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顏雯)
【정견망】
당 태종과 송 태조 두 황제는 중국에서 태평성세를 열었고, 비록 인간 세상이 번영했을 뿐만 아니라 속세를 벗어나길 모색하는 수련문화 역시 사람들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고관귀족이든 서민이든 산속에서 여러 해 동안 수도를 하다가 기이한 술법이나 어떤 신통법력을 연마해 낸 사람을 다소 듣거나 만난 적이 있다. 당송(唐宋) 교체 시기 조대(朝代)가 뒤바뀐 해에도 이런 도인들은 세상에 머물며 적지 않은 신적(神跡)을 남겼다. 여기서는 이 중 몇 가지 사례에 대해 알아보자.
1. 국자사업의 아들 담초가 도를 닦아 신통을 발휘
당말(唐末)에서 오대(五代) 시기 복건성 천주(泉州)에 담초(譚峭)라는 도인이 있었는데 자는 경승(景升)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매우 총명했는데, 어린 나이에 여러 경서를 숙독하고 한 번 훑어보고 잊지 않아 사람들이 물으면 거침없이 대답하여 현지에서 명성을 얻었다. 기억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문장도 맑고 수려해 탈속했다. 당시 당조(唐朝)에서 국자사업(國子司業 국자감의 관직명)으로 있었던 부친은 그에게 과거를 보아 공명(功名)을 얻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벼슬길에 오르라고 했다.
그러나 담초의 뜻은 아버지와 달랐다. 성인이 된 후, 그는 한마음으로 도(道)를 향했으며 황로학(黃老學)에 심취해, 전조(前朝)의 천자가 신선을 구하며 도를 찾던 일을 동경했다. 그는 매일 수도(修道)하는 책을 공부하다가 어느 날 아버지에게 종남산을 여행하겠다고 말했다.
처음에 그의 아버지는 종남산이 집에서 멀지 않다고 생각하여 승낙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은 몰랐다. 그는 종남산에서 시작해 태백산·태행산·왕옥산, 숭산·화산·태산에 이르기까지 도교 명산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그가 매우 걱정되어 그에게 돌아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부친에게 회신을 보내, “모군(茅君 역주: 고대 신선)이 예전에 사람의 아들이었을 때도 집을 떠나 수행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지금은 저도 수도에 전념하고 싶으니 그렇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미 그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보고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았다.
나중에 담초는 숭산에서 십여 년을 수행하면서 약간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벽곡술을 연마하여 먹지 마시지도 않았고, 신체에도 보통사람에게 없는 능력이 나타났다. 보통 사람들은 겨울에 두껍게 두르고 여름에 얇게 입는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여름에는 가죽옷을 두르고 겨울에는 얇은 장삼 하나만 입었다. 바람이 불고 눈이 올 때면 며칠씩 눈밭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가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그가 얼어 죽은 줄 알았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의 숨결이 온건하고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이미 산을 내려와 세상을 떠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집안의 하인을 시켜 그를 찾아가게 했다. 봄, 겨울이면 하인을 시켜 그의 숙소로 전단과 옷을 보내게 했다. 그때마다 반갑게 받고 편지를 써서 하인에게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나 하인이 떠난 후에 그 전단과 옷가지를 길거리에 가져가 가난한 자에게 주었다.
그는 시정 거리를 걸으면 늘 곤드레만드레 취해 있었다. 여윳돈이 있으면 주점 주인에게 다 맡기고 어쨌든 자신은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돈을 좀 남겨두면 그때그때 필요할 때를 대비할 수 있는데 왜 한 푼도 남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남겨서 뭐하겠소. 누가 훔쳐 가면 그에게 나쁜 짓을 하게 한 것이 아닌가. 나는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으니 걱정이 없소이다.”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초라하게 지내면서도 하루 종일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미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걸어가면서 이렇게 시를 읊었다.
