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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이야기: 석법안(释法安)

목목(木木)

【정견망】

수(隋)나라 때 동도(東都 낙양) 보양도량(寶楊道場)에 석법안(釋法安)이란 승려가 있었다. 원래 성은 팽(彭)씨로, 안정(安定) 순고(鶉孤)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태백산(太白山) 구롱정사(九隴精舍)에서 살면서 참선으로 업을 삼고 누추한 음식에 남루한 옷으로 일생을 마쳤다.

수 문제 개황(開皇) 연간에 강도(江都)로 가서 진왕(晋王 역주: 훗날의 수 양제)을 만나려 했는데, 궁지기가 그의 몸이 작고 추하며 말이 경솔하다며 들여보내지 않았다. 날마다 궁문 앞으로 가서 아무리 타일러도 떠나지 않자 문지기는 시험 삼아 통과시켰다. 진왕이 불러들여 만나 보고는 오랜 친구처럼 대하며 곧 혜일사(慧日寺)에 머물게 했고 왕이 거동할 때에는 법안도 반드시 따르게 하였다.

왕이 태산(泰山)으로 행차했을 때, 가뭄이 든 때라 사방을 돌아보아도 바위뿐이요 물을 구할 길이 없었다. 법안은 칼로 돌을 찔러 물을 끌어내 왕에게 바쳤다.

왕이 매우 감탄하면서 물었다.

“어떤 힘이 이렇게 하게 했습니까?”

법안은 대답했다.

“대왕의 힘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을 따라 사막으로 들어가 니해(泥海)에 이르렀을 때에는, 법안이 일어날 변괴를 모두 예견하고 미리 피하게 하여 다 무사할 수 있었다.

나중에 태산 신통사(神通寺)로 갔을 때 스님이 찾아와 단월되기를 청하므로 법안은 왕에게 말하자 왕은 손수 절의 담장에 글을 써서 큰 외호(外護)가 되었다.

처음에 왕과 함께 골짜기로 들어갔다. 그 때 어떤 스님이 해어진 옷을 입고 흰 나귀를 타고 왔다. 왕이 물었다. “누구입니까?”

법안이 대답했다.

“저 사람은 낭공(朗公)입니다. 신통사를 창건했기 때문에 일부러 맞이하러 온 것입니다.”

절에 이르러 또 한 신(神)을 보았는데, 커다란 몸집에 강당 위에서 손으로 치문(鴟吻)을 집고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왕이 또 누구냐고 물었다.

법안이 대답했다.

“태백산 신입니다. 왕을 시중드는 것입니다.”

그 뒤의 온갖 기행(奇行)은 다 자세히 적을 수 없다.

수 양제 대업(大業) 초년(605) 왕은 법안을 더욱 존중했다. 법안은 위엄이 있었으므로 왕공(王公)들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항상 신(神)처럼 받들었다. 또 명산(名山)으로 다니면서 숨어 사는 뛰어난 이들을 부르니 곽지변(郭智辯)ㆍ석지공(釋志公)ㆍ등공(鐙公)ㆍ배도(杯度) 등이 한꺼번에 다 모였다. 혜일도량(慧日道場)에서는 2천여 명의 도예(道藝)가 있어 4사(事)의 공양을 받았는데, 법안이 그 수장이었다.

또 동도(東都)에는 보양도장(寶楊道場)을 세워 오직 법안의 한 무리만이 거기서 수업했다.

대업 11년(615) 봄 사방에 어려움이 많았는데,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나니, 향년 98세였다.

법안이 목숨을 마치려 할 때 임금 앞에 나아가 이렇게 말하였다.

“법안이 죽은 뒤 백 일에 궁중에서 불이 일어날 것이니 부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한식(寒食)날이 되어 기름이 끓으면서 위로 불이 붙었는데, 밤중이라 문이 닫혀 있어 3원(院)의 궁인(宮人)들이 한꺼번에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임금은 그것을 괴상히 여기지 않고 관(官)을 태백산으로 보내고 관아에서 장례비용을 대게 했다.

자료출처: 《법원주림》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481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