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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古人)은 어떻게 선한 마음으로 남을 대했는가

주정도

【정견망】

오늘날 대륙의 중국인은 좋은 일을 좀 하거나, 형편이 어려운 사람을 보고 재물로 도와주면 바보 취급을 받는다. 돈 있으면 자신을 위해 쓸 줄 모른다는 식으로 냉소와 야유를 보내며 온갖 말을 다 한다. 이는 오늘날 사람들의 도덕이 하락한 뒤에 나타난 모습이다.

중공(中共)은 각종 정치 운동을 통해 전통문화를 파괴했고, 거짓과 악 그리고 투쟁으로 가득 찬 당문화(黨文化)로 중국인을 독해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오늘날 중국인은 전통문화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고 머릿속은 온통 투쟁 관념뿐이며, 사욕(私慾)과 사념(私念)이 몸에 가득해 선한 마음으로 남을 대하는 법을 더더욱 모른다. 필자는 2006년 1월부터 지금까지 명혜망에서 옛사람들이 선한 마음으로 남을 대했던 이야기 몇 가지를 선정해 엮어 보았다.

독자들이 이를 통해 깨달음과 영감을 얻기를 바란다.

1. 범원염이 선심(善心)으로 남을 대하다

범원염(范元琰)은 자가 백규(伯珪)이고 또 다른 자는 장옥(長玉)이며, 남조(南朝) 오군(吳郡) 전당 사람이다. 원염은 젊어서 매우 학문을 좋아해 경서와 역사에 박학다식했고 불학(佛學)을 깊이 연구했다. 하지만 사람됨이 매우 겸손하여 결코 자신의 장점으로 남을 멸시하지 않았다. 그는 남을 대할 때 매우 공경했으며, 다른 이와 대화할 때는 혹여 상대에게 상처를 줄까 봐 염려했다. 비록 혼자 집에 있을 때도 마치 귀한 손님을 모신 것처럼 단정하고 공경하게 처신하며 예법을 엄격히 지켰기에 그를 보는 사람 중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는 천성이 선량해 자신의 재물을 훔친 사람에게도 선심(善心)으로 대하고 곳곳에서 상대방을 배려했다.

원염의 집은 매우 가난하여 채소를 심어 겨우 생계를 유지했다. 한번은 원염이 집을 나서다가 어떤 사람이 자기 집 배추를 훔치는 것을 발견했다. 원염은 급히 집안으로 물러났다.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묻자 원염은 방금 본 일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다. 어머니가 채소를 훔친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원염은 제가 물러난 이유는 채소를 훔친 그 사람이 수치심을 느낄까 봐서입니다. 어머니께 그의 이름을 말씀드릴 테니 부디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모자는 이때부터 이 비밀을 엄격히 지켰다.

원염의 채소밭 밖에는 도랑이 하나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도랑을 건너와 죽순을 훔쳐 갔다. 그러자 원염은 일부러 나무를 베어 도랑 위에 다리를 놓아주어 죽순을 훔치는 사람이 물을 건너오지 않아도 되게 했다. 죽순을 훔치던 사람은 이 일에 매우 부끄러워했고, 그 뒤로 이 일대에는 도둑질하는 사람이 아예 없어졌다.

많은 관리가 원염의 덕행을 흠모하여 여러 번 관직에 추천했으나, 원염은 명예와 이익에 담박하여 모두 거절했다. 그의 이야기는 《남사(南史)》, 《양서(梁書)》의 은일처사(隱逸處士)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2. 문언박이 비판자를 선하게 대한 이야기

문언박(文彦博)은 자가 관부(寬夫)이며, 북송 분주(汾州) 개휴(介休) 사람이다. 평생 인종, 영종, 신종, 철종 네 조정을 거치며 50년 동안 장상(將相)의 직을 맡았고, 태사(太師)에 추증되었으며 92세까지 장수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역사에서는 그를 가리켜 대신의 풍모가 있고 조정과 민간에서 중히 여겼다고 기록한다.

