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생(道生)
【정견망】
7. 언어의 상(象)
불경에서는 우리 삼계내의 한 층천(層天 한 층의 시공)을 ‘광음천(光音天)’이라 하는데 그 안에 수많은 ‘천인(天人)’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광음천의 천인은 빛(光)으로 소리(音)를 대신하며 입을 열어 말을 하면 청정한 빛이 입에서 나와 그 뜻을 표현한다. 그들은 빛으로 말하기 때문에 광음(光音)이라 불린다. 즉, 그곳에서는 빛과 소리가 하나가 되어 빛을 ‘들을’ 수 있고 소리를 ‘볼’ 수 있다.
현대 인류의 물리학에서는 소리를 분자 층면의 파동 즉 음파(聲波)라고 한다. 빛은 원자 층면에서 전자의 파동으로 광파(光波)라 한다. 그것들은 오직 처해 있는 입자 층면이 다르고 주파수는 다르지만 본질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만약 생명이 이 입자 층면을 돌파해서 이 상(象)을 돌파할 수 있다면 귀로 원자 층면에서 빛과 그림을 ‘들을’ 수 있고 눈은 분자 층면에서 목소리와 음악을 ‘볼’ 수 있다. 그 감지(感知) 영역에 간격이 없어 서로 통하는 것으로 홀로그램 식(全息)의 일체로 변한다. 객관 세계는 더욱 진실하고 현묘하게 펼쳐지며 일체(一體)로 용해되어 아무런 간격이 없다. 고층 생명으로 갈수록 감지 영역은 더욱 커지고 그들이 만든 ‘상(象)’도 더욱 객관적이고 더욱 대도진리(大道真理)에 접근하며 저층으로 갈수록 진리에서 더욱 멀어진다.
불경에서는 또 지구 최초의 인류는 광음천에서 내려왔다고 말한다. 지구는 우주 성주괴멸공(成住壞滅空)의 큰 숙명 속에서 윤회하는데 구(舊) 지구는 생명물질이 타락・패괴(敗壞)됨에 따라 훼멸되고 신(新)지구가 막 형성될 때면 비할 바 없이 밝은 빛이 나왔다. 광음천의 천중(天衆)남녀들의 일부는 천복(天福)을 다 누리고 나서 본성이 경박해져서 이를[역주: 신 지구에서 비할 바 없이 밝은 빛이 나는 것] 기이하게 여기고 위험한 것을 시도해보려 했다.
이에 신족(神足)으로 날아서 앞뒤로 지구에 와서 각 대륙에 흩어졌다. 그들은 지상에 온 후 식욕을 탐하며 지구상의 음식을 대량으로 먹어 신체가 끊임없이 가라앉았고 때문에 더는 되돌아갈 수 없고 오직 지구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아주 많은 세월이 지나자 그들은 더 이상 날 수 없게 되었고 그저 두 다리로 지상에서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남녀 사이에서 또 사회에서 단체 생활을 하면서 그들의 심령(心靈)은 끊임없이 각종 욕망과 집착에 의해 가로막혔고 오염되어 신력(神力)이 점차 소진되어 사라져버렸고 최후에는 영묘(靈妙)한 몸을 잃어버리고 점차 혈육으로 구성된 범인(凡人 평범한 사람)의 몸을 형성했다. 이를 통해 완전히 범인으로 변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천안(天眼)과 천이(天耳)는 범인의 육안(肉眼)과 육이(肉耳)로 변했고, 고층의 홀로그램 식 통감[通感 사람과 달리 시각 청각 등이 통합된 감각]은 사라지고, 범인의 협애하고 저급한 시각과 청각 등의 감각으로 분리되었다. 심지(心智)도 점차 미혹되어 천인(天人)의 기억과 지혜를 잃어버렸고 서로 간에 심령의 감응[텔레파시]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다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어져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간격이 생겨났다. 입에서도 더는 빛을 내보내지 못하게 되어 그저 혀와 성대에 의지한 목소리로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언어로 의사전달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반드시 손짓이나 동작 등을 보조로 삼아 표현해야 했다. 나중에 생명 사이에 충분히 소통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비로소 언어가 서서히 발전하고 성숙해졌다.
이것이 불경에 기재된 인류의 타락과 언어가 생긴 과정이다.
