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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정술】 상(商) 30: 주왕의 허물

글/ 신전문화 중국역사연구모임

【정견망】

주왕(紂王)은 향락에 탐닉하고 어리석은 군주로 유명하다.

《사기‧은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주왕은 술을 좋아하고 음악에 빠졌으며 여자를 탐했다. 특히 달기(妲己)를 총애했다. 악사(樂師) 사연(師涓)에게 음탕한 음악을 새로 작곡하게 했고 북리(北里)라는 저속한 춤과 퇴폐적인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세금을 무겁게 매겨 녹대(鹿臺)를 돈으로 채우고 거교(鉅橋)를 곡식으로 가득 채웠다. 게다가 개와 말과 기이한 물건을 거둬들여 궁실을 가득 메웠다. 또 사구(沙丘)의 원대(苑臺 왕의 정원)를 확장해 들짐승과 새들을 잡아다 그 안에 가두었다. 조상이나 신령도 우습게 알았다. 사구에 수많은 악공과 광대를 불러 모으고 술로 연못을 만들며 고기를 매달아 숲처럼 만든 후 남녀들을 벌거벗게 하여 그 안에서 서로 쫓아다니게 하면서 밤새 술을 마셨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제후들이 배반하자 주왕은 형벌을 강화해 포락(炮烙)이란 법을 만들었다. 서백창(西伯昌), 구후(九侯), 악후(鄂侯)를 삼공(三公)으로 삼았다. 구후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어 주왕에게 바쳤다. 그런데 그녀가 음란함을 싫어하자 주왕이 화를 내며 그녀를 죽이고 구후도 함께 죽인 후 포를 떠서 소금에 절였다. 악후가 이에 완강히 따지면서 격렬히 변론하자 악후도 함께 포를 떠서 죽였다. 서백창이 이 소식을 듣고는 몰래 탄식했다. 숭후호(崇侯虎)가 이를 알고는 왕에게 고자질하자 주왕이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뒀다. 서백의 신하 굉요(閎夭) 등이 미녀와 준마를 구해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이 서백을 풀어주었다. 서백은 풀려나자 마자 낙수(洛水) 서쪽의 땅을 바치면서 포락형을 없애달라고 청했다. 주왕이 이를 허락하고 활, 화살, 큰 도끼를 주어 제후국들을 정벌하게 한 뒤 서방의 우두머리인 서백(西伯)으로 삼았다.”

여기서 ‘포락’이란 형벌에 대해서는 2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숯불로 달군 후 죄수더러 맨발로 그 위를 걸어가게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설명은 구리기둥을 불로 지진 후 죄인더러 그 위를 기어가게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기둥에 멈춰 있기란 아주 힘든데 미끄러지면 떨어져서 숯불에 타죽는다.

또 서백창, 구후, 악후가 주왕 시기 삼공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사료의 한계 때문에 삼공의 직권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 삼공이란 자신의 나라를 지닌 제후국의 군장(君長)으로 가장 존귀한 제후이자 상조(商朝)의 대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백은 유리에 감금되어 있던 기간에 아들의 고기로 만든 국을 먹었고 또 저 유명한 《주역》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의 부하들이 아름다운 미녀와 기이한 장난감 뛰어난 말 등을 구해 주왕에게 바치자 7년 후 주왕이 서백을 석방했다.

이처럼 《사기》의 기록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사마천(司馬遷)에게는 한 가지 역사 연구 방법론이 있는데 “대체로 학자들이 기록한 책은 매우 많지만 믿을 만한 것은 육예[六藝 즉 유가에서 말하는 육경(六經)을 말함]에서 찾을 수 있다. 《시경》과 《서경》이 비록 흠결이 있지만 요임금과 하대(夏代)의 일은 알 수 있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육예(六藝)라 하면 주조(周朝) 관학(官學)의 6가지 과목인 예(禮 예법), 악(樂 음악), 사(射 활쏘기), 어(御 수레몰기), 서(書 글쓰기), 수(數 수학)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사마천이 언급한 것은 공자가 가르친 6가지 과목을 말하는데 바로 한대(漢代) 이후 유생들이 경전으로 존중해온 육경(六經)──즉 《시경》, 《상서》, 《예기》, 《주역》, 《악경(樂經)》, 《춘추》를 통칭한 말이다. 나중에 《악경》이 산실되었기 때문에 후대에 오경(五經)으로 변했다.

사마천은 여기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문제를 언급하는데 바로 사료의 부족 문제다. 그가 상고 삼대(三代)의 역사를 서술할 때 본 문자기록은 아마 현대 역사학자들만큼 많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땅히 묻혀야 할 것(가령 갑골문이나 청동기 등)은 묻혔고 묻히지 않은 것이라 해도 전모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상고 삼대에 관한 전설을 들을 수 있었는데 현대 학자들보다 아마 훨씬 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는 이런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서문에서 “삼대(三代)를 대략적으로 추정”한다는 해결법을 제시했지만 문제는 때로 틀리게 추정했다는 것이다.

