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일(劉仙逸)
【정견망】
중의(中醫)에 대한 첫인상
우리 집은 병원 직원 기숙사 안에 있어서 나는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어느 중의사(中醫師)는 집안 대대로 의사 가문 출신이고 누구는 소아 침구에 능하며 누구는 역리(易理)로 사주를 볼 줄 안다는 등의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가끔 병원 내 한약국을 놀러갈 때면 틈날 때 의서(醫書)를 읽는 원로 중의사를 보곤 했다. 그 책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실로 장정한 옛날 책으로 내용도 전부 번체(繁體)였다. 그들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자유로워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1970년대 초에 농촌에서 맨발 의사[赤腳醫生]를 대량으로 양성해야 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중의(中醫)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당시 침구와 한약은 가장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치료법이었다. 당시 우리 집에도 아주 긴 은침(銀鍼)과 각종 약초 그림이 그려진 본초 서적 및 혈위(穴位)가 적힌 작은 인체 모형 및 귀 모형이 있었다. 어릴 때 나는 이런 책들을 좋아했지만 그 오묘한 쓰임에 대해서는 몰랐다. 조금 더 성장했을 때, 집에 있던 《본초강목(本草綱目)》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다보니 이런 약초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어른들로부터 배워서 알고 있던 아주 흔한 차전초(車前草 질경이)로 탕약을 만들면 이질(痢疾)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중의(中醫)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중의에 대한 남다른 감정 역시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 중의 치료를 접한 것은 대략 대여섯 살 때의 일이다. 한밤중에 남동생이 산기(疝氣 역주: 아랫배가 당기면서 아픈 증상을 가리키는 중의 용어)로 통증이 심해서 크게 울어대자 이웃들을 깨웠다. 그 중 애연가 왕(王)씨 아주머니가 있었다. 당시 누구의 발상인진 몰라도 그들은 아주머니의 담배를 가져다 배꼽 아래 혈 자리에 뜸을 뜨게 했다. 뜻밖에도 동생은 곧 울음을 그쳤고 날이 밝을 때까지 깨지 않았다.
이 한 장면은 내 기억 속에 깊이 새겨져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이 내가 중의가 침이나 약도 없이 담배만으로 질병을 치료한 사례를 처음 목격한 것이다.
나중에 나는 의대(醫大)에 진학했지만 내가 배운 것은 중의가 아니라 양의였다. 하지만 교과목에 중의(中醫) 필수과목들이 있었다. 이는 또 중의에 대해 더 알고 싶었던 내 소망을 만족시켜주었다. 그런데 나는 의사가 되기 전에 환자의 고통과 무력감을 직접 체험했고 동시에 또 중의와 양의의 차이점을 경험할 수 있었다.
대학교 2, 3학년 때의 일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나는 오른쪽 갈비뼈 아래쪽에 뭔가 통증을 느꼈다. 당시 내 느낌과 의학 상식으로 볼 때 이런 증상은 오직 중의만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에 부속 대학 병원 중의과를 찾아 갔다. 당시 나를 치료해준 중의사는 실력이 뛰어났는데 두 손으로 내 맥을 잡아보더니 곧 소시호탕(小柴胡湯)이란 한약을 처방해주었다. 이 약을 먹고 병이 완전히 사라졌다. 내가 조사해보니 소시호탕은 간기울결(肝氣鬱結 스트레스로 간의 기운이 울체되어 생기는 증상)에 효과가 있었다. 바로 이때부터 한약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또 한번은 설사를 해서 항생제와 다른 양약을 많이 먹었지만 효과가 없고 부작용만 심했다. 학교 의사(校醫)를 찾아가자 설사라는 말만 듣고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곽향정기환(藿香正氣丸)이란 중성약(中成藥 역주: 중국에는 중의 처방을 기초로 만든 다양한 기성 처방들이 많이 있다) 한 박스를 주었다. 그런데 나는 이 약을 한번 먹자마자 그때부터 위와 장 기능이 완전히 망가졌다. 이 약은 내게 정말 좋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곽향정기환은 주로 감기로 인해 생긴 설사를 치료할 때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약이란 게 함부로 복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뛰어난 중의사는 망(望), 문(問), 문(聞), 절(切)을 통해 환자의 병이 피모(皮毛)에 있는지 아니면 내부 장기에 있는지 파악한 후에야 그 증(證)에 맞는 약을 투여한다.
사실 한약도 제대로 공부하려면 내용이 아주 방대한데 가령 약에도 군신좌사(君臣佐使) 등 역할의 구분이 있고, 어느 약을 어느 정도 분량을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경(經)이나 어떤 맥(脈)으로 약이 들어가는지 알아야 하며 절대 대충해선 안 된다.
하지만 내게 약을 준 교의는 의술이 부족해서 원래 중의로 잘 치료할 수 있었던 내 병을 복잡하게 꼬이게 만들어 난치로 만들었다. 때문에 나는 파룬궁(法輪功) 수련을 할 때까지 10년 넘게 위장병으로 고생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통해 나는 중의에 대해 혐오감이 생기진 않았고 오히려 변증시치(辯證施治 역주: 중의 치료에서 먼저 증상의 원인과 기전을 확인한 후 치료한다는 원칙)의 합리성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겉으로 드러나는 질병의 증상은 같을지라도 원인이 다르면 약을 쓰는 법 역시 달라야 하며 절대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약을 써서 치료해선 안 된다.
나는 이렇게 우선 환자가 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았고 그런 후에야 임상수업을 들었다. 중의 이론을 학습한 후 나는 중의의 연원(淵源)이 아주 깊고 또 박대(博大)한 것을 알게 되었다. 중의 이론의 원융(圓融)함은 내게 어느 한 질병도 변증시치 없이는 치료할 수 없다고 느끼게 했다.
동시에 비록 내가 음양오행 중의이론을 사용해 사례를 분석할지라도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고 그것의 정수가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무언가 깊이 연구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경험을 통해 중의의 병 치료는 그것의 독특한 부분이 있으며 아무나 중의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중의사가 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수많은 유명한 중의사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계속)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19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