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역사학자들에게 있어, 반경(盤庚) 천도의 가장 큰 공적은 아마 많은 사료(史料)의 보전일 것이다. 태무(太戊)의 부흥은 75년 부흥의 역사가 단지 몇 마디 평가로만 남아 있다. 반면 무정(武丁)의 59년 집정은 역사에서 ‘무정중흥(武丁中興)’으로 불리는데 거의 완전하게 은허(殷墟) 유적지에 보존되어 있다.
무정은 경건하게 여러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정은 신령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데 제물이 가장 많고 가장 복잡했다. 이는 후대 상왕(商王)과 비교해도 훨씬 복잡다단했다. 그가 사용한 희생 역시 가장 많고 또 가장 좋았다.
“은나라 사람은 신(神)을 존중해서 백성을 이끌어 신을 모셨다.” 군왕이 앞장서서 이끌었고 또한 전체 상조(商朝) 백성들을 동원해 신을 공경했다. 신을 제사지낼 때는 마치 신이 계시는 것처럼 공경했으며 제사는 적어도 마음을 바로잡는(正心) 역할을 한다.
“나라의 큰일은 오직 제사와 전쟁”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나라에서 가장 큰 2가지 일이 바로 제사와 전쟁이란 뜻이다.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에는 무정이 “신과 하늘의 뜻을 문의”한 이야기가 대량으로 기록되어 있다.
잘 선별된 거북 등껍질이나 소뼈에 구멍을 낸 후 약한 불로 구멍이 뚫린 곳을 달구면 조짐을 얻을 수 있다. 점복(占卜)업무를 주관하는 관리가 점을 친 이유와 길흉 및 점이 응험한지 여부등의 상황을 모두 원래 점복을 친 갑골문에 새겨 넣는다. 이렇게 기록된 갑골은 따로 보관되었다.
대외적으로 병력을 동원할 것인가 여부에서, 집을 새로 짓거나 심지어 생로병사 등에 이르기까지 무정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점복으로 하늘에 물어 하늘의 뜻에 따라 행동했다.
무정은 자신이 통솔하는 군대인 ‘삼사(三師)’를 조직했고 수십 차례 출정해서 기본적으로 원래 이탈했던 제후들을 모두 회복했고 또 상조의 영토를 훨씬 확장시켰다.
무정에게는 또 많은 부인이 있었다. 부인들의 수는 학자들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중국의 어떤 학자에 따르면 모두 67명이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121명이라고 하며 또 어떤 통계에서는 95명이라고 한다.
이들 부인(夫人)은 부속된 각 방국(方國)에서 시집온 것으로 일종 통혼(通婚)을 맺기 위한 혼인이었다. 방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조와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상조 입장에서 보자면 노동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었다. 무정의 이 아내들은 모두 대상(大商)을 위해 큰 힘을 발휘했는데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인 파종, 전쟁, 제사 등에 여러 부인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었다.
부인이 많으면 대개 자손이 많게 마련이다. 어떤 연구자에 따르면 무정의 자식이 모두 53명이라고 한다. 이 수는 더 늘어나는 추세인데 왜냐하면 최근 몇 년간 일부 유적지가 새로 발견되면서 갑골문도 끊임없이 해독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가문이 번창하고 영토가 확장되려면 관리자가 있어야 했다. 무정은 영토를 확장해 부인, 아들, 공신과 방국의 제후들에게 나눠주었고 이들은 자신의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상왕에 대한 주요 의무는 국경을 방어하고 정벌에 동참하며 조공하고 세금과 요역을 납부하는 것이다.
여러 부인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바로 무정의 부인 부호(婦好)였다.
무정은 아들 자궁(子弓)을 ‘사공(司工)’으로 삼아 여러 기술자들을 관리하게 했다. 여기서 공(工)이란 주로 수공업자를 가리킨다. 현대인들이 볼 수 있는 그런 아주 정교한 기구들은 모두 이들이 만든 것이다.
무정은 상업도 중시했다. 그는 중신을 파견해 무역을 관장하게 했다. 은허에서 출토된 한 갑골문 속 복사(卜辭)에는 “무인(戊寅)일에 내(內)에게 작(雀)이란 대신이 무역을 해도 되는지 점 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내는 점치는 사람, 작은 대신의 이름이다. 그런데 무엇을 매매했을까? 유감스럽게도 갑골문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은허에서 출토된 갑골문 중에 이런 한 가지 기록이 있다.
