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약미 정리
【정견망】
손사막(孫思邈)은 경조(京兆) 화원(華原) 사람으로, 서기 581년(또는 541년)에 태어나 68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생 남북조, 수조(陏朝), 당조(唐朝) 세 조대를 거쳤다. 《구당서•손사막전》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으로 총명했고 일곱 살에 배움을 시작해 하루에 천여 자의 문장을 암송했다. 스무 살 때는 노자와 장자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논하기 좋아했으며 불경도 좋아했다.
《열선전전(列仙全傳)》 기록에 따르면, 후주(後周) 선제(宣帝) 시기 왕실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처하자 손사막은 태백산에 은거하며 도술(道術)을 배우고 기를 연마하며 신(神)을 길러 신선이 되는 술(術)을 구했다. 손사막은 천상(天象) 운세를 추산해 꿰뚫어 보았으며 의약(醫藥)을 정밀하게 연구해 한마음으로 좋은 일을 하며 음덕(陰德)을 쌓았다. 수문제(隋文帝)가 정무를 좌우할 때 그를 국자박사로 초빙했으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 가까운 사람들에게 “50년 후 성인(聖人)이 세상에 나오실 테니, 그때 내가 그분을 도와 세상을 제도하고 사람을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50년 후 당태종(唐太宗)이 즉위하자 그를 경성으로 불렀는데, 그의 용모가 젊은 것을 감탄하고 “도(道)가 있는 이는 참으로 존중할 만하며, 선문(羨門, 신선)의 무리가 어찌 빈말이겠는가?”라고 했다. 태종이 거듭 작위를 하사하려 했으나 그는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현경(顯慶) 4년, 당고종(唐高宗)이 그를 접견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으려 했으나 그는 다시 굳게 사양했다. 그는 비록 경성에 머물렀으나 여전히 관직에 있기를 원치 않았고, 다만 제자 유신위(劉神威)를 태의원에 추천했다. 이 기간에 경성의 명사 송령문(宋令文), 맹선(孟詵), 노조린(盧照隣) 등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고종 상원(上元) 원년(676년)에 그는 병을 핑계로 귀향을 청했고, 고종은 특별히 좋은 말을 내리고 파양(鄱陽)공주의 성읍을 하사해 거주하게 했다.
손사막의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은 당 고종 영휘(永徽) 3년(652)에 완성되었으며, 중국 최초의 임상 백과전서로 칭송받는다. 이름을 《천금요방》이라 지은 이유는 손사막이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하여 천금보다 귀하다. 처방 하나로 구제하니 그 덕이 이보다 크다”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저작에는 모두 ‘천금’이라는 두 글자가 붙었다.
《천금요방》은 총 30권으로 233문(門)으로 나뉘고 방론(方論) 5300조, 53만 자에 달한다.
《천금익방(千金翼方)》은 230문에 방론 2700조, 41만 자이다.
두 부의 《천금》을 합하면 94만 자, 463문, 방론 8000여 조에 달한다. 그 규모의 방대함과 내용의 광범위함, 서술의 정밀함은 전례가 없던 것이다.
《천금요방》 첫 권에서 손사막은 ‘대의정성(大醫精誠)’을 편명으로 삼아 의술을 펼치는 자의 의덕(醫德)을 논했다. 《진후(診候)》 편에서 손사막은 또한 “옛날에 의술을 잘 펼치는 자 중 상의(上醫)는 나라를 고치고, 중의(中醫)는 사람을 고치며, 하의(下醫)는 병을 고친다. 또 말하기를 상의는 소리를 듣고, 중의는 안색을 살피며, 하의는 맥을 짚는다. 또 말하기를 상의는 병이 나기 전의 병을 고치고, 중의는 병이 나려는 병을 고치며, 하의는 이미 난 병을 고친다. 만약 마음을 더하고 정성을 쏟지 않아 일에 혼용이 생기면 병자를 구하기 어렵다”라고 제시했다.
이 외에도 그는 고종 현경 4년(659년) 세계 최초의 국가 약전인 《당신본초(唐新本草)》를 완성했는데, 그림과 글이 함께 실려 있으며 총 55권에 844종의 약물을 포함했다.
청대 의학자 서대춘(徐大椿)은 《의학원류론(醫學源流論)》이라는 책에서 역대 의가와 의서를 평가하며, “손사막의 《천금방》이 장중경과 다른 점은 그 속에 한 가지 병에 여러 처방이 있기도 하고 또 여러 병에 한 가지 처방이 있기도 하니, 이는 ‘의도(醫道)의 일대 변혁’이며 그 ‘의도의 기발함과 용약(用藥) 효과 또한 일가(一家)를 이뤄 마모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손사막 고향의 약왕묘(藥王廟)에는 ‘인선진맥(引線診脈)’ 벽화가 있는데, 이는 손사막이 장손 황후의 병을 치료한 이야기를 전한다. 민간에는 손사막이 세 번 봉작을 사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당태종 이세민이 한 번 봉했고 당고종이 또 두 번 봉했으나 모두 거절했다.
