 꿈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선비족이 중원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과연 모용씨가 중원에 도읍을 세웠다.
어느 날 불도징이 석호와 함께 중당(中堂)에 올라갔는데 불도징이 홀연히 놀라며 말했다.
“유주(幽州)에 불이 났구나!”
그는 술을 들어 뿌리고는 잠시 후 웃으면서 말했다.
“이미 구했습니다.”
석호가 사람을 파견해 조사해보니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했다.
“그날 큰 불이 네 문에서 일어났는데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갑자기 비를 내려 큰 불이 꺼졌습니다. 그런데 비에 술 냄새가 났습니다.”
건무(建武) 14년(348년) 7월 석선(石宣)과 석도(石韜)가 서로 죽이려 했다. 어느 날 석선이 절에 와서 불도징과 함께 앉아 있는데 탑 위에 있는 방울 하나가 울었다.
불도징이 석선에게 말했다. “방울소리를 이해하십니까? 방울이 호자낙도(胡子洛度)라고 합니다.”
석선이 깜짝 놀라 안색이 변해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도징은 석도가 사람을 보내 죽이려한다는 것을 감추고 다만 이렇게 얘기했다.
“늙은 호인인 내가 도사가 되어 산에서 살지 않고 이렇게 두터운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낙도(洛度 법도가 떨어짐)가 아니겠습니까?”
석도가 나중에 불도징이 있는 곳에 오자 불도징이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석도가 두려워하며 이유를 묻자 불도징이 말했다.
“공에게 피비린내가 나는 것이 이상해서 쳐다보았을 뿐입니다.”
그 후 8월이 되자 불도징은 10명의 제자들에게 별실에서 재를 올리게 하고 자신은 잠시 동각(東閣)에 들어갔다. 석호와 두(斗)황후가 인사를 하자 불도징이 말했다.
“겨드랑이 밑에 도적이 있으니 열흘 안에 불도각 서쪽부터 북전(北殿)의 동쪽까지 유혈이 낭자할 것이니 부디 동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두황후가 말했다.
“스승님께서 노망이 나셨습니까? 도적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이에 불도징이 곧 말을 바꿨다.
“사람의 육정(六情)이 모두 도적입니다. 늙으면 자연히 노망이 들겠지만 그저 젊은이들이 혼미해지지 않게 하고자 할 뿐입니다.”
이렇게 넌지시 암시하며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이틀이 지나자 과연 석선이 사람을 보내 사찰 안에서 석도를 살해했다. 또 석호가 초상을 치르는 틈을 타서 대왕을 암살하려 했으나 석호는 불도징이 미리 경고한 덕분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후 석선의 일이 발각되어 수감되자 불도징인 석호에게 간언했다.
“이 사람도 기왕 폐하의 아들인데 어찌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있습니까? 만약 폐하께서 노여운 마음을 거두고 자비를 더하신다면 그는 아직 60여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죽이려하신다면 석선은 틀림없이 혜성이 내려와 업궁(鄴宮)을 쓸어버릴 것입니다.”
석호는 그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쇠사슬로 석선의 턱을 뚫어 끌고 가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우고 그의 부하 3백여 명도 모두 잡아다가 거열형(車裂刑 수레로 팔다리를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한 후 장하(漳河)에 던져 버렸다.
불도징은 이에 제자들에게 별실에서 하던 재를 중단하게 했다.
약 한달 후 한 필의 요상한 말이 나타났는데 갈기와 꼬리가 불에 탄 형상이 있었다. 그 말이 중양문(中陽門)으로 들어와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갔다. 머리는 동궁을 향했는데 어디에도 들어가지 않다가 동북쪽으로 달려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도징이 이 소식을 듣고는 탄식하며 말했다.
“재앙이 닥쳤구나!”
11월 석호가 신하들과 태무전전(太武前殿)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불도징이 읊조리며 말했다. “대전(大殿)이여, 대전이여 가시가 숲을 이뤄 사람들의 옷을 망치겠구나!”
이에 석호가 듣고 궁전의 돌을 치우게 하니 바위 밑에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불도징이 절에 돌아와 불상을 보며 말했다.
“부처님의 장엄을 지키지 못함이 유감이로구나!”
그러면서 또 혼잣말을 했다.
“3년은 더 갈 수 있을까?”
“안돼, 안돼.”
“2년, 1년, 100일, 한달은 가능할까?”
“안돼.”
이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 길로 방으로 들어가 제자 법조에게 말했다.
“무신년(戊申年 348년)에 화란의 조짐이 싹트고 기유년(己酉年 349년)에 석씨가 멸망할 것이다. 나는 그 전에 먼저 열반할 것이다.”
그는 곧 석호에게 사람을 보내 작별인사를 전하게 했다.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옮겨가는 법이라 목숨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빈도(貧道)의 스러지는 불꽃과 환영 같은 몸이 열반에 들 날이 다가왔습니다. 이미 남달리 두터운 은혜를 입은 까닭에 우러러 이 일을 알려드립니다.”
석호가 슬퍼하며 말했다.
“스승님께 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이렇게 임종을 알리시는가?”
이에 몸소 대궐을 나서 절을 찾아와 위문하자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했다.