실은 장강이 되고 부채가 하늘이 되니
신발을 동쪽 바닷가에 던져버리네
봉래로 가늘 길 많지 않으니
오로지 담초 주장자 앞에 있을 뿐이라레
線作長江扇作天
靸鞋拋向海東邊。
蓬萊信道無多路
只在譚生拄杖前
몇 년 후, 담초는 남악(南嶽)으로 가서 계속 산속에서 수행했다. 그는 자신이 연마한 단약(丹藥)을 먹고 마침내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다. 나중에는 몸을 숨기거나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화시키는 신술(神術)을 연마하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청성산(青城山)에 은거한 뒤 다시는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
2. 두승(杜升)이 여러 해 수도해 신통이 나오다
두승(杜升)은 자가 가운(可雲)으로 그는 항상 사람들에게 자신이 경조 두릉(杜陵) 사람이라고 했다. 이곳은 당시 주(周) 성왕이 경조 두씨 일족에게 하사한 봉지(封地)로서, 이 가문은 주나라 때부터 이미 명망 있는 가문이었다. 그 후로도 줄곧 유명인물을 배출했다. 당나라에서만 두여회(杜如晦), 두우(杜佑) 등 11명의 재상이 배출되었고,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와 두목(杜牧)도 모두 경조 두 씨의 후예다.
비록 두승은 부귀하거나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세상에 드물고 민간에서 보기 드문 세외고인(世外高人)이었다. 그는 뱃속에 시와 책이 들어 있고 뱉는 말이 범상치 않아 하는 말에는 늘 깊은 이치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밥을 먹는 것을 보지 못했고 술 마시는 것만 보았다. 그는 늘 시내 골목을 돌아다녔지만, 그의 주량은 결코 작지 않아 단숨에 세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그의 나이를 짐작조차 못했는데, 얼굴이 항상 밝고 윤기 있어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옷차림도 신경 쓰지 않고 낡은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겨울에도 얇은 장삼만 입고 다녔다. 그 긴 장삼을 여태껏 갈아입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살 돈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에게 새 옷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가자마자 새 옷을 남에게 주었고, 자신은 여전히 낡은 옷을 입었다.
그는 그 허름한 장삼을 입고 눈밭에 이삼 일 동안 누워 있을 수 있었다. 그가 거기에 누워 움직이지 앉자 지나가던 사람이 죽은 줄 알고 앞으로 나아가서 그의 몸을 흔들었다. 그때 그는 천천히 일어나 몸에 묻은 눈을 털고 계속 걸어갔다. 그는 숙취로 잠에서 막 깬 것처럼 보였고, 몸에서 김이 나고 있었다.
그는 신체 상황이 일반인과 달라서 사서(沙書 역자주: 모래로 글자를 쓰는 기예의 일종)를 할 때부터 여느 예인과는 달랐다. 물이 담긴 그릇이나 대야에 고운 모래로 ‘용(龍)’자를 쓰는 데 능하여 글자가 떠오를 수 있게 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좌우로 돌 수 있었다. 그가 큰소리로 호통을 치면, 그 ‘용’자는 한 장 높이 허공으로 날아가 진짜 용의 모양이 되었다. 그 용은 고운 모래가 아니라 운무처럼 보일 듯 말 듯했다. 그가 다시 소리를 지르면 용은 물속으로 날아 돌아가서 원래의 ‘용’자가 됐다. 구경꾼들은 신기해서 돈을 던져 주었다. 돈의 액수는 적지 않았지만 그는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나 주점 주인에게 주었다.
