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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살 칼을 내려놓고 가문의 영광을 지킨 장군

안단(顔丹)

【정견망】

조대(朝代)가 시작된 이래 중원 대지에서는 항상 나누어지면 합쳐지고 합쳐지면 나누어지는 큰 드라마가 상연되었다. 예를 들어 당조 말년 오대십국(五代十國)이 역사 무대에 등장했으나 짧은 정권 할거와 군벌 혼전을 거친 후 다시 일방을 점거하던 소국들이 잇따라 송조(宋朝) 황제에게 신복(臣服)하고 귀순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이른바 하늘의 뜻에 따르는 자는 번창한다고 했으니 국면을 명확히 보고 천의에 순응하고자 하며 도살 칼을 내려놓고 신하를 자처하며 머리를 숙인 장수들은 자신을 보전하고 선종(善終)했을 뿐만 아니라 새 왕조에서도 특별한 영예와 은총을 받았으며 가문의 영광을 지키고 자손의 앞날을 열어었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다 훗날 천주(泉州)와 장주(漳州) 두 곳의 군정 요무를 관장했던 절도사 진홍진(陳洪進)도 바로 그중 한 사람이었다.

진홍진은 겉은 차가우나 속은 따뜻한 사람으로 전장에서는 살벌(殺伐)을 결단했으나 마음속에는 부처님을 향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그가 송 태조 건덕(乾德) 3년(965년) 천주의 구일산(九日山)에 올라 구름 끝에 우뚝 솟은 천연 거석에 미륵 좌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이 좌상은 이미 천 년의 세월을 거쳤으며 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석불 조상이다.

진 장군이 불교를 믿은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는 그가 젊은 시절 조우한 한 승려와 관련이 있다. 당시에 그는 천주 절도사 유종효(留從效)의 부장이었다. 행운(行雲)이라는 이름의 화상이 복주(福州)에서 천주로 왔다. 이 화상은 언행이 미친 듯하여 거리 사람들이 모두 그를 피했다. 그러나 진홍진은 그를 남다르게 대우하여 공경했을 뿐만 아니라 집으로 청해 정성껏 공양했다.

송 태조 건륭(乾隆) 2년(961년) 초 어느 날 행운이 갑자기 진홍진에게 말했다.

“당신은 곧 천주 이 산하의 주인이 될 것이며 바로 올해 안입니다. 나는 요사이 복주에 가서 한동안 머물다 가을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행운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절도사 유종효가 세상을 떠났다. 가을이 되자 진홍진은 다른 장군인 장한사(張漢思)를 유후(留後, 대리 절도사)로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副史)가 되었다.

이때 행운 화상이 돌아왔다. 그가 진홍진을 보자마자 말했다. “인간 세상의 과보(果報)는 모두 정해져 있는 법입니다. 사람이 비록 천 전(錢)의 봉록만 가졌을지라도 이는 계책으로 얻은 것이 아닌데 하물며 장상(將相)의 지위를 어찌 무력으로 강취할 수 있겠습니까? 장한사는 의심이 많아 전후로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천명에 귀속되었다면 그가 어찌 당신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당신이 지금 그와 똑같이 의심으로 인해 사람의 목숨을 취하려 한다면 응보가 즉시 닥칠 것이니 아마 선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행운이 이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고 진홍진은 나중에야 이 말의 깊은 뜻을 깨달았다. 당시 장한사는 이미 나이가 많았고 성격이 나약해 도저히 대국을 주재할 수 없었기에 군대와 관청의 크고 작은 사무를 모두 진홍진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홍진은 군중에서 명망이 높아졌다. 장한사의 몇몇 아들들은 마음이 달갑지 않아 그를 몹시 질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홍문연을 차려 진홍진이 연회에 오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소식은 곧 진홍진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과 상의한 후 선제공격을 가해 병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거사 당일 진홍진은 평복을 입고 두 아들과 수백 명의 군사를 데리고 장부(張府)에 왔다. 그는 군사들을 대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두 아들과 함께 장부로 들어갔다. 장한사의 거처 앞에 이르러 그는 먼저 소매 속에 숨겨온 큰 자물쇠를 꺼내 방문을 잠근 후 방 안의 장한사에게 외쳤다. “군 중 상하가 모두 나더러 유후(留後 절도사)가 되라 하고 장졸들의 기세가 격앙되어 나도 사양하기 어려우니 인장을 내놓으시오!”

