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단(颜丹)
【정견망】
현대 사회에서 ‘남존여비’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이가 이를 중국 고대의 고루한 관념에서 기원한 차별로 여긴다. 하지만 『주역(易經)』에서 요약된 이 개념은 본래 여성을 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이는 단지 남녀가 어떻게 행동해야 ‘도(道)’에 부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요구였다. 남자는 하늘처럼 공정하고 스스로 강해지며 쉬지 않아야 하고(자강불식), 여자는 땅처럼 겸허하고 예의 바르며 만물을 포용하는 덕을 쌓아야 한다(후덕재물)는 뜻이다.
전통 사회에서 남성을 중시한 것은 주로 사회적 분업에 따른 것이었다. 남자는 크게는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케 하며, 작게는 가족을 부양하고 농사일을 책임져야 했다. 소위 여성을 가볍게 여겼다는 ‘경녀(輕女)’의 관념도 이러한 역할의 제약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사실 고금중외를 막론하고 아내를 두려워하는 남자는 적지 않았으며, 많은 명문가와 부유한 집안에서는 집안 여성들은 물론 비녀(婢女, 계집종)들까지 선하게 대했다.
청나라 가경(嘉慶) 도광(道光) 연간, 복건성 민현(지금의 푸저우시)의 료 씨 가문은 ‘다섯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온 집안이 귀하게 된’ 영광을 누렸다. 다섯 아들 중 둘은 거인(擧人), 셋은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넷째·다섯째·여섯째 아들은 모두 한림원에 들어갔다. 특히 여섯째 아들은 방안(榜眼, 과거 2등)으로 관직에 나가 상서(장관급) 자리에까지 올랐다. 가경 황제는 어제련(御聯)을 내려 료 씨 가문의 덕망을 찬양했다.
“집안에 선을 쌓으면 반드시 넘치는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말처럼, 이들의 성공은 아버지 료육봉(廖陸峰)의 두터운 덕행과 관련이 깊다. 9세 때 홀로 부친이 강직하여 윗사람에게 죄를 지었고 압박받아 집을 떠났다. 식구들은 부친이 간 곳을 알지 못해 매우 걱정했다. 그는 어린 아이에 홀로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강변에서 간절한 말로 뱃사공을 설득하여 강을 건넜고 간신난고를 많이 격은 후 마침내 부친을 찾았다.
자란 후 그는 부친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에게 동정과 자애로 대했으며 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돈이 없어 장례를 못치르는 고향 사람이 있으면 곧 돈을 내어 도왔다.
나중에 료육봉이 직에 오른 후 대만의 모지역에서 아문으로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그는 해적의 이름을 기록한 책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보니 그 지역의 양민들이었다.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그는 책자를 태워버리고 상부에는 화재가 나서 타버렸다고 보고했다. 이렇게 그는 천여명의 목숨을 구했다. 이 일이 지난 후 그는 관직을 잃지 않았을뿐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와 복주에서 소금담당의 직책을 맡았다.
특히 료 씨 가문은 비녀들을 너그럽게 대했다. 혼기가 차면 시집을 보내주었고, 화장부터 친정 나들이까지 풍습에 따른 모든 혼례 절차를 꼼꼼히 챙겨주었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료육봉은 이렇게 답했다. “비녀도 사람인데 어찌 차별하여 대하겠는가?” 지위가 가장 낮은 여성에게도 인덕을 베풀었으니 가문이 흥성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가난한 친척 여아들을 거두다: 후관현 허(許) 씨 가문
복건성 후관현의 허 씨 가문 역시 보이지 않는 음덕을 많이 쌓았다. 도광 병술년(1826년)에 진사가 된 허덕수(許德樹)의 할아버지 허숭해(許崇楷)와 아버지 허의선(許懿善)은 인품이 고귀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허의선은 먼 친척 고모가 가난 때문에 갓 태어난 두 딸을 물속에 던져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거두어 양녀로 삼았다. 이미 자신의 딸이 다섯이나 있었음에도, 또 다른 고모가 형편이 어려워 딸들을 종으로 팔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 아이들까지 데려와 정성껏 키워 좋은 곳으로 시집보냈다. 허가의 딸을 말하면 그곳 사람들은 모두 칭송해마지 않았다.
허 씨 가문에 시집온 여성들 또한 대단했다. 허덕수의 증조모 정맹기(鄭孟姬)는 학식이 깊고 재주가 뛰어난 ‘여중군자’였다. 부친은 진사 출신이었으며 관직이 호북 순무에 이르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경전을 많이 읽고 자란 후 문장, 시사, 부, 서화에 모두 정통하여 재능이 있었다. 아들은 거인에 합격하고 손자는 진사에 붙어 그녀의 직접 가르침을 받아 이익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파면되었다는 소식에 가산을 기부해 강둑 공사를 도왔고, 남편이 일찍 죽자 시댁의 전답을 모두 시동생들에게 주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매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약을 조제해 나누어주고, 겨울이면 솜옷 수십 벌을 지어 시집가는 가난한 처녀들에게 보내주었다. 집안에 식량이 떨어질 정도로 가난해졌을 때조차 타지에 팔려 간 친족 남녀를 속전(贖錢)을 내어 구해오기도 했다. 천주 지부는 그녀의 의로움을 찬양하며 ‘건괵군자(巾帼君子, 여성 군자)’라는 현판을 내렸다.
노잣돈을 털어 소녀를 구한 양경침(楊慶琛)
복건성 후관 중에 또 다른 덕이 있는 지사로 언급만한 사람이 있다. 임칙서의 절친한 벗이었던 양경침이다. 그는 일생 청렴한 관리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진사 시험을 보러 가던 해,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친지들이 겨우 은화 50위안을 노잣돈으로 모아주었다. 그런데 소주(蘇州)를 지나던 중 한 소녀가 팔려 가며 슬피 우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는 차마 지나치지 못하고 노잣돈의 절반이 넘는 28위안을 내어 소녀를 구해주었다.
선한 마음이 그의 앞길을 막지는 않았다. 이후 우연히 만난 동향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시험을 치러 급제했고, 관직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겉으로는 주변의 도움 덕분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 스스로 심은 선한 원인이 복된 결과로 돌아온 필연이었다.
참고자료 <북동원필록>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37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