무정이 제사를 올리기 위해 천제(天帝)에게 점을 쳐서 묻게 했다.
“정사(丁巳)일에 쟁(爭)이란 복인이 점을 쳤는데 희생을 소 천 마리로 할까요? 소 천 마리와 사람 천명으로 할까요?”
한 차례 제사에 천 마리의 소를 사용했다는 것은 상조의 농업과 목축업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무정의 효성스런 덕은 부친에게서 백성들에게까지 이어졌고 상조 노인들은 극히 높은 대우를 받았다.
“무정 6년 경사(卿士) 부열(傅說)에게 명령해 좌학(左學)과 우학(右學)을 시찰해 노인을 봉양하게 했다.”
여기서 시학(視學)이란 우학과 좌학을 시찰한다는 뜻이다. 좌학은 일반 백성들이 머무는 곳이고 우학은 이전에 관료를 지냈던 노인들이 머무는 곳이다. 우학의 노인들은 귀족자제의 교사를 맡았고 또 정치에 관해 자문했다. 《예기‧왕제(王制)》에는 노인들의 생활에 대해 “은나라 사람들은 밥을 올리는 것을 예로 삼았다”고 했다. 또 흰 비단으로 만든 옷으로 노인을 모셨다.
무정은 100살까지 살면서 59년간 재위했다. 이때가 상조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로 인구도 많았고 영토도 광활했다.
감반(甘盤)의 정치
그렇다면 무정이 조정업무에 관할하지 않고 흉려(凶廬 시묘살이하는 초막)에서 3년을 보낼 때 크고 작은 모든 업무들은 어떻게 처리했을까? 여기서 큰일이란 우방과의 관계이고 작은 일이란 의식주행(衣食住行)에 관련된 것이다.
사실 이런 크고 작은 업무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보좌해줄 훌륭한 신하기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무정의 부친 소을(小乙)이 재위할 때 무정에게 감반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게 했다. 무정이 재위에 오른 후 “은에 거주하며 감반을 경사(卿士)에 임명했다”고 했다. 즉 자신은 도성인 은(殷)에 거주하면서 감반을 경사로 임명해 업무를 총괄하게 했다는 뜻이다. 새로운 왕은 시묘살이를 하면서 효를 지켰고 감반이 문무관원을 이끌고 조정을 다스렸다.
무정이 3년간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돌아왔으나 국정은 조금도 혼란하지 않았고 대권 역시 남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무정은 조금의 차질도 없이 국정을 이어받았다.
무정은 상복을 벗고 정상적으로 성대한 의식을 치른 후 정중하게 권력을 이양 받았다. 하지만 무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좀 무책임했다. 그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국가대사에 대해서는 아예 듣거나 물으려 하지 않았다.
무정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모두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대신들이 앞을 다퉈 무정에게 간언했다.
“아아! 아는 것을 명철(明哲)하다고 하니 명철한 사람이 실지로 규칙을 만드는 것입니다. 천자께서 오직 만방에 임금노릇을 하시면 백관들이 이를 받들어 본받으니 임금님의 말씀이 지상명령이 됩니다. 하지만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신하들이 명령을 받들 수 없습니다.”
감반 역시 무정에게 아뢰웠다.
“임금님께서 명령을 내리셔야 하는데 말씀을 하지 않으시면 모두들 따를 명령이 없습니다.”
무정 역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염려되어 글로 써서 자신의 뜻을 표현했다.
“하늘이 나로써 사방(四方)을 바르게 하시는데 나는 덕이 선왕들과 같지 않을까 두려워하노라. 이 때문에 말을 하지 않고 공손하고 침묵하며 도를 생각하노라.”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꿈에 하느님께서 내게 좋은 보필을 주셨으니 그가 나를 대신해 말을 할 것이다.”
이렇게 임금이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조정은 여전히 계속 이어졌다. 그럼 누가 백관을 통솔했을까? 당연히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센 감반이란 노신이 맡았다.
그러므로 감반은 무정에게 있어 스승이자 재상이었고 또 무정과의 관계도 아주 좋았다. 다만 세상을 떠난 것이 좀 빨랐다. 후대에 출토된 갑골문에도 무정이 그의 건강상태를 위해 점을 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참고문헌:
1. 《하상사회생활사(夏商社會生活史)》
2. 《갑골학일백년(甲骨學一百年)》
3. 《갑골학상사논종초집(甲骨學商史論從初集)》
4. 《예기정의》
5. 《상서정의》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