‘상(象)’에는 자연적이고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상이 있고 또 후천에서 주관적으로 만든 상이 있다. 우리 인류는 주로 육체의 ‘오관’(五官 눈, 귀, 코, 혀, 몸)으로 생겨난 ‘오감’(五感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낌)을 통해 인류의 인지영역 중에서 외부세계와 대응하는 ‘상(象)’을 만들며 이를 통해 이 세계를 감지하고 인식한다. 생명에 내재한 외계와 대응해 만들어낸 이런 내재적인 상이 바로 주관의 상이며 이는 객관세계와 접촉하고 감지하는 과정에서 후천적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다.
인류의 인지영역 속에서 만들어낸 주관의 ‘상’은 안과 밖을 소통하는 통로 즉, 인류의 오감(五感) 등의 요소에 완전히 좌우되고 제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아주 단편적이고 피상적이며 인류는 홀로그램 식의 일체로 된 진실한 세계를 감지할 수 없다.
인류의 눈은 단지 눈앞에 있는 이런 작은 구역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작은 것도 볼 수 없고 큰 것도 볼 수 없으며 먼 것도 볼 수 없고 가까운 것도 볼 수 없으며 아울러 범위가 극히 협소한 가시광선 범위만 볼 수 있을 뿐 적외선이나 자외선 바깥의 일체 빛조차도 볼 수 없다.
사람의 귀 역시 아주 작은 범위의 가청영역에 있는 소리만 들을 수 있고 이보다 작거나 먼 것은 들을 수 없으며 일정한 주파수 바깥의 초음파와 아음파[가청 주파수 이하의 소리] 역시 들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류가 인지하는 세계는 마치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 같아서 세계를 인위적으로 무수하고 협소한 단면을 지닌 유별(類別)로 분할해 주관적인 상을 수립한다. 때문에 영원히 홀로그램 식의 진실한 객관세계를 똑똑히 알 수 없다. 인류는 육체와 물욕이란 표면에 감금되어 있어서 자신이 수립한 욕망과 관념이란 울타리 속에서 뛰쳐나올 방법이 없다.
객관세계는 저층생명에 의해 분리되어 나온 저능하고 협소한 주관적인 감지영역으로 단절되고 흩어져서 무수하고 번잡한 유별(類別)을 만들어내 세인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사람에게 지혜가 없게 만들어 대도진기(大道真機)를 볼 수 없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세계적으로 많은 시각장애인들은 눈이 없어도 귀로 세계를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닫혀있기 때문에 마음이 시각(視覺)으로 단절되거나 분산되지 않아 더 집중하고 더 간단하게 마음을 써서 세계를 체오(體悟)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마음을 귀에 두면 귀라는 이 통로를 통해 세계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더욱 집중되면 귀와 눈의 간격을 없애 ‘보는’ 것과 ‘듣는’ 것이 하나의 상(象)이 되어 통감(通感)에 도달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무명(無明)의 세계는 바로 그들의 귀속에서 ‘살아나는데’ 그들이 듣는 소리는 정상인보다 더 ‘홀로그램’에 가깝고 더욱 ‘영성(靈性)’을 띤다. 그러므로 그들이 만들어낸 ‘상(象)’은 정상인이 만들어낸 ‘상’과 다르다. 그들은 청각(聽覺)이란 이 하나의 상속에 시각(視覺)의 상이 섞여있다. 왜냐하면 그들 청각의 상(象)이 더욱 미묘하고 홀로그램 적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인류가 평생 만들어낸 주관적인 상(象)의 교란을 없애고, 육체의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이 물질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마음을 안정시켜 명리정구(名利情仇 명예 이익 정 원한)를 잊고, 다툼과 속임을 잊고, 욕망과 집착 등을 잊어 심령(心靈)을 끊임없이 정화시켜 순진(純真)하게 하면 더욱 간단하고 더욱 집중하며 더욱 깨끗해질 수 있다. 이때 다시 이런 마음으로 세계를 감지하면 사람이 평생 만들어낸 주관의 상과 관념이 점차 흐릿해지고 최후에는 경계선마저 사라져서 객관의 상(象)으로 돌아와 객관의 상과 합일(合一)할 수 있다.
이때 사람은 곧 육체 오감의 한계와 속박을 타파해 객관세계와 홀로그램 적으로 일체가 될 수 있으며 간격이 사라진다. 우주 만물이 서서히 마음속에서 용해되어 일체가 되고 혼돈(混沌)으로 돌아가고 허무(虛無)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때 대도(大道)가 곧 눈앞에 펼쳐진다. 무상(無象)이 일체 상을 만들고, 무형(無形)이 일체 형을 만들며, 지극히 간단한 것이 지극히 크며, 있는 곳이 없기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는 등등. 이것이 생명이 제고하고 반본귀진(返本歸真)하는 과정이다.
