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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기개(千古奇丐): 무훈의 일화

【정견망】

무훈(武訓 1838-1896년)은 청나라 말기의 교육자이자 중국에 근대식 학교를 건립한 선구자다. 원래 고향은 산동성 당읍현(堂邑縣 지금의 산동성 관현) 유림진(柳林鎭) 무장(武莊)사람이다.

30여 년간 동냥과 온갖 힘든 일을 하면서 끊임없이 노력해 3곳에 의학(義學: 학비를 받지 않거나 아주 저렴하게 받아 가난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도록 설립한 일종의 자선 학교)을 설립했고 학전으로 3백여 묘의 밭을 샀으며 학자금으로 만관(萬貫)을 모았다. 이는 중국은 물론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업적이다. 한 평범한 거지가 가장 평범하지 않은 행동으로 청사에 이름을 남겼다. 중국 역사상 거지 신분으로 정사(正史)에 기록된 인물은 오직 무훈뿐이다. 때문에 그를 가리켜 ‘천고기개(千古奇丐 천고에 뛰어난 거지)’라 한다.

워낙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원래 이름도 없었고 무씨 집안의 일곱째라는 뜻에서 ‘무칠(武七)’이라 불렸다. 나중에 청나라 조정에서 그의 공을 기려 ‘훈(訓)’이란 이름을 하사한 이후부터 ‘무훈(武訓)’이라 불렸다. 말하자면 무훈은 조정에서 하사한 이름이다.

무칠은 어려서 집이 너무 가난했지만 독서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늘 부유한 집 아이들을 따라 사숙(私塾 서당과 같은 사설학교) 입구까지 가서 몰래 남들이 책 읽는 소리를 듣곤 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가 입은 옷이 남루한 것을 보고 모두들 그를 비웃고 모욕하거나 심지어 때리거나 욕을 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날 그가 용기를 내어 문을 열고 들어가 사숙 선생님에게 자신의 입학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사숙 선생은 그를 동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모욕했다.

“너 이 거지 녀석이 어떻게 여길 들어왔을까? 빨리 꺼지지 않고 뭘 훔쳐가려는 것이냐?”

그러면서 계척(戒尺 옛날 서당에서 학동들을 벌줄 때 쓰던 목판)을 들고 그를 쫓아냈다. 이때부터 무훈은 더 이상 공부하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무훈이 일곱 살 때 부친이 사망하자 가정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는 이때부터 모친을 따라 다니며 걸식하면서 살아야 했다. 무훈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모친에 대한 효성이 대단해서 매번 먹을 만한 음식이 생기면 모두 모친에게 드렸고 자신이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열다섯 살 때 이모부 장(張)씨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비록 미성년이었지만 그는 아주 충직하고 근면하게 일했다. 이모부는 친척이라고 우대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다른 성인 머슴들보다 더 엄하게 다스렸고 힘든 일만 있으면 그를 찾았다. 무훈은 날마다 바쁘게 일하며 소나 말처럼 살았다. 하지만 이모부는 그에게 임금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밥만 먹여준 것만으로도 은혜를 베풀었다고 여겼고 늘 때리며 모욕했다. 무훈은 늘 참아냈다. 사람이 너무 충직하고 온순하다 보니 주변사람들이 그를 바보라 비웃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 무훈은 이(李)씨 성을 가진 어느 거인(擧人 역주: 과거 2차 시험인 성시省試에 합격한 사람을 가리키며 일종의 예비관리로 간주된다)의 집에 들어갔다. 무훈은 이(李)거인 집 머슴으로 있으면서도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게다가 그는 글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많은 속임수를 당했다. 한번은 무칠의 누나가 편지와 함께 돈을 넣어 인편에 전달하게 했다. 이 거인은 그가 글자를 모르는 것을 알고 편지만 건네주고 돈은 스스로 착복했다. 나중에 무칠이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하자 시치미를 떼면서 한바탕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어느 해 제석(除夕 섣달 그믐)에 대련(對聯)을 붙이다가 글자를 몰라 위아래 연을 반대로 붙였다. 화가 난 이 거인은 그를 심하게 때렸고 이후로는 저녁을 먹지 못하게 했다. 중국 고대에 설을 쇠는 것은 전적으로 섣달그믐 저녁을 중시했다. 평소에는 아무리 고생이 심할지라도 이날 저녁만은 배불리 잘 먹였고 또 아이들도 이날만큼은 함부로 때리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하지만 무훈은 이해 제석에도 저녁밥을 먹지 못했다. 또 밤에 잠도 자지 못하고 뜰에 서서 자는 벌을 받아야 했다.