“생과 사를 드나드는 것은 도(道)의 상(常)이며 수명의 길고 짧음은 정해진 명이 있으니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릇 도(道)는 온전히 실천함을 중시하고 덕(德)이란 게으름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진실로 업(業)과 지조에 이지러진 것이 없다면 비록 죽는다 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명을 어겨 연장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제 뜻에 미진한 것이 있다면 국가가 진정으로 불교의 진리를 존속시켜 불법을 받드는데 인색함이 없게 하며, 사원을 흥기(興起)시키되 높고 뚜렷하며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공덕을 칭송한다면 마땅히 아름다운 복을 향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를 펴는 것이 사납고 형벌이 가혹하며 성전(聖典)의 말씀을 명백히 어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법의 계율에 등을 돌리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부처님의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을 바꿔 아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면 나라의 운수가 연장되고 도인과 속인이 기뻐하며 의지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제 목숨이 다한대 해도 한이 없겠습니다.”
석호는 비통하게 오열하면서 그가 반드시 세상을 떠날 것임을 알고는 곧 그의 무덤을 만들게 했다. 12월 8일 불도징이 업궁사(鄴宮寺)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 해는 진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4년(348년)이었다. 향년 117세였다. 선비와 일반 백성들을 막론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온 나라가 통곡했다. 시신은 임장 서쪽 시산(紫山)에 묻었는데 바로 석호가 그를 위해 만든 무덤이었다.
얼마 후 양독(梁犢)이 난을 일으켜 이듬해 석호가 죽었다. 또 염민(冉閔)이 제위를 찬탈해 석씨 일족을 전부 몰살시켰다. 염민은 원래 자가 극노(棘奴)로 “가시가 숲을 이룬다”고 한 말은 바로 바로 그를 가리킨 것이다.
불도징은 키가 8척에 달하고 용모와 자태가 청아했으며 깊은 경전의 뜻을 오묘하개 해득했다. 또 세속의 논리도 통달했다. 그가 경전을 강론할 때면 가르침의 종지와 세밀한 뜻을 정확히 표방해 경전의 오묘한 뜻을 명확히 깨닫게 했다. 그는 또 자비롭고 넓은 흉금으로 창생을 대했으며 위난에 빠져 고통 받는 세인들을 정성껏 구제했다.
석륵, 석호는 원래 난폭하고 잔인해서 걸핏하면 무고한 사람들을 박해하고 잔인무도했다. 만약 이들에게 불도징이 없었더라면 누가 있어 두 사람에게 권고할 수 있었겠는가! 다만 백성들은 날마다 이익을 얻었음에도 오히려 이것이 불도징이 두 석씨를 권고한 결과임을 몰랐을 뿐이다.
불도징은 스스로 자신이 업성에서 구만여 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나 집을 버리고 도에 입문해 109년이 되었다고 했으며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정오가 지나면 음식을 먹지 않았고 계율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으며 욕망하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었다. 그에게 수업을 받고 노닌 제자들이 항상 수백 명에 달했고 문도(門徒)의 수를 다 합하면 1만 명에 달했다. 그가 거쳐 간 주(州)나 군(郡)에 건립한 사찰만 893곳에 이르렀으니 불법을 널리 펴는 성대함에서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모용준이 업성을 도읍으로 사고 석호의 궁전에 살았는데 늘 호랑이가 팔을 무는 꿈을 꾸었다. 그는 이것이 석호가 못된 수작을 부리는 것이라 생각해 곧 석호의 시신을 찾게 했다. 동명관에서 파냈는데 석호의 시신이 뻣뻣하게 굳어 썩지 않았다. 모용준은 그 시신을 발로 밝고 욕을 했다.
“죽은 오랑캐가 어찌 산 천자를 위협하느냐! 네가 궁전을 지어 완성시켰지만 네 자식조차 반역을 꾀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랴!”
그는 석호의 시신을 심하게 매질해 훼손한 후 장하에 던져 버렸다. 그러나 시체가 다리 기둥에 기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진(秦)나라 장군 왕맹(王猛)이 곧 이를 거둬 묻어주었다.
이 교각이 바로 전에 ‘마유(麻襦)’가 말했던 기둥이 하나뿐인 전각 즉 ‘일주전(一柱展)’이었다.
불가에서는 자비를 중시하는데 천 년 전의 불도징은 신통(神通)을 펼치며 불법 이치로 폭군을 교화하고 살육을 감소시켰다. 하지만 석호는 여전히 나쁜 일을 끝가지 저질렀고 결국에 시신이 모욕을 당했다.
지금 파룬궁(法輪功) 수련생들은 자신의 안위도 돌보지 않고 세인들에게 파룬궁이 박해받은 진상을 알리면서 중생을 구도하고 있다. 설사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한 악인들이라도 거듭 기회를 주어 깨닫고 회개해서 중공사령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석호를 경계로 삼아 파룬궁 박해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주: 불도징의 한자 표기에서 어떤 이는 불도징(佛圖澄)이라 하고 어떤 이는 불도징(佛屠澄)이라고 하는데 이는 산스크리트어를 음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차이에 불과하다.
자료출처: 《고승전》, 《태평광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