당시 어사 당개(唐介)는 강직하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한 번은 상소를 올려 문언박의 재상직 면직을 요청하며, 문언박이 익주에 있을 때 황실과 내통하여 촉 비단을 장귀비에게 선물했고 그 덕에 재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황제는 당개에게 매우 화가 나서 당개의 상소문을 던져버렸다. 당시 문언박도 전각 위에 있었는데, 당개는 문언박을 꾸짖으며 “문언박은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이미 이런 일이 있었으니 숨기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문언박은 끊임없이 당개에게 절하며 사례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자리를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당개를 영주로 유배 보냈고, 문언박은 재상직에서 파면되어 허주로 좌천되었다.

나중에 문언박은 다시 재상직에 복귀했다. 그는 황제에게 “당개는 어사로서 제 일을 말했는데, 모두 제 결점을 맞혔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소문이 와전된 오류가 있었으나 당시 그를 벌한 것은 역시 너무 무거웠습니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당개는 지간원(知諫院)으로 불려 와 원래 직책을 회복했다.

문언박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지적할 때, 심지어 그것이 오해일 수 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의 결점을 지적해 준 것에 대해 끊임없이 사례하고 겸허히 고쳤다. 원래 직책으로 복직한 후에도 그는 도량이 넓어 사적인 원한을 따지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비판하고 지적한 사람을 위해 선처를 구했다. 당시 사람들은 모두 문언박을 덕망 높은 어른으로 우러러보았다.

3. 총애와 치욕에도 놀라지 않고 담담한 이야기

당조(唐朝) 시기 노승경(盧承慶)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자는 자여(子余)이고 유주(幽州) 탁현 사람이다. 그는 조정에서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을 맡았는데, 이는 관리들의 업적과 공과를 심사하는 직책이었다.

한번은 식량을 운반하던 배가 사고로 침몰했다. 노승경이 이 일을 담당한 관리의 성적을 심사할 때 그를 중하(中下) 등급으로 매겼다. 이 결정을 해당 관리에게 알렸는데, 뜻밖에도 그 관리는 조금의 원망이나 불쾌한 기색이 없었다.

나중에 노승경은 배가 침몰한 것은 뜻밖의 사고로 인한 것이지 온전히 그 관리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그 관리의 성적을 중중(中中)으로 고쳐주었다. 그 관리는 이 사실을 알고도 여전히 매우 평온했으며 이로 인해 기뻐하지도 않았다.

노승경은 이 관리가 이처럼 총욕불경(寵辱不驚), 즉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해도 놀라지 않는 것을 보고 크게 찬탄하며 그의 성적을 중상(中上)으로 정했다.

총욕불경이란 총애를 받든 치욕을 당하든 평온하고 자약하여 얻고 잃음을 도외시할 수 있음을 뜻한다. 총욕불경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마음이 넓고 도량이 크며 공명정대하고 명예와 이익에 담박한 사람일 것이다. 이것이 아마 노승경이 이 관리를 매우 찬탄한 이유일 것이다.

4. 원한을 덕으로 갚은 주충

주충(朱沖)은 자가 거용(巨容)이며, 진(晋)나라 남안(南安)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품행이 탁월하고 학문을 매우 좋아했으며, 정적(淸靜)함을 즐기고 스스로 욕망을 절제하는 데 주력했다. 집안이 가난하여 농사를 짓는 것을 가업으로 삼았다.

한번은 이웃집 소가 없어졌는데, 이웃은 주충의 소가 자기 집에서 잃어버린 소라고 생각하여 주충의 소를 집으로 끌고 갔다. 나중에 이웃이 숲속에서 자기 소를 찾게 되자 매우 부끄러워하며 소를 주충에게 돌려주려 했다. 그러나 주충은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또 어떤 집은 항상 고의로 소를 풀어 주충네 집의 곡식을 먹게 했다. 주충은 매번 자기가 벤 풀을 챙겨서 소를 끌고 가서 돌려주었으며, 조금도 원망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소 주인은 매우 부끄러워하며 그 뒤로 다시는 예전의 나쁜 행동을 반복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관용과 덕으로 원한을 갚는 힘일 것이다.