이 해에 모친의 병이 심해지자 무훈이 거인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했다. 이미 3년을 일했기 때문에 품삯이 천팔백 문이 되었다. 이전에 4차례에 걸쳐 약 300문을 받았지만 아직 받아야할 돈이 1천문이 넘었다. 하지만 거인은 장부를 가져와서는 자신은 이미 돈을 다 지불했기 때문에 더 이상 줄 게 없다고 주장했다. 무칠은 어디라도 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하소연할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글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의 고통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결국 무훈은 모함을 당해 거인의 집에서 죽도록 얻어맞고 문밖으로 내쫓겼다. 이후 무장촌의 어느 낡은 사당에서 3일간 혼수상태로 있었다. 처음에는 오직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나중에 자세히 생각해보았다.

‘내가 이런 고통을 겪은 것은 바로 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반드시 글자를 모르는 가난한 아이들이 배울 수 있게 할 것이다!’

그의 주변에는 자신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많았는데 만약 공부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이런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이에 그는 직접 의학(義學)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 일단 목표가 생기자 무훈은 평생을 고생하더라도 끝내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무일푼의 맨몸으로 의학을 세우는 것은 전무한 일이라 그 어려움은 몹시 컸다.

거지의 몸으로 자신의 명예를 구하거나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거대한 뜻을 품었으니 이때부터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무칠은 자신의 꿈을 실천하기 위해 21세 때부터 행동에 나서 각지를 떠돌며 돈을 모았다. 그는 닥치는 대로 남의 집 품팔이를 했고 이와 동시에 틈나는 대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구걸을 했다. 매번 구걸할 때마다 좀 쓸 만한 음식이나 옷을 얻게 되면 나중에 이를 돈으로 바꿨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늘 남루한 옷을 걸쳤으며 매일 2개의 거친 찐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는 때때로 강호에 떠돌아다니는 곡예사들처럼 자신의 몸에 송곳을 찌르거나, 칼로 머리 치기, 큰 솥을 들어 올리는 묘기 등을 선보여 구경꾼들의 돈을 모았는데 심지어 더러운 벌레나 뱀, 전갈을 먹거나 돌덩이와 기와를 집어삼키기도 했다. 이렇게 모은 돈이 어느 정도 쌓이자 그는 자신이 모은 돈을 큰 상인에게 맡겨 이자를 받으며 돈을 불렸다.

이리하여 무칠에게는 점차 큰돈이 쌓였고 그는 이 돈으로 땅을 사서 장차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댈 학전(學田)을 마련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자 무칠은 제법 많은 돈을 모았음에도 여전히 아끼며 구걸에 나섰다. 무칠은 많은 사람들의 모멸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산동, 하북, 하남, 강소 등 여러 곳에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날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는 시와 유사하지만 시는 아니고 독특한 특색과 내용 및 각운(脚韻)이 있었다. 내용은 전부 의학설립과 관련이 있었다. 남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그는 늘 노래를 불렀고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늘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머슴살이 하며 남에게 속으니
걸식하며 자신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네
내가 걸식한다고만 보지 마시오
조만간 의학을 꼭 세우리니

扛活受人欺,
不如討飯隨自己,
別看我討飯,
早晚修個義學院。

그가 이렇게 돈을 모은 목적은 오직 의학 설립에 있었다. 때문에 무훈은 이를 고생으로 여기지 않았고 늘 기쁘게 노래하면서 즐겁게 살았다.

똥 푸기 잡초 제거
나귀 대신 찾아오네
밤일도 상관없고
돈이 많고 적음도 따지지 않네

出糞,鋤草,
拉驢子來找,
管黑不管了,
不論錢多少。

돈을 주면 밭을 갈아요
의학 설립 어렵지 않네
나귀 되고 소가 되니
의학 설립에 걱정 없다네

給我錢,我犁田,
修個義學不費難。
又當騾子又當牛,
修個義學不犯愁。

하지만 무훈이 첫해에 모은 돈은 매형에게 사기당해 돈을 전부 날렸다. 이에 화가 난 그는 밥도 먹지 못했고 입에서는 흰 거품을 토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난 후 생각을 고쳐먹기 시작했다.