당태종의 관직 하사를 거절한 후 장손 황후의 생명이 위독해지자 황제가 성지를 내려 손사막은 다시 황궁으로 불러갔다. 장손 황후는 임신한 지 십여 개월이 지났으나 해산하지 못하고 중병을 앓고 있었다. 많은 태의가 진찰했으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손사막은 황궁에 들어갔으나 남녀가 유별하다는 예법에 따라 황후 곁의 궁녀에게 병세를 물은 뒤 실 한 가닥을 꺼내 궁녀에게 황후의 오른손 손목에 묶게 했다. 손사막은 실의 한쪽 끝을 잡고 진맥을 했는데 이를 인선진맥 혹은 현사(懸絲) 진맥이라 한다.
잠시 후 손사막은 진맥을 마쳤다. 태아의 위치가 바르지 않은 것으로 진단되니 민간에서는 소아판심(小兒扳心)이라 불렀다. 이에 궁녀에게 황후의 왼손을 휘장 밖으로 붙들게 한 뒤 손사막이 황후의 중지(중충혈)에 침을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황후는 순조롭게 황자를 낳았다. 원래 손사막은 신통(神通)을 시전해 운용한 것인데, 이 실은 단지 사람들이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려는 전시 방법이었을 뿐이다.
손사막은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을 뿐만 아니라, 수련(修煉)에도 방법이 있고 의덕(醫德)이 고상했기에 그 덕(德)이 사람이 아닌 이류(異類)에게까지 미쳤다는 신기한 전설을 남겼다. 어느 깊은 밤, 손사막의 초가집 나무문이 두드려졌다. 문을 열어보니 문밖에 백의 수사(秀士)가 서 있었는데, 당시 하늘에는 뇌성이 치고 번개가 번뜩이며 폭우가 쏟아졌으나 이상하게도 이 백의 수사의 옷에는 물방울이 전혀 묻지 않았다.
손사막이 “병을 보러 왔소?”라고 묻자 백의 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사막이 그를 방으로 들여 앉힌 뒤 맥을 짚고는 “그대는 인류가 아니구려?”라고 말했다.
백의수사가 흠칫 놀라며 “무엇을 보고 아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손사막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그대가 올 때는 번개와 뇌성, 광풍과 폭우가 돕고, 가만히 있으면 비바람과 번개가 모두 멈추오. 그대의 옷이 폭우 속에서도 전혀 젖지 않았으니 그대는 분명 수부(水府)의 존엄인 신룡(神龍)이 아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백의수사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진인(真人)의 명성은 하늘 위와 땅 아래에서 모르는 곳이 없으니 참으로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병세를 소개하기를 “며칠 전 잠시 배가 고파 급히 음식을 먹었는데 무엇인지 식도를 막아버렸습니다”라고 했다.
손사막은 이 말을 듣고 동자에게 탕약 한 통을 가져오게 해 백의 수사 앞에 두고 어서 마시라고 재촉했다. 백의 수사가 단숨에 탕약 한 통을 들이키자 뱃속이 뒤틀리더니 긴 뱀 한 마리를 토해냈다. 손사막이 이르기를 “그대의 병뿌리는 제거되었으나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다시 침 한 대를 놓아주면 영원히 편안할 것이오”라고 했다. 즉시 한 자 남짓한 금침을 꺼내 그의 머리 정수리 뒤편 위치를 향해 홀연히 찔렀다. 그러자 백의 수사는 즉시 본래 모습인 은빛 비늘이 번쩍이는 거룡으로 변했다.
손사막은 이어서 “내가 금침을 뽑으면 그대는 즉시 이 산의 암석 벽을 뚫고 구름 속으로 솟구치시오. 그러면 그대의 원기가 진정으로 회복될 것이오”라고 말하며 용의 몸에서 금침을 뽑고 “어서 석벽을 뚫으시오!”라고 외쳤다. 그 백룡은 몸을 비틀며 산바위로 돌진했고 금세 석벽 안으로 숨어 사라졌다. 손사막이 문을 열어보니 공중에 번개 한 줄기가 치고 백룡의 형체가 구름 속에서 몇 번 흔들리더니 아득한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손사막은 또한 사람의 앞날과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었는데, 이는 지금 공인된 숙명통(宿命通) 기능과 유사하다. 《구당서》에 이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태자첨사(太子詹事) 노제경(盧齊卿)이 어렸을 때 손사막에게 자신의 미래를 물었는데, 손사막은 “그대는 50년 후에 방백(자사)의 자리에 오를 것이며 나의 손자가 그대의 하급 관리가 될 것이오”라고 일러주었다. 당시 손사막의 손자인 손부(孫溥)는 아직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훗날 과연 노제경은 서주(徐州)자사가 되었고 손부는 서주 소현(蕭縣)의 현승(縣丞)이 되었으니 즉 노제경의 부하가 된 것이다.