주충은 명예와 이익에 담박하여 농사짓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고, 조정에서 여러 번 관직으로 불렀으나 모두 거절했다. 주충이 사는 곳은 소수민족과 가까웠는데, 주충의 뛰어난 덕행 때문에 소수민족 사람들은 모두 그를 매우 경앙하고 존중했다. 주충 역시 예절과 양보로 그들을 교화했다. 주충의 덕행과 교화는 온 향리에 퍼졌는데, 《진서(晋書)》에서는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고, 마을에 흉악한 사람이 없으며, 독충과 맹수조차 해를 끼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5. 왕소소가 남 돕기를 즐긴 이야기

왕소소(王昭素)는 송나라 산조(酸棗 지금의 하남 연진延津)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해박해서 유가의 구경(九經)에 통달한 동시에 노장(老莊) 학설을 연구했다. 특히 《시경》과 《역경》을 깊이 연구했으며 사람됨이 두텁고 선량하며 남 돕기를 즐기고 욕심이 적었다.

왕소소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품행이 탁월하여 향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자주 사방의 학자들을 모아 직접 가르쳤다. 향리 사람들에게 다툼이 생기면 많은 이가 관가에 가서 따지지 않고 오히려 왕소소를 찾아와 해결하려 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왕소소를 얼마나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왕소소는 물건을 살 때마다 파는 사람이 말하는 가격대로 돈을 다 주었으며, 한 번도 남과 가격을 흥정하지 않았고 가격의 높고 낮음도 따지지 않았다. 현 사람들끼리 서로 말하기를 왕 선생은 물건을 살 때 절대 값을 깎지 않으니 우리 모두 그에게 비싼 값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왕소소가 거처하는 집을 수리할 때 서까래를 문 안에 쌓아두었다. 밤에 도둑이 문을 따고 들어와 서까래를 훔치려 했다. 소소는 이를 알아차렸으나 소리를 내지 않고 오히려 서까래를 문밖으로 내던져주었다. 도둑은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부끄러워하며 떠났고, 그 뒤로 향리에는 다시는 도둑이 없었다.

왕소소의 집에는 나귀 한 마리가 있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에게 나귀를 빌리러 왔다. 왕소소는 외출하려 할 때 항상 먼저 하인에게 “밖에 나귀를 빌리러 온 사람이 있느냐?” 물었다. 하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해야 왕소소는 안심하고 밖으로 나갔다. 원래 그는 자신이 외출했다가 나귀를 빌리러 온 사람이 허탕을 칠까 봐 염려한 것이니, 그는 이처럼 선량하고 남 돕기를 원했다.

왕소소의 학문과 덕행이 이처럼 깊어 민간에서의 명성이 매우 높았다. 송 태조 조광윤은 일찍이 특별히 왕소소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법과 양생의 도리를 물었다. 왕소소는 그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만 못하고, 몸을 보양하는 것은 욕심을 적게 하는 것만 못하다[治天下,莫如爱恤百姓;养身体,莫如寡少嗜欲]”고 일러주었다. 송 태조는 이 두 구절을 병풍과 책상 위에 써 붙여두고 늘 스스로 경계하며 잊지 않으려 했다.

송 태조는 왕소소가 남아서 관직을 맡기를 바랐으나, 왕소소는 명예와 이익에 담박하여 관직에 뜻이 없었다. 송 태조는 그에게 국자박사(최고 학부인 국자학의 교수직)를 제수하고 찻잎과 약재 및 돈 20만 관을 하사하여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게 했다. 왕소소는 89세의 고령으로 장수를 누리다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6. 북위 효문제가 선량하고 인자하며 도량이 넓었던 이야기

북위 효문제(孝文帝)는 북위의 제6대 국주로, 어려서부터 선량하고 인자하며 도량이 비범했다.

효문제가 네 살 때 그의 아버지 헌문제가 종기를 앓자 효문제가 직접 입으로 고름과 피를 빨아내 주었다.

