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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이야기: 명나라 사람이 왕중양을 만나 검술을 배우다

덕혜(德惠)

【정견망】

주지하다시피 왕중양(王重陽)은 도교 전진파(全真派)의 창시자로, 본명은 왕중부(王中孚), 자는 윤경(允卿)이다. 나중에 왕세웅(王世雄)으로 개명했고, 자는 덕위(德威), 도를 닦은 후에는 다시 왕철(王喆)로 개명했고 자는 지명(知明), 도호가 중양자(重陽子)다. 이 이름이 널리 알려져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그를 왕중양이라 부른다.

그는 북송(北宋) 말기 및 금(金)나라 때의 유명한 수도인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금나라 대정(大定) 10년(1170년)에 이미 선서(仙逝 신선이 되어 세상을 떠남)했다. 그런데 명나라 때 고서 《회원(獪園)》에는 그가 다시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명나라 가정(靖年) 연간(1522~1566년)에 성이 왕(王)씨인 서생(書生)이 있었다. 자호를 ‘단계생(丹谿生 역주: 단의 계곡에서 출생했다는 뜻으로 수도에 뜻이 있다는 의미)’이라고 불렀고, 명산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도가(道家)의 선술(仙術)을 좋아하여 세상을 피해 은거할 생각을 자주 했다.

한 번은 그가 가을이 깊을 때 우연히 계곡에 들어갔을 때, 경치가 매우 좋았고, “숲과 골짜기가 깊고, 오솔길이 그윽하여” 자신도 모르게 빠져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었고, 그는 아예 산을 올라가 탐험을 해보기로 했다. 십여 리를 가자, “끊어진 절벽과 계곡”에 다다랐는데, 그 안의 풍경은 더욱 아름다웠고, “물이 흐르며 꽃이 피고, 바람 기운은 봄과 같은” 순수한 자연의 경치가 나타났으며 인가는 없었다.

왕생은 계속 탐험하다가 갑자기 절벽 깊은 곳을 발견하였다. “동굴 입구 같은 것이 숨어 있는 듯”했다. 왕생은 그 길흉을 모르고 동굴 문밖에서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홀연히 동굴 속에서 나는 코 고는 소리를 듣고 풀을 헤치고 훔쳐보니 흰 수염이 난 노옹(老翁)이 바위를 베고 누워 있었다. 코고는 소리가 천둥과 같았고 생김새가 기이하며 의관, 지팡이, 표주박 등이 선가의 차림이었다. 왕생은 자신이 본 흰 수염의 노옹이 선인(仙人)임을 알고 공손히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흰 수염 노옹이 깨어나자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흰 수염 노옹은 들깨 밥을 주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신선을 믿지 않는데 자네는 여기까지 모험을 할 수 있다니 정말 가르칠 만하구나. 자네의 7대 조상이 도교 전진파의 선인 왕중양임을 아는가?”

왕생이 대답했다.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친족이 쇠잔해서 조상님의 종적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자 노옹이 말했다.

“내가 바로 왕중양, 왕철이다. 네가 도를 이렇게 좋아하니 내년 8월 15일 중추에 서촉(西蜀) 비파봉(琵琶峯)에서 나를 기다리거라. 오늘 나는 이미 천상의 남궁(南宮)의 여러 진군(真君)들이 이곳에 모이기로 약속했다. 그들의 호법 기마병들이 곧 올 것이다, 너는 아직 범부이므로, 몸의 더러움이 가시지 않았으니, 빨리 떠나지 않으면 선인의 질책을 받을 것이다. 너는 빨리 돌아갈 길을 찾아 나가라, 늦으면 호랑이와 늑대가 곧 올 것이니,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그래서 왕생은 공손히 절을 하고 떠나 비틀거리며 급히 산을 내려갔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뒤에서 퉁소에서 나오는 우렁찬 음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고, 그 소리는 구름 끝까지 닿는 듯 했다. ‘여러 신선들이 동굴로 간다’고 생각해서 더욱 서둘러 갔다. 5일 후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왕생은 집안 어른들에게 가르침을 청하여, 비로소 그의 조상 중에 과연 왕중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자신이 선인 왕중양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왕생은 더욱 선술을 갈구했다.