● 언어 속의 상 만들기
여기서 우리 인류의 언어에 대해 한번 토론해보자. 사람의 언어 역시 ‘상(象)’을 만드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데, ‘상(象)’과 ‘상(象)’ 사이의 연계를 통해 정보를 소통하고 전달한다.
우리가 만약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와 같다면 가장 순진(純真)하고 간단한 마음으로 세계를 느끼고 깨달을 수 있다. 즉 인류가 평생 수립한 고유관념과 주관적인 상(象)의 속박에서 뛰쳐나와 육욕(肉慾)과 오감의 제한에서 뛰쳐나와 홀로그램의 ‘상’을 만들어 언어가 살아나게 할 수 있다.
얼굴을 스쳐가는 따스한 바람을 맞으며 바람 속에 벼꽃 향기가 가득 흘러넘치면 시험 삼아 코로 한번 보라. 당신은 바람이 황금색으로 출렁이는 물결과 같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햇빛으로 일광욕하는 이렇게 편안하고 따스한 가운데 시험삼이 당신의 몸으로 보라. 당신은 황금색 대지를 볼 수 있고 공기 중의 도처에서 태양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또 코로 ‘볼’ 수 있는데 장미 향기는 아주 짧고 계수나무 꽃은 아주 길다.
당신은 눈으로 ‘맛볼’ 수 있는데 아침 태양은 오렌지 맛이 나고 달은 박하 맛이 나며 구름은 마시멜로 맛이 난다.
현대 인류의 문법에서 언어문자의 표현은 각기 다른 다양한 수사기법을 분리해서 표현한다. 가령 비유, 유추, 연상, 의인(擬人), 과장, 차대(借代), 쌍관(雙關), 통감(通感), 감정이입, 염련(拈連), 상징(象徵), 기우(寄寓) 등등인데 이를 분류하자면 63가지 큰 종류와 78가지 작은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번잡하기 그지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주관이 만들어낸 상(象)으로, 인류가 표면세계의 물질발전 중에서 자신을 물질과 육욕의 표면에 가둬두고 인류의 저능한 눈, 귀, 코, 혀, 몸 등의 감각에 갇혀 홀로그램으로 일체가 되는 세계를 무수하고 협소한 구역으로 조각낸 것이라 진상(真相)을 볼 수 없다. 겉으로 보면 아주 완벽하고 풍부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후퇴하고 봉폐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인류 인지 영역 중에서 주관적인 ‘상’을 더욱 번잡하고 어지럽게 만드는데 갈수록 더 천박하고 협애해져서 최후에는 사람의 사상(思想)을 가둬 죽여 버린다.
그러나 대도(大道)는 지극히 간단하고 지극히 쉬운 것으로 만약 이런 속박에서 뛰쳐나와 순진무사(純真無邪)한 마음으로 깨닫고 인지할 수 있다면 그럼 보다 박대(博大)하고 객관적인 상을 볼 수 있고 더욱 홀로그램 적이고 진실한 세계를 감지할 수 있다. 이때 당신의 언어 문자는 곧 생명력을 지니게 되며 살아난 언어는 마치 시(詩)처럼 민첩함과 지혜로 가득 차 자연스럽고 꾸며내지 않는다. 그것은 거대한 표현력이 있고 에너지가 풍부해서 사람들의 심령 깊은 곳으로 들어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 연꽃이 피어나게 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몇 가지 시 구절을 예로 들어 고인(古人)이 언어 문자에서 어떻게 상(象)을 사용했는지 알아보자.
“봄빛이 정원에 가득하니 빗장을 걸어도 잡지 못하고 붉은 살구가지 하나 담장 밖으로 나오네[春色滿園關不住,一枝紅杏出牆來]”[1]
인류의 후천적인 관념으로 만들어낸 주관적인 상에서 봄빛[春色]은 생명과 형체가 없는 무형의 것으로 단지 일종의 시각적인 감수에 불과하다. ‘가득하다(滿)’와 ‘빗장을 걸다(關)’는 동사로 형체를 지닌 물건을 겨냥한 것이다.
인류의 후천적인 인지중에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상을 하나의 상(象)에 집어넣으면 이 두 가지 주관적인 상의 한계를 타파해 기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봄빛은 이렇게 형상을 지니게 되고 또 살아난다. 봄빛이 이렇게 용솟음치면서 작은 정원을 꽉 채우고 곧 흘러넘쳐 벗어나려 하는데 정원의 담과 빗장 걸린 문이 어떻게 가둬둘 수 있겠는가? 이는 불가능하다.