이때 장한사는 이미 넋이 나가 서둘러 문틈으로 인장을 내밀었다. 진홍진은 인장을 들고 장부를 걸어 나와 밖의 군사들에게 외쳤다. “장 장군이 연로하여 더는 정무를 처리할 수 없게 되어 인장을 내게 넘겼으니 이제부터 군 중 사무는 내가 전권으로 책임진다.” 말이 끝나자마자 대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주요 장령들이 모두 와서 진홍진에게 축하를 표했다.

그 후 진홍진은 장한사를 교외의 별원에 연금했다. 그의 몇몇 아들들이 여러 번 아버지를 권해 후환이 있을 수 있으니 장한사를 제거하자고 했으나 진홍진은 행운이 한 말을 생각하며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천주를 관할하던 16년 동안 그는 단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 사형 판결을 받았으나 정상이 참작될 만한 사람을 만나면 대부분 사형을 면해주었다.

이 기간 행운은 줄곧 천주에 머물렀다. 하루는 그가 갑자기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진씨 가문에서 5 제후가 나올 것이며 5년 후에는 천군만마가 노래 부르고 춤추며 이곳에 주둔할 것이니 성안은 기쁘고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할 것이다.” 당시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했다. 진홍진이 관할하는 곳은 장주와 천주 두 곳뿐인데 어찌 다섯 명이나 후(侯)에 봉해질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어떤 이는 그가 정주(汀州)와 건주(建州)를 공략해 자신의 지대를 넓힐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진홍진은 권모(權謀)는 있었으나 야심이 크지 않았다. 그는 천주를 주재한 후 먼저 남당(南唐)에 복종했다가 훗날 송 태조가 중원을 통일할 때의 명성과 기세에 신복해 형세를 살피고 북송에 신복하기를 결정했다. 그때부터 그는 매년 송 조정에 공물을 바쳤고 일편단심으로 장주와 천주를 북송의 판도에 편입시키기로 약속했다.

태조와 태종 두 황제는 그의 협의(俠義)와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태조 황제는 그를 추성순화공신(推誠順化功臣)에 봉하고 평해군절도사(平海軍節度使), 천장등주관찰사(泉漳等州觀察使), 검교태부(檢校太傅) 등의 관직을 맡겼다. 태종 황제는 계속해서 그를 무녕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 동평장사(同平章事)로 봉하고 변경(汴京)에 머물게 했다. 태종을 따라 태원(太原)을 정벌한 후 진홍진은 다시 기국공(杞國公)에 봉해졌고 3년 후 기국공(岐國公)으로 고쳐서 제수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태종은 그를 위해 이틀간 조회를 폐했으며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하고 충순(忠順)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진홍진이 절도사에 봉해졌을 때 그의 아들 문현(文顯), 문복(文福), 문호(文灝), 문왕(文王)이 각각 통주(通州)단련사, 저주(滁州)자사, 강주(康州)자사, 이주(颐州)자사에 봉해졌다. 이로써 진씨 가문에서 다섯 제후가 나온다는 말이 응험한 셈이다. 당시 송의 군대가 마침 천주에 주둔했는데 군사들이 화살통을 몸에 거꾸로 매고(싸우지 않겠다는 뜻) 길을 오며 악기를 연주했다. 백성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니 그 기쁜 장면은 행운이 당시 말한 것과 똑같았다.

참고자료: 《양문공담원(楊文公談苑)》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