사실 주왕을 최초로 고발한 이는 서백 희창(姬昌)의 아들인 주(周) 무왕(武王)이었다. 그의 발언은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가장 직접적인데 지금까지도 《상서》〈목서(牧誓)〉에 남아 있다. 그가 언급한 주왕의 죄명은 사실 사마천이 기술한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상주왕을 정벌하기 전에 군사들에게 맹세하면서 무왕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상나라 왕은 오직 아녀자의 말만 듣고 멍청하게 제사지내는 일도 폐기하여 보답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종친들을 버려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오직 사방에서 죄가 많아 도망 온 자들을 높이고 우대하며 믿고 부려서 이들로 대부(大夫)와 경사(卿士)로 삼아 백성들을 난폭하고 잔학하게 대하며 상나라 마을(商邑)에 해악을 끼쳤다.”

무왕이 언급한 죄목은 1. 아녀자의 말만 따르고 2.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고 3. 친족을 임용하지 않으며 4. 죄인을 등용했다는 4가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것보다는 《사기》의 기록이 훨씬 더 풍부하다. 하지만 이치상으로나 시간적으로도 가장 가깝기 때문에 이 기록이 훨씬 더 믿을 만하다.

이것은 또 하나의 유명한 공안(公案)이 되어 역대로 모든 사람들이 주왕에 대해 불평하게 했다.

유가 경전 중에는 공자의 뛰어난 제자 자공이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주왕(紂王)의 불선(不善)함이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君子)는 하류(下流)에 처하는 것을 싫어하니, 하류(下流)에 있으면 천하(天下)의 악(惡)이 모두 그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명조(明朝)에 이르러 나필(羅泌)은 《걸주사다실실론(桀紂事多失實論)-걸과 주의 많은 일이 사실이 아님을 논함》에서 주왕의 죄는 걸왕의 죄와 거의 똑같아서 둘을 나누기 힘들다고 했다.

한편 민국 시기의 한 학자(역주: 고힐강을 말함)는 인내심을 갖고 사서에서 주왕(紂王)의 죄명에 대해 통계를 냈는데 죄명이 모두 70가지에 달했다. 최초 《상서》에서는 6가지였는데 전국시기에는 27가지, 서한시대 서적에서는 23가지로 증가했고 다시 동한시기에 1가지가 추가되었다. 동진(東晉)에 13가지가 추가되었다. 이처럼 상주왕의 이미지는 점차적으로 나쁘게 변해온 것이다.

그는 《주왕의 70가지 악행 발생 순서》란 글에서 “지금 전해지는 말들은 주왕의 악행이 누적되어 발전해 온 것이다. 시대가 가까울수록 주의 죄는 더욱 많아지지만 믿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다.

비록 이 학자의 이론이 경박하고 단순하며 고대를 무조건 의심하는 의고(擬古)사상과 또 마찬가지로 거칠고 비루한 진화론(進化論)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진지한 학자들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자료를 연구하려는 노력과 통찰에 대해서는 마땅히 정상을 참작해야 한다.

그럼 여기서 애초 주 무왕이 제기한 죄명은 4가지였는데 어떻게 5가지로 변했을까? 《상서》에는 또 상주왕(商紂王)에 대해 〈주고(酒誥)〉나 〈다방(多方)〉 등 주 무왕과 주공의 대화나 경고등을 기록한 편들이 있는데 여기에 〈목서〉에 언급하지 않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목서〉는 무왕이 원정에 앞서 군사들을 모아놓고 한 연설이라 흥분해서 한 가지를 잊었을 수 있는데 다섯 번째가 바로 폭음이다. 일찍이 아주 오래 전에 대우(大禹)는 “후세에 반드시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하고 이에 의적(儀狄)에게 더는 술을 빚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역사의 전개와 배치는 진실로 근엄하고 생생하다. 겉으로는 우연처럼 보이지만 모두 정말 명명백백한 것으로 한 막(幕) 한 막을 후인들에게 연기한 것이다.

《상서》에는 또 〈목서〉와 이름이 비슷한 〈태서(泰誓)〉라는 편이 있는데 〈태서(太誓)〉라고도 한다. 주 무왕이 상조를 멸하고 주조를 세운 후 이듬해에 맹진에서 열병하면서 한 연설이다. 여기에서도 주왕의 악행을 언급하는데 후인이 날조한 흔적이 많아 역사적으로 위작으로 인정된다. 최근에 청화간(清華簡)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이 편을 만든 위작자가 다른 편의 단락을 〈태서〉에 집어넣은 것이 발견되었다. 지금 사학계에서는 이미 그 내용을 신뢰하지 않기에 여기서도 이 자료는 무시하기로 한다.

참고문헌:
1. 《사기》
2. 《논어》
3. 《고힐강고사논문집(顧頡剛古史論文集)》
4. 《청화간재현상서일편(清華簡再現<尚書>佚篇)》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7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