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진(李道真)
【정견망】
17. 사유착란
이 글은 서양철학의 각도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인류의 사유층면에 대해 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는 후천적으로 끊임없이 다양한 사유관념(思惟觀念)을 형성하는데, 바로 사람의 지혜와 경험이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런 사유관념은 한 층 한 층으로, 낡은 사유관념 위에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관념이 형성되는데, 아울러 그것은 인류사회와 전반 역사과정중에 층층으로 쌓인다. 그것들이 일단 형성되면 곧 사람의 행동을 주도하고 좌우지할 수 있으며 거꾸로 사람을 조종한다. 인류는 그것을 자신의 사상 또는 자신이라 여기지만 사실 이것들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과 인식[認知]일 뿐 선천의 진정한 자신이 아니다.
인류의 사유에는 최초의 근본적인 근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선천의 진아(真我)인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자기(自己)다. 선천의 진아가 오염되지 않았을 때의 진정한 자기는 순진무사(純真無邪)하며 도(道)속에 있다. 인류가 선천 진아 상태의 시기에 있을 때는 선과 악을 몰랐고 모든 것이 도(道)속에서 본성에 따라 행동해 지극히 선하고 지극히 아름다웠으며 천하를 무위로 다스렸다. 사회는 가장 조화롭고 행복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인류가 사회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각종 사심(私心)과 욕망에 오염되어 생명이 서서히 타락했는데, 인류는 곧 상생상극(相生相剋)속에 빠져 각종 지혜와 경험을 만들어내고 한 층 또 한 층 후천적인 관념을 형성해 층층이 누적하는데 결국에는 선천의 진아(真我)를 묻어버려 선천의 순진(純真)을 잃어버렸다.
사람의 사유는 선천적인 진아에서 나온 후, 다시 층층의 후천적 관념의 여과와 가공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사람 표면에 도달해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휘할 수 있다. 그리고 후천적으로 형성된 이 층층의 관념은 인류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상생상극에 빠져 생겨난 것이라 대도(大道)에서 벗어난 것이다. 때문에 사람의 최초 사유는 이 후천적인 관념이 층층으로 더해지고 또 가공을 거쳐 아주 복잡해지고, 수많은 후천 요소가 가미되는데, 이 과정에서 오염되고 왜곡된다. 표면에 도달해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휘할 때면, 곧 대도(大道)에서 벗어나는데 가장 완벽하고 조화로운 상태에서 벗어났기에 곧 각종 모순과 고통이 생긴다.
그러나 사람이 최초에 선천적이고 순진한 상태에 있을 때 사유방식은 선천의 진아가 내보낸 것이 직접 사람 표면까지 도달해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지휘하는데, 중간에 그 어떤 사유 층면의 여과나 가공을 거칠 필요가 없다. 때문에 그때의 인류는 단순하고 행복했으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도 본성에 따라 움직였고 모두 도(道)속에 있었다.
물론 인류가 타락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층층의 후천 관념이 모두 나쁘고 악(惡)한 것은 아니며, 그 중에는 분명 선하고 좋은 것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생상극 속 한 몸(一體)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타락한 후, 기만이 생기면 그에 따라 성실(誠信)이 나오고, 악(惡)이 나오면 그에 따라 선(善)이 생기는 등등이다. 이런 인류의 타락 과정에서 상생상극에서부터 생겨난 지혜와 인식, 그것들은 역사 속에서 축적되어 층층의 사유관념을 형성하며 사람의 선천 진아 위에 덧씌워지는데 선천의 진아를 파묻을 때까지 그렇다.
사람은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좋은 관념은 사람의 패괴(敗壞)를 억제하고, 나쁜 관념은 사람의 패괴를 가속화시킨다. 때문에 사람들이 한 가지 결정을 내리거나 어떤 일을 하기 전이면 늘 사상 속에서 투쟁하고 자신의 사상 속에서 싸운다. 사람의 왼손과 오른손이 싸울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자신의 것이라 자신이 자신과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서로 다른 쌍방만이 싸우고 충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사유는 왜 싸울 수 있는가? 왜냐하면 그것이 모두 진정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되어 외부에서 더해진 관념이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람의 선천적인 진아를 묻어버리고 반대로 사람을 조종하기 때문에 사상이 싸우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도가 수련에서는 흔히 반본귀진(返本歸真)을 말하는데 바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층층의 더해진 관념을 버리고, 최초의 선천적인 진아로 돌아가 자신의 진념(真念)이 되돌아 나와 더 이상 묻히지 않게 해서, 자신을 진정한 자신의 주재자로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도가에서 수련 성취한 후, 진인(真人)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보자. 현대 생물학에서 조건 반사라는 원리를 발견했다. 가령 종소리는 본래 음식과 무관하지만 개에게 종을 울린 후 매번 맛있는 음식을 주고 이런 시간이 오래되면 종소리를 듣기만 해도 개는 자동적으로 군침을 흘린다. 이것은 바로 개의 사상 속에 한 층의 외래 관념이 더해져 원래의 사유 위에 더해진 것으로 일단 조건이 촉발되기만 하면 이 층의 관념이 곧 작용해서 거꾸로 개의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다. 사람의 후천 관념이 형성되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 그것들이 일단 형성되기만 하면, 그것들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층층으로 더해져 원래의 사유 위에 덧씌워지며, 거꾸로 사람을 통제하고 사람의 말과 행동을 좌우지한다.