결국 한 가닥 봄빛이 정원에서 밖으로 흘러넘쳐 붉은 살구나무 가지 하나가 담장 밖으로 나왔다. 인류 후천의 인지중에서 ‘가득하고’ ‘빗장을 거는’ 상(象)은 변두리가 경계가 있는데 그것을 타파해 선천의 본원으로 되돌리자 ‘봄빛’이 이로 인해 모습을 드러내고 생명력을 갖게 된다. 붉은 살구나무 가지 하나가 담을 넘은 것은 봄빛이 넘쳐나는 것을 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붉은 살구나무 가지 끝에 봄기운이 한창이구나(紅杏枝頭春意鬧)”[2]
이 구절은 앞에 언급한 것과 표현은 달라도 본질은 비슷하다. 여기서 ‘한창이다(鬧 시끄러움)’는 인류의 주관적인 인지 속에서 생명의 시끄러움인데 이런 것들은 모두 인류가 후천적으로 물질과 육욕에 감금된 과정에서 끊임없이 글자에 정의를 가하고 이를 통해 서서히 선천의 자상(字象)을 봉쇄해 죽임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봄기운(春意)’이란 사람들의 후천적인 인지 속에서 봄에 대한 느낌으로 생명이 없는 개념이다. ‘봄기운’과 ‘한창’은 사람들의 후천적인 인지 속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상인데 이것을 하나의 상(象)으로 돌려놓자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인류가 인지하는 한계를 타파한다. 이렇게 하면 세계는 더욱 홀로그램 적이고 현묘하게 드러나는데 이렇게 봄기운이 살아나 가지 끝에서 움직이며 한창 요란을 떤다.
“새벽 종소리에 구름 밖이 축축하고(晨鍾雲外濕)”[3]
‘습(濕 습기 축축함)’은 인류의 후천적으로 고정화된 관념과 인지 속에서 유형의 물건이 물에 잠기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물욕(物慾)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위적으로 ‘습(濕)’에 주는 주관적인 상으로 ‘습’ 본원의 자상(字象)을 봉폐시켰다. ‘종소리’는 형체가 없는 소리다.
그런데 이 두 상(象)을 하나의 상(象)으로 합하자 인류 육체 감각기관의 한계를 타파해 의경(意境)을 완전히 홀로그램 적으로 만들고 이로 인해 언어가 곧 되살아난다. 밤에 비가 내린 후 공기와 구름 속에 습기가 가득한데 새벽 종소리가 구름 밖에서 전해오니 이로 인해 점차 습기에 젖어든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종소리가 귀에 전해져 무겁고 둔탁한 느낌이 더해지니 무겁고 실의에 빠진 시인의 마음과 서로 공명한다.
이상은 인류가 후천적으로 만든 주관적인 상을 사용해 역(易)의 이치를 거슬러 타파함으로써 반본귀진(返本歸真)한 것으로 선천 자연의 상으로 되돌린 것이다. 또 이를 통해 홀로그램 적인 의경(意境)을 만들어 인류의 고정관념에 충격을 주니 기묘한 효과를 낳고 언어문자가 살아나게 했다.
“마른 등나무, 고목, 황혼에 우는 갈가마귀 물 흐르는 작은 다리, 인가 한 채
옛길엔 서풍이 불고 야윈 말 한 마리 석양은 서편에 지고
애타는 사람은 하늘가에 서있네
枯藤老樹昏鴉,小橋流水人家,古道西風瘦馬。
夕陽西下,斷腸人在天涯。”[4]
여기서 마른 등나무, 고목, 황혼의 갈가마귀, 작은 다리, 흐르는 물, 인가, 옛길, 서풍, 석양, 하늘가 등등은 인류 주관적인 상(象)속에서 공통성을 띤다. 이렇게 서로 합하면 공명을 일으킬 수 있는 물상(物象)을 한곳에 놓고 조화로운 공진(共振)에 도달하게 하고 공통부분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강화해 한걸음씩 축적하고 완벽하게 만든 후 마지막에 화룡점정을 찍어 에너지를 석방시키면서 사람들 내심 깊은 곳으로 치고 들어가 공명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인류의 주관적인 인지를 타파한 것으로 인류의 주관적인 상(象) 속에서 자연스레 공통성을 지닌 부분을 취해, 객관세계에 대한 인류의 자연스런 감지와 체험을 따라 에너지를 석방시켜 내고 이를 통해 사람들 내심 깊은 곳으로 치고 들어가 가장 넓은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지는 해, 저녁 노을, 저녁 바람 속 예인의 피로한 그림자는 편안히 쉴 돌아갈 땅을 갈망하네.