돈을 모으기 위해 무훈은 머리카락까지 잘랐다. 물론 머리카락을 한 번에 다 팔진 않았고 일부는 남겨두었다. 즉 이쪽은 깎고 저쪽은 남겨두었는데 의학 설립을 위해 어릿광대(小丑)처럼 분장하고 구걸할 때도 자신을 광대처럼 행동했다.

그가 늘 의학을 입에 달고 고정적인 직업도 없이 동서를 유랑하며 입만 열면 의학을 말하자 주변 사람들은 그를 비웃으며 의학증(義學症)이라 불렀다. 의학에 미친 정신병자란 뜻이다.

하지만 무훈은 이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고 노래로 대답했다.

의학증 화를 내지 않네
사람을 보면 공경히 예를 올리네
돈을 주면 목숨을 살리니
의학설립은 만년에도 흔들리지 않아라

義學症,沒火性,
見了人,把禮敬,
賞了錢,活了命,
修個義學萬年不能動。

또 동냥할 때면 인색해서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욕하거나 쫓아내는 사람도 만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 무훈은 이렇게 노래했다.

동냥하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아요
선량한 사람 절로 있어 밥을 준다네
어르신 아저씨 화내지 마세요
당신이 화내지 않으면
그때 제가 나갈께요

不給俺,俺不怨,
自有善人管俺飯。
大爺大叔別生氣,
你幾時不生氣,
俺幾時就出去。

무훈은 의학을 세우기 위해 동냥한 것 중에 조금이라도 좋은 물건이 있으면 자신이 먹지 않았다. 대신 풀뿌리를 먹거나 부패해서 곰팡이가 핀 그런 음식들만 먹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잡다한 것을 먹으며 밥으로 삼네
돈을 아껴 의학을 설립하려네
잘 먹는 것이 좋다 할 수 없으니
의학 설립만이 좋은 일이라네

吃雜物,能當飯,
省錢修個義學院。
吃的好,不算好,
修個義學才算好。

무훈은 날마다 밤늦게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그는 남들이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는 가장 힘들고 더러운 일을 골라서 했다. 가령 한여름 뙤약볕 아래 곡식을 수확하거나 똥을 푸는 일 등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했다. 이 모든 것은 물론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것이다.

29세가 되자 그는 약 10년간 모은 돈으로 45무(畝)의 밭을 샀다. 그런데 지대가 낮아서 소금피해를 입기 쉬운 곳이었다. 그가 이런 불리한 조건의 땅을 산 이유는 이런 토지는 땅값이 쌌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오직 학교를 세울 수만 있다면
소금모래라도 두렵지 않네
염분이 줄고 모래를 골라내면
3년 후에는 염분모래 사라지네
오직 학교를 세울 수만 있다면
움푹 꺼진 땅이라도 두렵지 않네
물이야 흘려보내고 흙을 쌓으면
3년 후에는 구덩이도 평평해지네

只要該我義學發,
買地不怕買堿沙;
堿也退,沙也刮,
三年以後無堿沙。
只要該我義學發,
要地不怕要大坑;
水也流,土也壅,
三年以後平了坑。

그가 38세 되던 해 산동 지방에 큰 가뭄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 그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40포대의 수수를 사서 많은 이재민들을 구휼했다. 하지만 그의 친형이 직업도 없으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하자 단 한 푼도 빌려주지 않았다. 그는 이 돈은 전부 학교를 세우기 위한 것이지 우리 집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전부 학교 돈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 이렇게 노래했다.

가족도 돌보지 않고 친구도 돌보지 않으며
나는 여러 곳에 학교를 세우리라

不顧親,不顧故,
義學我修好幾處。

이처럼 무훈은 이재민을 구휼하는 일에는 과감하게 돈을 썼지만 조카와 형이 먹을 게 없다면서 돈을 요구할 때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훈의 고향 마을에 노파와 두 며느리 등 여자들만 사는 집에는 10무의 땅을 주었다. 옛날에는 집안에 일하는 남자가 없으면 생활이 아주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좋아요 이 사람은 좋아요
그녀에게 10무를 줘도 불만이 없어요.
이 사람은 효부에요 이 사람은 효부에요
노인을 봉양하도록 10무를 줬어요.