당대(唐代) 명신 두유휴(杜孺休)도 경조 두 씨의 후손으로, 황제에 의해 소주에 자사로 파견되었을 때, 우연히 두승이 소주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여 그를 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하객과 동료들에게 “내가 모셔온 사람은 속된 사람이 아니라 득도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모두들 그의 말을 듣고 의아했는데 두승을 만난 후 두유휴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친이신 두종(杜悰)께서 이 도옹(道翁)과 친분이 깊으셨는데 그가 서천을 지킬 때 두 분은 늘 함께 잡담을 나눴다고 합니다. 저는 당시 겨우 10대였는데, 지금은 50이 넘었습니다. 40년이 지났는데도 도옹의 용모와 옷차림이 예전과 똑같으니 이는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그는 두승에게 손님과 동료들과 함께 연회를 함께 하자고 부탁했다. 모두가 이 자리에서 시를 읊고 지었지만, 다만 두승의 시는 경지가 높고 신묘하기 짝이 없어 다른 사람들은 서로 맞지 않았다.
두유휴는 두승을 집에 며칠 머물게 하고 수도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 두승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제 벼슬길에 들어섰고 부모로서 백성을 교화할 때 더욱 인후하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다사다난한 가을이 되었으니 속세를 벗어나 산림에 은거할 겨를이 없으니 병기(兵器)에 다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십시오!”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에 내란이 일어났고, 두유휴는 병기에 의해 살해당했다.
예전에 두유휴는 두승을 만날 때 항상 그에게 돈과 비단을 주곤 했다. 두승은 거절할 수 없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만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다. 두유휴가 이 일을 알고 난 후 그를 더욱 존경했다.
병란이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은 두승도 다친 것을 보았다. 나중에 그가 다친 곳에서 그가 평소 입던 낡은 장삼이 칼에 서너 토막 난 채 발견됐다. 모두들 그가 목숨을 건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며칠 후 누군가가 강소, 절강 일대에서 그를 보았으며 그가 예전과 같이 술에 만취하거나 길거리에서 사서(沙書)를 공연한다고 말했다.
1년이 지나 어떤 사람이 호남에서 그를 만나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최근 소주에서 일어난 일을 물었더니, 그는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말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원래 남악에 살았는데 세간에 온지 너무 오래됐으니 돌아가야 합니다!”
그 이후로 아무도 그를 본 적이 없다.
3. 도행이 남달랐던 건강성(建康城) 무명인
오대(五代) 시기, 건강(建康)성 동쪽 교외에 한 도인이 있었는데, 그의 성이나 이름은 모르고 그가 개울가에 나무집을 짓고 혼자 살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집 안에는 평범한 그릇 한두 개 말고는 다른 물건이 없었다. 그는 매일 성내에 들어가는데, 사람들이 그를 거지라고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동네를 다니며 구걸하는 대신 절로 달려갔다. 건강성에 절이 꽤 많아서, 그는 매일 한 번씩 둘러보았다.
시간이 길어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성 안의 순라꾼도 그의 행적이 궁금하여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는 사람을 보내 그의 거처를 알아보게 하고, 그에게 무슨 부탁이 있어서 날마다 절에 참배하러 가느냐고 물었다. 그는 “저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고 답했다.
날씨가 추워지면 관부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선한 헌 옷을 나누어 주었다. 그가 얇은 장삼만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추울까 봐 그에게도 한 벌 주었다. 처음에 받지 않더니 관부에서 억지로 주자 그는 옷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성안의 사람들은 그가 이상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를 개울가에서 옮기라고 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전의 낡은 나무집을 허물고, 또 더 외딴 곳으로 가서 황폐한 과수원을 찾아 안쪽 개울가에 나무집을 지어 살았다.
그때 며칠 동안 폭설이 내렸는데 과수원을 관리하던 사람이 그가 나오지 않자 안에서 얼어 죽은 줄 알고 정원으로 가서 살펴보았다. 그들은 그 나무집이 이미 눈보라에 의해 기둥이 무너진 것을 보고, “이번에는 정말 얼어 죽은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들이 관아에 알렸지만, 관청 사람들이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눈 속에서 곤히 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갑자기 깨어났는데 조금도 추위에 떨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는 일어서서 나무집을 나왔고 그 후 행방을 감췄다.
출처: 《속선전(續仙傳)》, 《강회이인록(江淮異人錄)》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1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