당초 위징 등이 조칙을 받아 제(齊), 양(梁), 주(周), 수(隋) 등의 사서를 편찬할 때 누락될 것을 염려해 여러 차례 손사막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는 친히 눈으로 본 것처럼 구두로 설명해 주었다. 동대시랑(東台侍郎) 선처약(孫處約 고종 대에 재상을 지내고 《태종실록》을 편찬)이 일찍이 다섯 아들 손정(孫侹), 손경(孫儆), 손준(孫俊), 손우(孫佑), 손전(孫佺)을 데리고 손사막을 배알했다. 손사막이 이르기를 “준은 먼저 귀하게 될 것이고, 우는 늦게 영달할 것이며, 전은 명망이 가장 높겠으나 병권을 잡는 데 화(禍)가 있을 것이오”라고 했다. 훗날 모두 그의 말처럼 응험되었다. 손전은 예종 때 좌우림(左羽林)대장군이 되었으나 거란 정벌에서 전사했다.
양생(養生)과 수련은 먼저 덕(德)을 닦아야 하는데, 당연히 수련에는 더 높은 요구가 있다. 손사막은 마지막에 진인(真人)으로 수련 성취했다. 당고종 영휘 원년(682년), 손사막은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단정히 앉았다. 그러고는 자손들에게 “장차 무하지향(無何之鄉 신선의 세계)으로 올라가 금궐(金闕)에서 신하가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내가 장차 승천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선서(仙逝 신선의 죽음)한 지 한 달여가 지나도록 얼굴 모습이 살아있을 때와 같아 변함이 없었다. 관을 들어 장례를 치를 때 보니 안에는 빈 옷만 남아 있었으니 이는 “이미 시해(屍解)한 것”이다(송대 《운급칠첨》).
도가에서 신선이 되는 데는 주로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황제처럼 용을 타고 백일비승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손사막처럼 ‘시해(尸解)’하는 방식이다. 사실 그는 이미 득도해서 신선이 된 것이다. 훗날 어떤 이가 아미산에서 그를 본 적이 있다고 한다. 소동파가 지은 《제손사막진(題孫思邈真)》이란 시를 증거로 삼는다.
“선생께서 가신 지 오백 년이나,
오히려 아미산 서쪽 산굽이에 계시는구나.”
先生一去五百載
猶在峨眉西崦中
안사의 난 때 당 현종이 촉지(蜀地)로 피난 갔다가 꿈에 손사막이 무도(武都)에서 생산되는 웅황을 하사해 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았다. 이에 궁중의 사자를 파견해 웅황 열 근을 가지고 아미산으로 보냈다. 사자가 아직 아미산 중턱에 이르기 전, 머리에 폭건을 쓰고 거친 베 저고리를 입은 한 사람을 보았는데 눈썹이 하얗고 곁에는 머리를 둥글게 짠 청의동자 둘을 데리고 있었다.
그가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약은 이 바위 위에 두면 되오. 바위 위에 표문 한 부가 있으니 베껴 써서 돌아가 성상(聖上)께 답례하시오”라고 했다.
사자가 바위 위에 수백 개의 큰 글자가 쓰인 것을 보고 그것들을 초록했는데, 베껴 쓰는 동안 바위 위의 글자가 하나씩 사라졌다. 다 쓰고 나니 바위 위에는 글자가 없었다. 잠시 후 흰 안개가 사방에서 일더니 손사막과 동자가 홀연히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손사막은 중화 의학 발전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별이며 천여 년 동안 줄곧 사람들의 높 평가와 존숭을 받아왔다. 그는 중국은 물론 세계 역사상 유명한 의학자이자 약물학자로 약왕(藥王)이라 불리며, 도교에서는 천의묘응광원선제진군(天醫妙應廣援善濟眞君)으로 받들어졌다.
당태종 이세민은 손사막에 대해 이렇게 칭찬했ㄷ.
“길을 뚫어 여시니 대의(大醫) 중에 으뜸이라.
세 성인을 보좌하고 사시를 조화시키셨네.
용과 호랑이를 항복시키며 쇠약하고 위급한 이를 살리시니,
위대하고 당당하구나 백대(百代)의 스승이로다“
鑿開徑路,名魁大醫。
羽翼三聖,調和四時。
降龍伏虎,拯衰救危。
巍巍堂堂,百代之師。
송 휘종은 그를 ‘묘응진인(妙應真人)’으로 봉했고, 명 세종은 그를 ‘선신(先臣)’으로 정했으며, 청 순치제는 그를 ‘신의(神醫)’로 받들었다.
[역주: ‘선신(先臣)’이란 역대 왕조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신하들을 선별해 특별히 조정에서 제사를 챙겨준다는 의미로 명 세종이 얼마나 도를 중시하고 손사막을 존경했는지 알 수 있다.]
손사막의 전설은 수련하는 고인(高人)은 속인과 달리서 신통이나 공능을 표현할 수 있으며, 중화민족의 예로부터 내려온 수련 문화를 입증한다. 또한 역사상 여러 조대의 군왕과 민간의 광범위한 찬사를 받았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남겨주었다.
원문위치: https://zhengjian.org/node/28479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