왕생은 왕중양이 준 들깨밥을 먹은 후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고 얼굴이 점점 젊어지자 이듬해 추석 무렵 가족과 헤어지고 배를 타고 사천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파봉이 어디 있는지 몰라 고민하던 중 문득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누군가가 칠언고시(七言古詩)를 낭송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에 비파봉이 언급되는 것을 듣고 급히 물어보니 “그것은 무산(巫山) 십이봉의 하나”임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최근 자료를 찾아보니 현대인들이 말하는 ‘무산십이봉’에는 비파봉이 없었다.

그렇다면 비파봉은 대체 어디이까? 《방여승람(方輿勝覽)》에는 “비파협은 무산에 있는데 마치 비파처럼 생겼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천총지》에는 “비파협은 현 관아 서쪽에서 강을 끼고 양안을 마주하고 있어 비파봉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가련한 십이봉 외에 산발적인 백만 봉이 있다”는 말에서 무산에서 비파봉의 지명도는 무산 십이봉 다음임을 알 수 있다. 즉, “무산십이봉 중 하나”라는 대답이 정확하진 않지만 비파봉의 위치를 말해준다. 왕생은 비파봉이 있는 곳을 알고 마음을 놓고 산천 명승지를 둘러보러 왔다가 무산에 이르자 여러 사람과 작별하고 배에서 내려 비파봉으로 직행했다. 마침내 8월 14일 비파봉 정상에 올라 노숙봉 정상에 올라 선인의 대가(大駕 큰 수레)가 왕림하길 기다렸다.

다음날 날이 밝을 무렵, 왕생은 과연 멀리서 흰 수염의 왕중양이 “하늘에서 학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참배했다. 왕중양은 그가 먼저 온 것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훌륭하구나. 하지만 너는 골격이 완성되기 전이라, 인연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네. 금생에는 그저 검선지술(劍仙之術)을 배울 수 있고, 인간 세상을 놀러 다닐 수 있다네. 나는 네 스승이 아니고, 네 스승은 청구자(青丘子)인데, 지금 무당산에 있으니 돌아가거든 찾아보아라. 반드시 그 진전(真傳)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왕생은 왕중양의 말을 듣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떠났는데 떠나기 전에 여쭤보았다.

“청구 선생이 무당산 어느 봉에 계신지 자세히 알지 못하니, 선생께서 부디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왕중양이 대답했다.

“여섯 그루 소나무 아래 초가집이 그가 머무는 곳이다.”

왕생은 산을 내려온 후 배를 타고 호북 무당산으로 향했다. 하루 밤낮을 거쳐 강릉, 즉 형주에 이르렀고, 이어 양양까지 배를 타고 가서 무당이 거의 도착하자 배에서 내려 무당산으로 가서 무당산에 올라 소나무 여섯 그루가 있는 곳을 사방으로 유심히 찾아보았다.

마침내 저녁에 어느 산 바위 앞에 6그루의 푸른 소나무가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아래 마당에 초옥이 몇 개 있었다. 연기와 덩굴이 사방에 에워싸고, 좁은 길이 약간 뚫려 있었다.

왕생은 험한 산길을 따라 마침내 마당에 도착하여 한참 동안 공손히 문을 두드렸고, 마침내 어떤 도동(道童)이 나와 그를 데리고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왕중양이 말한 청구자의 거처임을 깨닫고 절을 한 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청구 선생은 ‘수려한 머리카락, 커다란 눈썹, 나무에 기대어 포효하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청구자가 물었다.