아버지 헌문제는 불도(佛道) 학설을 좋아하여 세속의 영화와 부귀를 매우 담박하고 하찮게 여겼으며 항상 집을 떠나 수행할 생각을 가졌다. 그는 조서를 내려 짐은 태고의 생활을 동경하고 뜻이 담백하여 명리를 탐하지 않으니, 특별히 태자를 황제로 승격시키고 짐은 오직 한가로이 지내며 수신양성(修身養性)하기를 구하노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제위를 당시 다섯 살인 효문제에게 선양했다. 효문제는 비통하게 울며 스스로를 가누지 못했다.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묻자 그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으려니 마음이 매우 아픕니다라고 대답했다.

효문제는 어려서부터 활쏘기에 능해 사냥하면 백발백중이었다. 15세가 되자 그는 더는 살생하지 않았고 사냥도 하지 않았다.

효문제는 일국의 군주이면서도 도량이 매우 넓었다. 한번은 시종이 음식을 올리다가 뜨거운 국을 효문제의 손에 쏟았다. 또 한 번은 식사 중에 벌레와 오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효문제는 모두 웃어넘길 뿐 그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일찍이 환관이 태후 앞에서 효문제를 무고한 적이 있었는데, 태후는 앞뒤 가리지 않고 사람을 시켜 효문제를 수십 대 매질하게 했다. 효문제는 묵묵히 받아들였고 조금의 원망도 없었다. 태후가 세상을 떠난 뒤 효문제가 친정(親政)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등 뒤에서 험담했던 그 환관을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7. 손수실이 선량하게 남을 도운 이야기

손수실(孫秀實)은 원조(元朝) 대녕(大寧) 사람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남 돕기를 매우 좋아했다.

동향 사람인 왕중화(王仲和)가 일찍이 손수실에게 부탁하여 어느 부자에게서 돈 2천 정(錠)을 빌린 적이 있었다. 나중에 왕중화는 가난하여 빚을 갚지 못하게 되자 친척들을 버려두고 혼자 도망쳐버렸다.

몇 년이 지나 왕중화의 친척들은 왕중화를 그리워하다 모두 병이 들었다. 손수실은 왕중화가 돈을 갚지 않고 혼자 도망친 것에 대해 원망하기는커녕 매일 땔감과 쌀을 보내 그의 가족을 보살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시종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손수실은 그들이 매우 가엽게 여겨져 왕중화를 대신해 빌린 돈을 갚아주었다. 그리고 빚 문서인 차용증을 왕중화의 가족에게 돌려주었으며, 또 하인에게 말을 타고 돈을 가지고 가서 왕중화를 찾아오게 하여 그들 부자가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 중 손수실의 덕행에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몇 가지 전통문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전통문화의 긍정적이고 향상하는 힘을 느낄 수 있으며, 이것이 사람에게 유익함을 알 수 있다. 중공의 당문화와 대조해 보면, 욕망이 사람의 선한 마음을 대체했다. 이익과 욕망 앞에서 사람은 일을 함에 저지선이 없고 온갖 나쁜 짓을 다 저지르며, 유일하게 못 하는 것이 선심(善心)으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중공 두목 모택동은 일찍이 “남이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남을 건드리지 않지만, 남이 나를 건드리면 나도 반드시 남을 건드린다”(人不犯我, 我不犯人; 人若犯我, 我必犯人)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을 좌우명이나 인생의 격언과 신조로 삼고 있다. 이 말에는 사람의 선한 마음이나 선한 생각이 조금도 체현되지 않았으며 오직 쟁(爭)과 투(鬪)만 있을 뿐이다. 우주의 인과응보라는 천리로 가늠해 보면 쟁과 투는 업력과 악보(惡報)를 가져올 뿐이며, 오직 선한 마음과 선한 생각만이 덕을 쌓아 사람에게 복보(福報)를 가져다줄 수 있다.

파룬궁이 말하는 진선인(真善忍)은 이 우주의 특성이다. 이 우주의 절대적인 진리이자 천기를 사람에게 알려준 것이니, 사람이 우주 특성인 진선인에 순응하여 좋은 사람이 되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으며 때려도 맞서지 않고 일을 함에 곳곳에서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한다면 고대인의 요구보다 더 높고 명확한 것이다. 생각해보라, 이러한 생명이 어디로 가겠는가! 반대로 중공의 거짓, 악, 투쟁은 생명을 어디로 데려가겠는가!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0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