這人好,這人好,
給她十畝還嫌少。
這人孝,這人孝,
給她十畝爲養老。

이렇게 다년간의 고생을 통해 무훈은 꽤 많은 돈을 모았다. 그는 같은 고향의 양수방(楊樹芳)이란 인물이 정직하고 명성이 아주 좋아서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찾아가 자신의 돈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려 했다.

무훈은 무작정 그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 꿇어앉아 주인을 만나게 해줄 것을 청했다. 옛날에 거인(擧人)은 현령(縣令)을 만날 때조차 무릎을 꿇지 않을 정도로 신분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일반 백성이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 헤진 옷을 입은 거지가 찾아와 주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으니 그 집 하인들이 상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훈은 포기하지 않고 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이틀을 기다렸다. 결국 그의 정성에 감동한 양 거인이 그를 도와 의학을 설립하기로 했다. 그는 단순히 그가 모은 돈을 관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돈을 보탰다.

이렇게 30년이 지난 광서(光緖) 14년(1888년) 무칠은 자신이 모은 4000여 꾸러미의 돈을 투자해 당읍현 유림진 동문(東門) 밖에 ‘숭현의숙(崇賢義塾)’을 설립했다. 마침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자신의 소중한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는 학교를 설립한 후 우수한 교사를 모집하기 위해 직접 학문이 뛰어나다고 소문난 진사(進士)나 거인(擧人)들을 찾아다니며 무릎을 꿇고 의숙의 교사가 되어줄 것을 청했다. 또 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일일이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며 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소중한 자제들을 자신의 학교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하여 약 50여 명의 학생을 모집했으며 학비는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학교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무칠이 소유한 학전(學田)에서 충당했다.

이후 매년 새 학기가 시작될 때면 무칠은 모든 선생님들께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고 다음에는 학생들에게도 일일이 절을 올렸는데 이런 의식이 수년간 지속되었다.

무칠 자신은 비록 까막눈이었지만 선생님을 몹시 공경했으며 심지어 신(神)을 모시는 것보다 더욱 공손했다. 매번 선생님들이 식사를 할 때면 그는 문 밖에 시립해 머리를 숙이고 조용히 음식을 날랐으며 선생님들이 식사를 끝마친 후에야 비로소 남은 음식으로 자신의 배를 채웠다.

그는 평소 늘 의숙 이곳저곳을 살피며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선생님을 볼 때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올렸고 일시적으로 나태한 선생님을 보면 역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앞으로는 열심히 분발해주실 것을 청했다. 장난을 치거나 건성으로 공부하는 학생을 보면 그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열심히 공부할 것을 권고했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성심으로 대하자 의숙의 선생님들과 학생들은 모두들 가르치고 배우는데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학문에 성취를 이룬 인물들이 날로 늘어났다.

이후 무칠은 인근 사찰과 관청 및 신사(紳士)들의 도움을 얻어 1890년 관도현(館陶縣) 양이장(楊二莊)에 제 2학교를 설립했고, 1896년에는 임청현(臨清縣 지금의 임청시) 어사항(禦史巷)에 제 3학교를 설립했다. 무칠의 의로운 행동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졌고 나중에는 청나라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그의 행동을 높이 표창하고 특별히 ‘훈(訓)’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광서 22년(1896년) 4월 23일 무훈은 임청현 어사항 의숙 옆에서 학동(學童)들이 낭랑히 책을 읽는 소리를 들으며 미소를 띤 채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의 시신은 숭현의숙 동쪽에 묻혔고 당읍, 관도, 임청 세 현의 모든 관원들과 신사를 포함한 만 명이 넘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중국 역사상 거지의 신분으로 정사(正史)에 기재된 인물은 아마도 그가 유일할 것이다. 무훈은 평생 한마음 한뜻으로 학교를 잘 운영하는 것만 생각했으며 심지어 아내를 맞이하거나 자식을 낳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가난한 아이들이 학비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 무훈의 일생은 그 후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찬양을 받았다. 1950년에는 그의 일생을 그린 ‘무훈전’이란 영화가 만들어져 중국 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산동 순무(巡撫) 장요(張曜)가 그의 의로운 행동에 대해 듣고는 특별히 그를 불렀다. 무훈은 걸어서 순무관아가 있는 제남부(濟南府)까지 갔고 순무를 볼 때도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구걸할 때 입던 헤진 옷을 입은 채 등에는 전대를 메고 손으로는 연신 실을 감고 있었다.

