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상조(商朝)가 건립된 후 성탕이 12년간 재위 후 세상을 뜨자 그의 큰아들(태정太丁)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태정의 동생인 외병(外丙)이 뒤를 이었다. 외병이 3년간 재위 후 세상을 뜨자 외병의 동생인 중임(仲任)이 왕위에 올랐고 4년 후 중임도 사망하자 상조의 4번째 군왕은 성탕의 장손(長孫 태정의 큰아들) 태갑(太甲)이 되었고 이윤이 사보(師保 제사)가 되어 보좌했다.
태갑은 겨우 12년간 재위했지만 그의 명성은 역사적으로도 결코 작지 않다. 왜냐하면 전무후무하게 드라마틱한 사건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임금이 재위 중에 조상의 묘로 쫓겨난 것이다.
애석하게도 남아 있는 고대 문자기록이 너무 적고 현존하는 얼마 되지 않는 기록들 역시 몇 구절에 불과하다. 일설에 따르면 또 후인들이 기억에 의거해 보충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것에 의지한다 해도 당시 발생했던 일을 희미하게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태갑이 왕이 되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천지조상에게 제사를 올린 후 이윤이 새로운 왕에게 한 차례 의미심장한 간언을 했다.
“아, 우리 상나라 임금님께서 덕행을 널리 실천하고 너그럽고 인자함으로 포악함을 대체했기 때문에 천하 백성이 진실로 그리워했습니다. 지금 임금님께서 그 덕을 이으려 하신다면 처음에 달려 있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굳건히 함은 어버이부터 하시고 공경하는 마음을 굳건히 함은 윗사람부터 하시며 사랑과 공경의 정치를 집과 나라에서 시작해 마지막에 천하로 확충되게 하소서.”
“아! 선왕(先王)께서는 사람의 기강을 바로잡고 간언을 따르되 어기기 않으셨으며 이전 현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높은 자리에 계실 때는 밝은 정치를 펼치셨고 낮은 자리에 계실 때는 충성을 다하셨습니다. 남에게는 완벽한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으며 자신에 대한 단속은 아무리 잘해도 부족한 것처럼 여기셨기 때문에 만방(萬邦)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윤이 아무리 권고해도 태갑이 따르려 하지 않았고 임금이 된지 오래지 않아 말이 아니게 되었다. 《사기 은본기》에는 그의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데 “현명하지 못하고 포악하며 성탕의 법을 지키지 않고 덕을 어지럽힌” 것이다. 이런 비평은 어느 임금에게 떨어지든 다 나쁜 일이다.
원로 재상 이윤은 처음에는 예로 대했으나 통하지 않자 나중에는 강경책을 동원한다. 다시 말해 여러 차례 권고에도 효과가 없자 태갑의 직무를 잠정 중단시키고 도성에서 멀리 떨어진 성탕의 묘가 있는 동성(桐城)으로 보내 과오를 반성하게 한 것이다.
사관이 이 과정을 기록한 것이 《상서 태갑(太甲)》의 3편 문장이다. 이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갑이 이윤의 간언을 따르지 않자 이윤은 먼저 다음과 같은 글로 권고했다.
“선왕이신 성탕께서는 하늘의 밝은 명을 유념해 천지신명의 뜻을 이어받고 사직과 종묘에 대해 공경하고 엄숙하게 대하지 않음이 없으셨습니다. 하늘이 그 덕을 살펴보시고 큰 명을 모아 주시어 만방을 어루만져 편안히 하도록 했습니다.”
“뒤를 이은 임금님께서는 경계하시어 그대의 임금 노릇을 경건하게 하소서.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선조를 욕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태갑이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유념하지 않자 이윤이 또 권고했다.
“선왕께서는 아직 날이 밝기 전부터 나랏일을 생각하셨으며….”
이렇게 부드러운 권고로는 아무 효과가 없자 이윤은 강제수단을 동원해 뭇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처럼 의롭지 못한 것은 습관이 본성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자와는 친할 수 없다. 성탕의 무덤이 있는 곳에 집을 짓고 살게 해 선왕의 훈계를 가까이 접하도록 하라….”