(落日、晚霞,晚風中藝人疲憊的身影,渴望一方寧靜的歸土……)”
이 구절은 앞에 언급한 것과 비슷하다.
언어 속에서 상(象)을 만드는 것은 상술한 방식 외에도 또 다른 방식이 있다. 바로 가장 대표성을 띠는 하나의 사물로 하나의 상(象)을 표현해 전체 상을 하나의 물건을 통해 펼쳐내는 것이다.
“인가는 어디쯤 있으랴 구름 밖 닭 울음소리(人家在何許,雲外一聲雞)”[5]
텅 비어 고요하고 아득한 깊은 산속에서 갑자기 구름 밖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면 이 울음소리는 따스하고 얼마나 감동적이겠는가?
이 닭 울음소리에는 아주 많은 정보가 담겨 있고 그 배후는 대단히 넓고 심원(深遠)한 하나의 큰 상(大象)이다. 이 닭 울음소리를 통해 모든 것이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진다. 사람이 흰 구름 깊은 곳에서 인가를 본다면, 개와 닭 우는 소리가 서로 들리고 늙도록 편안히 즐기면서, 깊은 산 속에서 세상 밖의 무릉도원과 같은 경치를 본다면, 하늘하늘 올라가는 연기와 따사한 불빛을 본다면, 그런 편안하고 아늑한 돌아갈 곳을 본다면, 또한 아득한 가운데 어릴 때 어머니가 고향 집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면….
이런 정서와 풍경을 지닌 닭 울음소리에는 수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 속세에 살면서 명리(名利)를 위해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에게 한순간에 감동과 공명을 불러일으키면 피로하고 외롭던 그 심령을 이 순간 단번에 편안하고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
“정처 없이 떠도는 신세 무엇에 비기랴.
천지간에 한 마리 갈매기[飄飄何所似,天地一沙鷗]”[6]
이 구절 역시 비슷하다. 천지간에 한 마리 갈매기가 홍대(洪大)한 하늘에서 아무런 배경도 없이 미묘하고 생생하게 움직이는 이 한 점이 배후에서 거대한 상(象)을 이끌어낸다. 의상(意象)으로 정처 없이 외롭게 떠도는 시인의 신세를 드러내는데 단지 이 한 구절만으로도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적시게 할 수 있다.
“취하여 모르겠네 물속에 하늘 있는지 배에 가득 실은 영롱한 꿈 은하수를 누르네
[醉後不知天在水,滿船清夢壓星河]”[7]
별들이 깨끗한 호수 면에 반사되어 물과 하늘이 만나는 곳에서 시인은 술에 취해 호수의 뱃속에 누워 있다. 한밤중에 몽롱한 가운데 보니 몸이 하늘의 은하수에 있는 것 같다. 오늘 밤은 어떤 밤이기에 내가 배를 타고 하늘에서 노니는가? 꿈인 듯 현실인 듯, 취한 듯 깨어난 듯, 시인은 배 한가득 아득한 꿈을 싣고 은하수 위를 마음껏 떠다니는데 물과 하늘, 꿈과 현실,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노닌다. 여러 상(象)이 완벽하게 하나로 융합되어 홀로그램 적인 감각에 도달해 현묘하고 기이한 장면을 만들어내며 심금을 울린다.
이처럼 상(象)에 대한 언어의 운용은 아주 현묘한 것으로 여기서는 단지 개인 층차에서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었을 뿐이라 한계가 분명하다.
언어의 ‘상(象)’은 아무리 취해도 끝이 없고 아무리 사용해도 다함이 없다. 단지 쓰는 사람의 오성(悟性)에 달려 있을 뿐이다. 이처럼 중화문화 학습은 오성이 부족하면 근본적으로 배워서 통할 수 없다.
주:
[1] 송대(宋代) 엽소옹(葉紹翁)의 《유원불치遊園不值》
[2] 송기(宋祁) 《옥루춘玉樓春》
[3] 두보 《기주우습부득상안작夔州雨濕不得上岸作》
[4] 마치원(馬致遠) 《천정사天淨沙·추사秋思》
[5] 매요신(梅堯臣) 《노산산행魯山山行》
[6] 두보 《여야서회旅夜書懷》
[7] 당온여(唐溫如) 《제용양현청초호題龍陽縣青草湖》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39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