순무는 그의 진실하고 순박한 모습에 탄복했고 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무칠에게 아직 정식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듣고는 ‘훈(訓)’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또 은 200냥을 상으로 주고 의학이 소유한 전답에 대한 세금과 요역을 면제하라고 명령했다.

무칠은 50이 훨씬 넘은 나이에 비로소 자기 이름을 갖게 되었으니 산동 순무가 하사한 이름이 바로 무훈이었다. 여기서 훈(訓)이란 이끌고 가르친다는 뜻으로 아동교육에 대한 그의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산동 순무는 또 광서제(光緒帝)에게 주문을 올려 무훈에게 ‘낙선호시(樂善好施-선행하고 베풀기를 좋아한다는 의미)’란 편액을 하사하게 하고 조정에서 ‘의학정(義學正)’이란 명호를 수여했으며 황마괘(黃馬褂 황실에서 하사한 노란색 마고자)를 상으로 주었다. 과거에 황제가 개인에게 직접 무언가를 하사한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영광이었다. 게다가 일개 거지에 불과한 무훈에게 이런 상을 내린 것이다.

또 조정에서 수여한 ‘의학정(義學正)’이란 명호에는 병을 뜻하는 疒이 사라졌다. 원래 학정(學政)이란 관직명으로 지금으로 치면 지방 교육감에 해당한다. 그러니 무훈에게 하사한 의학정이란 명호는 아주 영예로운 호칭이며 게다가 황제가 직접 하사했으니 일반 ‘학정’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무훈은 이 성대한 수여식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알다시피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을 때는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무릎을 꿇고 받아야 한다. 그런데 무훈은 원래 학생이든 교사든 가장이든 누구에게나 무릎을 잘 꿇던 인물이었지만 황마괘를 받을 때만은 꿇지 않았다. 이는 황제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 그는 대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걸까?

의학정 이런 벼슬 필요 없어요.
황마괘 이런 것도 쓸모 없어요.
의학 설립은 만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아요.

義學正,不用封。
黃馬褂,沒有用。
修個義學萬年不能動。

1896년 4월 23일 무훈은 어사항(禦史巷) 의숙에서 숙환으로 사망하니 향년 59세였다. ‘청사(清史)’의 기록에 따르면 “무훈은 병이 위급한 상태에서도 여러 학생들이 책 읽는 소리를 듣고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웃었다.”고 했다. 무훈은 이렇게 웃으면서 죽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들이 낭랑하게 책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이는 그의 일생에 대한 가장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한평생은 헛되게 산 게 아니었다. 고생스레 걸식하며 의학을 설립해 가난 때문에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에게 공부할 수 있다는 소망을 실현시켜 주었다. 때문에 그의 내심에 부끄러움이라곤 전혀 없었다. 말하자면 그는 한평생 양심에 꺼리는 일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임종할 때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었다. 사실 이렇게 하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다. 하지만 무훈은 해냈다.

이후 청나라 조정에서는 무훈의 업적을 국사관(國史館)에 보내 그에 관한 전(傳)을 쓰게 했다. 중화민국 시기에 들어와서는 북양(北洋)정부가 무훈의 사적을 열전의 형식으로 ‘청사고(清史稿)’에 편입시켰다. 중국 정사(正史) 역사상 최초로 거지 열전이 탄생한 것이다.

나라에서는 그의 묘를 수리하고 사당과 비석을 세워주었으며 무훈의 업적은 세인들의 존중과 탄복을 받았다.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를 기리는 글을 지었고 전국적으로 무훈이란 이름이 들어간 학교가 여러 곳에 생겨났다. 나중에 동북(東北)에서는 또 무훈전(武訓傳)이란 영화까지 찍었다.

하지만 다시 10여년이 지난 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무훈의 묘가 파헤쳐져 시신이 불탔고 무훈사와 한백옥(漢白玉)으로 만든 무훈의 조각상 및 ‘의학정(義學正)’이란 편액이 모두 파괴되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625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