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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안회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공자

글/ 중국 대법제자

【정견망】

공자가 열국(列國)을 주유할 때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해 7일간 먹을 양식이 없었다. 이때 제자인 자공(子貢)이 비상금을 털어 포위를 뚫고 마을에 들어가 쌀 한 섬을 구해와 안회가 밥을 짓는데 중간에 천정에서 떨어진 그을음이 솥에 떨어졌다. 안회가 그을음이 떨어진 곳에서 밥 한 주걱을 퍼먹었다.

이 이야기에 대해 《여씨춘추》에서는 공자가 안회를 의심했다고 했고 《공자가어(孔子家語)》에서는 자공이 안회를 의심해 공자에게 알렸지만 공자는 안회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 전해지는 《공자가어》는 모두 44편이다. 위진(魏晉) 시기 왕숙(王肅)이 자신의 제자이자 공자의 22세손 공맹(孔猛)에게서 공자와 그 제자들에 관한 언행이 기록된 이 책을 얻었다고 한다.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소위 ‘사서(四書)’와 비교해보면 규모나 내용면서 《공자가어》가 훨씬 낫다. 필자가 보기에 일부 방면에서 드러난 사상경지의 높이 역시 ‘사서’와는 비교하기 어렵다고 본다.

여기서는 안회가 몰래 밥을 먹었다고 오해받은 이 일에서 만약 《여씨춘추》처럼 공자마저 자기 제자를 의심했다면 이는 공자를 너무 속이 좁고 경박하게 여긴 것이다. 때문에 나는 《공자가어》의 기록을 더 신뢰한다.

아래에 《공자가어》에 나오는 대목을 직접 읽어보자.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수행하는 사람들이 7일간 밥을 먹지 못했다. 자공(子貢)이 몰래 포위망을 뚫고 나가 본인이 지니고 있던 물건을 주고 농촌 마을에 가서 쌀 한 섬을 교환해왔다. 이에 안회(顔回)와 중유(仲由)가 다 쓰러져가는 지붕 밑에서 밥을 짓다가 검은 그을음 덩어리가 밥에 떨어졌다. 안회가 더러워진 곳을 퍼서 먹었다.

그런데 자공이 물을 떠가지고 오다가 마침 안회가 밥을 먹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속으로 좋지 않게 여겨 안회가 밥을 훔쳐 먹은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방에 들어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진 사람과 청렴한 선비라도 곤궁해지면 변절할 수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절개를 바꾼다면 어찌 어질고 청렴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그러자 자공이 말했다.

“안회 같은 사람은 아무리 곤궁해도 절개를 변치 않을 사람입니까?”

“그렇다.”

자공이 안회가 밥을 먹은 사실을 알리자 공자가 말했다.

“내가 안회를 어질다고 믿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아무리 네가 현장에서 보았다 해도 나는 회를 의심하지 않는다. 필경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직접 회에게 물어보도록 하마.”

공자가 안회를 불러서는 말했다.

“며칠 전 꿈에 성인을 뵈었다. 이것은 혹시 나의 앞길을 열어주고 복을 주시려는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네가 짓고 있는 밥이 다 되었다면 성인께 먼저 제사를 지낸 후 먹어야겠다.”

그러자 안회가 대답했다.

“방금 밥에 재가 떨어져서 그대로 두자니 깨끗하지 않고 버리자니 아까워서 제가 한 덩어리 먹었사오니 이 밥으로는 제사를 지낼 수 없습니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말했다.

“음 그렇게 된 일이로구나, 만약 재가 떨어졌다면 나 역시 밥을 떠서 먹었을 것이다.”

공자는 안회를 내보낸 후 제자들을 불러모은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오늘 일을 통해서야 안회를 믿게 된 것이 아니다.”

이에 제자들이 모두 안회에게 탄복했다.

이상에서 볼 수 있다시피 자공은 총명하고 말을 잘해 공자가 아끼는 제자 중 하나였지만 자부심이 강하고 관대함이 좀 부족했다. 때문에 안회를 오해해서 스승을 찾아가 이치를 따졌던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온화하고 지혜가 뛰어난데다 관대해서 제자들 앞에서 가볍게 안회의 결백을 입증하고 또 이 기회를 빌려 제자들을 교육시켰다. 그는 결코 안회를 의심하지 않았고 또 그를 오해한 자공을 탓하지도 않았다.

온화(溫和)·선량(善良)·공경(恭敬)·절검(節儉)·겸양(謙讓)하게 자연스레 사람들을 설득해 만세(萬世) 스승의 이미지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안회는 공자가 시험 삼아 던진 질문에 조금도 속이지 않았고 오해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진실을 말했다. 또 다른 제자들은 안회의 충직하고 믿음직스러우며 솔직한 언행에 탄복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들인가! 때문에 공자와 그 제자들은 사람들이 흠모하고 탄복하며 동경하는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여씨춘추》에도 비슷한 내용이 등장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공자가 진나라와 채나라 사이에서 고통을 겪을 때의 일이다. 명아주 국에 쌀가루조차 끓이지 못해 이레 동안 쌀 한 톨 입에 넣지 못했다.

공자가 낮에 누워 있는 동안 안회가 쌀을 구해다 부뚜막에서 밥을 지었다. 밥이 다 되어갈 때 공자가 우연히 멀리서 보니 안회가 솥에서 밥을 집어먹었다.

얼마 후 안회가 상을 차려 공자에게 드시라고 하자 공자가 짐짓 못 본체하며 거짓으로 일어나 말했다.

“방금 꿈속에 돌아가신 임금님을 뵈었으니 제사상을 먼저 올린 후에 먹도록 하자.”

그러자 안회가 말했다.

“안됩니다, 아까 밥을 하다 재가 솥에 들어가 음식을 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제가 한 줌 쥐어 먹었습니다.”

그러자 공자가 탄식하며 말했다.

“믿을 것은 눈이지만 눈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되고 의지할 것은 마음이지만 마음도 믿기에는 부족하구나. 제자들아 이 말을 명심하거라, 사람을 안다는 것은 본시 쉽지 않은 법이다.”

이를 앞서 《공자가어》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인물의 사상이 너무 천박하지 않은가? 게다가 말도 그리 순창하지 않다.

두 책의 기술에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아마도 도덕 수준이 낮은 소인(小人)이 자신의 도량으로 군자의 속내를 가늠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6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