“자네 조상인 왕중양이 보내서 왔는가?” 그렇다고 하자 왕생에게 스승을 모시는 예를 행하게 하고 이어서 목욕을 시키고 암자 뒤 깨끗한 당(淨堂)에서 일하게 했다. 당 안에 높이가 수 척 남짓한 화로가 있었는데 둘레가 단단히 봉해져 있었으며 자색 불꽃이 피어 숲과 골짜기를 비추었다. 난로를 지키고 불을 보태어 장작을 더하고 줄이는 일이니 함부로 떠나서는 안 되었다.

낮에는 옥녀(玉女)가 걸쭉한 연고 한 통을 들고 솥에 던지고 저었는데 솥 안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났다. 밤중에 푸른 옷의 두 동자가 걸쭉한 연고를 들고 와서 같은 방법으로 하니 여전히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왕생은 두 명의 옥녀, 두 명의 청동들과 번갈아 당직을 서게 되었는데, 왕생은 이따금씩 솥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상대방은 모두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으나 청구자는 이미 왕생(王生)이 의문을 제기한 일을 알고 화가 나서 수행자로서의 깨달음이 너무 낮다고 생각해 내쫓으려 했다. 동문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왕생을 위해 용서를 청하자 청구자는 화를 가라앉히고 왕생이 계속 남아 수행하도록 허락했다.

왕생은 더는 질문하지 않았다. 사부가 준비한 것은 무엇이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점차 사부에 대한 완전한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다.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고, 더 이상 어떤 의문이나 질문이나 호기심, 불만도 없었다.

날이 얼마가 지났는지, 마침내 솥 안의 물건들이 마침내 단련되었는데 일종의 금빛 액체였다. 그들이 이 금색 액체를 추출하여 달아보니 600여 근이었다. 그것을 둘로 나누고, 7~8근씩 나누어 큰 반석에 넣어 빻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쉬며 일하자 쇠붙이가 점점 얇아져 쇳조각이 되었다.

갑오일과 병오일을 선택하여 6개의 검을 만들어 절벽 아래에 매달아 폭포 물로 튀기며 해와 달의 빛에 비추었다. 한 달 가량 지나자 검질이 부드러워졌다. 이 여섯 개의 검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청구자는 그 중 하나를 왕생에게 하사했다.

한 동자가 법술(法術)을 부려 왕생의 머리 뒤와 팔 사이를 열게 하여 그 안에 검을 숨겼는데, 그 과정에서 왕생은 조금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다. 다음으로 청구자는 왕생에게 ‘칠일간 재’를 지내게 하고, 이어서 ‘검을 쓰는 비밀을 다 전한’ 후, 사천 청성산에 초막을 짓고 고생스럽게 수련하게 하고, 검술을 함부로 쓰지 말라고 경고하며, 특히 절대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나머지 다섯 자루의 검은 청구자가 하나 갖고 옥녀 두 명과 청의 동자 두 명이 각자 한 자루씩 가졌다. 그 후 왕생에게 하산하라고 했다.

왕생은 청성산에서 1년 동안 고생스럽게 수련한 후 성공을 거두었고, 무당으로 돌아와 스승에게 감사드리려고 했지만, “집은 그대로 있었지만, 문은 잠겨 있고, 아무도 없었다”.

산속의 도사에게 물어보니 청구자가 떠난 지 1년이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생은 통곡하며 청성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왕생이 형남(荊南)을 지날 때 청구자가 거지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보고 그도 따라서 그 속에 섞여 천하를 떠돌다가 종적을 감췄다.

대대로 전해지는 《단계생주검경(丹谿生鑄劍經)》이라는 책이 있는데, 아쉽게도 25쪽만 남아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청구자가 왕생에게 준 고본(古本)이라고 하며, 누군가 이 검경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청구자에 대해 어떤 사람이 탐구한 바에 따르면, 세속에서는 ‘청구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과거 무당산에 은거하여 천하를 누빈 지 이미 오래되어 그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료출처: 명 전희언(錢希言)의 《회원(獪園)》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9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