이리하여 태갑은 동궁(桐宮)으로 보내져 ‘거우(居憂 상을 치르는 것)’했다. 즉 이윤이 태갑을 도성 밖으로 내쫓고 조상의 묘를 지키며 반성하고 선왕의 유훈을 알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무를 처리하고 제후들을 접견하는 등 국가의 크고 작은 일들은 누가 처리했을까? 당연히 이윤이 맡았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매일 어질고 현명한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것이 유익했고 태갑이 잘못을 깨달았다. 3년 후 이윤은 면류관과 예복을 가져가서 성대한 의식을 치르고 태갑을 다시 임금으로 맞이해왔다. 또 국가정무를 되돌려주고 자신은 계속해서 태갑의 사보를 맡았다.
태갑은 돌아온 후 이윤에게 손을 모아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최고의 예우를 했다.
“하늘이 만든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만든 재앙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미 사보의 가르침을 저버려 처음에 잘하지 못했으나 오히려 바로잡아 주고 구제해주신 은덕에 힘입었으니 앞으로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지적해주십시오.”
이윤도 손을 모으고 절을 올리는 최고의 예로 회답하면서 여전히 훈계를 잊지 않았다.
“자신의 몸을 닦아 진실한 덕으로 아랫사람들과 잘 화합하시면 현명한 임금이 되십니다.”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덕에 힘쓰시고 위대하신 할아버지를 살펴보시어 한시도 즐기거나 태만해선 안 됩니다.”
방탕한 아들이 돌아온 것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일이다. 태갑은 다시 재위에 오른 후 환골탈태해 정사를 부지런히 돌보고 백성을 사랑했으며 힘써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자 각지 제후들이 모두 태갑이 명군(明君)으로 변신한 것을 보고는 자연히 귀부해 했고 이때부터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해졌다. 바로 ‘태종중흥(太宗中興)’이란 태평성세를 이룩한 것이다.
이윤은 또 자신의 봉지로 떠나가기에 앞서 《함유일덕》이란 글을 써서 태갑에게 바쳤다.
“덕을 오직 한결같이 가지면 움직임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덕을 이랬다저랬다 하면 움직임에 흉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길흉(吉凶)이 어긋나지 않음은 오직 사람에게 달려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거나 복을 내림은 덕(德)에 달려 있습니다.”
사보가 임금을 추방한 것은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것으로 몇천 년간 특수한 교육의 전범으로 간주되어 왔다.
한편, 신하의 몸으로 임금을 추방한 것은 강상(綱常) 어지럽힌 것은 아닐까? 이 문제에 대해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일찍이 질문한 적이 있다.
“어진 사람이 신하가 되어 그 군주가 잘하지 못한다고 추방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다.
“만약 이윤과 같은 그런 뜻이 있다면 괜찮지만 이윤과 같은 그런 뜻이 없다면 그것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이다.”
임금과 신하가 이 한 장면을 연기해 덕(德)과 선(善)의 여러 측면을 풀어냈다. 이는 마치 이윤이 말한 것처럼 “덕에는 불변하는 표준이 없지만 선을 위주로 하여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선에도 불변하는 기준이 없지만 합일을 항상된 덕으로 삼아야 합니다.(德無常師,主善爲師;善無常主,協於克一)”라는 것과 같다.
이윤은 또 민간에 수천 년간 전해지는 한마디 명언(名言)을 남겼다. 바로 “7대의 묘(廟)에서 덕을 관찰할 수 있다(七世之廟,可以觀德)”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 대가족에서 잠언으로 흔히 사용하는 말이다.
상조의 정치를 번창시킨 후 태갑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옥정(沃丁)이 왕위를 이어 상조의 제5대 임금이 되었다. 이윤은 태갑이 덕을 닦고 나라를 다스린 것을 위로하기 위해 태종(太宗)이라 칭했다. “조(朝)는 공이 있는 임금에게 하고 종(宗)은 덕이 있는 임금에게 한다.”
한편 사보 이윤은 여전히 인간 세상에 한동안 더 남아 있었는데 다음 왕인 옥정이 왕위를 이어받아 제대로 정사를 펼칠 수 있게 돕는 사명이 남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천으로 보여준 이윤의 가르침 때문에 후세 대신들은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는(爲下克忠)’ 행동의 도리와 심성(心性)을 준수하는 도리에 대해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1. 《한서》
2. 《상서정의》
3. 《맹자》
4. 《상서》
5. 《사기》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8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