어떤 사유는 바로 이렇게 후천적으로 더해진 사유 층면에서 생겨난 것으로, 그것이 직접 사람을 통제한다. 반면 어떤 사유는 선천의 본원에서 나온 것으로, 그것이 사람의 진정한 사유지만, 사유가 선천의 본원에서부터 나온 후 또 늘 층층의 이런 외재적인 관념의 여과와 가공을 거쳐 최후에 사람 표면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지만 사람의 언행을 지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층층의 후천 사유관념이 일단 사람의 선천 진아를 묻어버리면, 사람은 곧 계속해서 이런 후천 사유관념에 좌우되고 통제될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정신적 산파술’은 바로 인류로 하여금 후천적으로 형성된 층층의 사유 관념을 타파하고 선천의 진아(真我)를 찾으며 진리대도(真理大道)를 찾도록 한 것이다.
후천적 사유관념이 형성되는 과정에 사람의 사유층면에서 층층으로 위로 대응하고 누적되는데, 이렇게 되면 곧 대응에 착란(錯亂)이 생긴다. 예를 들어, 원래는 맛있는 음식과 군침을 흘리는 것이 대응되는데 이는 올바른 대응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개는 맛있는 음식을 보면 군침을 흘릴 것이다. 그러나 종소리와 군침은 대응되지 않는데 개가 종소리를 듣는다고 해서 군침을 흘리진 않는다. 그러나 개에게 종을 흔든 후 음식을 주는 것을 어느 정도 지속하면 개의 사유에 한 층의 후천적인 사유관념이 생겨나고, 이 층의 관념이 종소리를 들으면 군침을 흘리는 것과 대응한다. 이것이 바로 사유층면에서 대응이 착란한 것이다. 이것은 단지 설명의 편의를 위해 한 가지 간단한 예를 든 것에 불과하며 그다지 적절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유착란이 형성된 후에는 그것이 사람의 인식에 영향을 주고 왜곡시켜 대도진리(大道真理)에서 빗나가게 하며 아울러 사람의 말과 행동을 직접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사유착란이 점점 더 많이 축적되면 사람의 사유는 층층으로 왜곡되는데 심지어 최후에는 사람의 사유 인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착란 되어 거꾸로 된다. 만약 이런 사유의 전도와 착란이 인류 사회에 광범위하게 나타나면 곧 음양반배(陰陽反背) 현상이 생겨난다. 이때 선(善)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 사악(邪惡)이 되는데, 선을 기치로 내건 모든 사람의 인식과 행동이 전도되어 마치 오늘날의 인류사회처럼 된다. 매번 음양반배의 천상(天象)이 나타난 후 인류는 곧 점차 훼멸의 시각으로 접어드는데 장차 모든 것이 무너져 해체된다.
앞에서 필자는 도가(道家) 상생상극의 각도에서 음양반배를 해석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는 서방철학과 사람 사유 층면의 각도에서 음양반배를 해석한 것이다.
“여산(廬山)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이유는 오직 몸이 이 산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류는 자신의 사유층면을 벗어날 수 없으며 자신의 사유층면을 똑똑히 보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때문에 그것이 사람의 표면 아래에서 사람의 인식을 조종하는데, 그곳에서 직접 지령을 내리거나 또는 이런 층층의 전달과 가공을 거친 후 표면에 도달하기 때문에 인류는 이를 똑똑히 구별할 수 없다. 오직 생명의 층차를 끌어올리고, 오직 진리를 얻은 후 영원불변의 진리로 가늠해야만, 이런 후천적 사유측면을 구별할 수 있고 그것들을 층층마다 벗겨내 진정한 자기를 되찾을 수 있다. 이는 또한 생명이 수련해서 되돌아 올라가는 과정인데 그는 인류 사회를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조화로운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방 철학계에서 더는 진정한 철학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 및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 등을 포함하는데, 그들은 모두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었다. 어떤 학자는 플라톤을 중국의 공자(孔子)로 비교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이렇게 비교할 수 없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 사상의 파괴자이지 전승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동성애 환자로 이 자체가 바로 사유와 인식이 착란 되어 생긴 음양반배 상태로, 그 자신조차도 찾을 수 없는데 무슨 진리에 대한 인식을 말할 수 있는가? 또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아내를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등 공산사악주의(共產邪惡主義) 사상의 맹아도 플라톤의 《국가》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이후 서양철학은 완전히 사람의 표면지식으로 전락해버렸다. 소크라테스 이후 서방의 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진리를 얻지 못했다. 그들 자신조차도 진리를 얻지 못했으니 더욱이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알도록 인도할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아무리 지혜롭다고 여길지라도 그들이 얻은 지식은 단지 후천의 지혜이고 사람의 표면 지식일 뿐, 누구도 자신을 찾지 못했으며 자신을 잃어버렸다. 나중에 서방철학은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고, 최후에는 왜곡되고 착란 되어 음양반배를 형성해 마도(魔道)와 사도(邪道)로 전락했고 무신론, 진화론, 변증법적 유물주의, 공산주의 투쟁철학 등의 마도(魔道)학설로 발전되어 사람을 마귀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마치 마왕(魔王) 파순이 마귀의 자손을 승려로 출가시켜 몸에 가사를 걸치고 경문을 읽으며 석가모니의 불법을 파괴시킨 것과 같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63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