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전】 11: 천명을 받들어 태산에서 여덟 차례 봉선
에포크타임스 문화소조

한무제는 위로는 진시황과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라 일컬어지고, 아래로는 당 태종과 함께 한당성세(漢唐盛世)를 창조한 천고일제(千古一帝)다. (유쯔/에포크타임스)
옛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공경하고 신(神)을 믿는 전통이 있었으며, 성대하고 장엄한 전례(典禮)로 신명(神明)을 공경하여 받드는 것은 위로는 군왕부터 아래로는 백성까지 모두 매우 중시하는 큰일이었다. 역대로 제왕은 천자(天子)라고 일컬어졌으니, 곧 하늘로부터 명을 받은 것이며, 그들은 흔히 상천(上天)에 제사 지내고 기도하는 방식을 통해 한편으로는 신의 보우를 빌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이 국가의 기후를 순조롭게 해 민생이 편안하고 즐겁게 보우해 주신 것에 감사드렸다.
각종 제전(祭典) 중에서 봉선(封禪)은 국가의 가장 중요한 대전 중 하나다.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왕자(王者)가 명(命)을 받으면 반드시 봉선을 한다. 봉(封)은 높음을 더하는 것이요, 선(禪)은 두터움을 넓히는 것이다. 하늘은 높음으로써 존귀하고, 땅은 두터움으로써 덕이 된다. 그러므로 태산의 높음을 더하여 하늘에 보답하고, 양보산의 터를 닦아 땅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즉, 천명을 받든 천자는 반드시 봉선을 해야 하니, 곧 천지에 제사 지내는 것입니다. 인간의 천자가 태산에서 천지에 제사 지낸 후에야 진정으로 하늘로부터 명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한무제의 공적
한무제 이전 역사상의 성명(聖明)한 군주들, 예를 들어 복희, 신농씨, 염제,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 순, 우, 탕, 주 성왕(成王) 등이 모두 태산에 올라 융숭한 제전을 거행했다. 진시황 역시 중국 황제로서는 최초로 천지에 자신이 취득한 공적을 알리고 비석을 세워 기념했다. 그러나 이후 한초 경제 회복이 급선무였고 황제가 무위(無爲)정치를 주장했기에 봉선 활동은 한때 중단되었다.

한무제는 즉위 30년 이래로 안으로는 예악을 닦고 옛것을 변하여 제도를 창제했으며, 밖으로는 변경을 개척하여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풀어 한무성세(漢武盛世)를 개창했다. (그림은 명대 구영이 그린 《청명상하도》에 묘사된 전당포 등 가게들이다.)
한무제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떤 이는 “천하가 평안하다”며 봉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봉선을 통해 국가의 제도를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무제는 유가 사상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주장했고, 이는 황로학설을 주장하며 정사를 다스리던 두태후와 충돌을 일으켰다. 그래서 한무제는 잠시 자신의 정치 이념을 내려놓았고, 봉선의 일도 잠시 좌초되었다.
원수 원년(기원전 122년), 제북왕(濟北王)이 한무제에게 상서를 올려 태산 및 그 부근 지역을 자진하여 헌납했다. 한무제가 이를 수용한 뒤 다른 곳을 봉해 제북왕에게 보상했다. 그러나 원봉 원년(기원전110년), 즉 한무제가 즉위한 지 30년이 되어서야 그는 비로소 인생의 첫 번째 봉선을 시작했다.
이 30년 동안 한무제는 정치적으로 “유술만 독존(獨尊儒術)” 했으며, 정치 제도와 사회 제도의 형식으로써 유학을 중화 왕조의 정통 통치 사상으로 확립했다. 다른 한편 한무제는 다른 학설을 철저히 배척하지도 않고 그 활동을 허용했고, 심지어 재능 있는 자는 유자가 아니어도 중용했다. 동시에 한무제는 대일통을 위해 제자백가의 학설 중 유용한 부분을 선택해 스스로 사용했다.
한무제는 또한 연호를 세우고 태초력을 반포하며 태학을 건립하고,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선발하여 통일 대업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동시에 한무제는 옛것을 변하여 제도를 창제했으니, 재상권을 줄이고 찰거(察舉)를 시행하며, 왕국을 삭감하고, 병제(兵制)를 고치며, 자사(刺史)를 설치하고 화폐를 통일하며, 염철을 전매하고 ‘평준’과 ‘균수’를 세워 시행하는 등 중대한 개혁과 창제를 하여, 한 세트의 계통적이고 완전한 정치 제도를 건립했다. 이는 이후 2천 년 중화 제국 제도의 기본 모델이 되었다.
그 외에도 웅재대략한 한무제는 동으로는 고조선을 아우르고, 서로는 대완을 정벌하며, 북으로는 흉노를 물리치고, 남으로는 백월을 멸해 오랑캐를 물리치고 국토를 넓혔으니, 서한의 강역이 무제 후기에 이르러 극성함에 도달하게 했다. 당시 서한의 강역은 서북으로는 지금의 신강과 감숙 지역을 포함하고, 동북으로는 한반도에서 대해(大海)까지 확장되었으며, 서남으로는 지금의 운남 고려공산과 애뢰산 일선에 도달했고, 남으로는 복건, 해남도 등에 도달했다. 한무제 때의 강역은 후세 중화 제국 판도의 기초가 되었다.
이 30년 사이에 한무제는 또한 역사상 유명한 실크로드를 개척하여, 한 제국과 서역,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나아가 유럽과의 상업 왕래를 강화했으며 외래 문화 또한 이때부터 대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무제의 공적은 확실히 앞선 몇몇 제왕들을 초과했으니, 그가 태산에서 봉선하는 것은 확실히 명분이 있었다. 그리하여 원봉(元封) 원년, 휘황찬란한 문치와 무공의 성취를 거둔 한무제는 곧 그의 봉선 여행을 시작하고자 했다. 한무제는 처음으로 태산 봉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조건이 구비되어야 한다고 명확히 제시했다.
첫째, 반드시 우내(宇內)를 소탕하고 천하를 일통해야 한다.
둘째, 반드시 천하가 태평하고 장기적으로 잘 다스려져야 한다.
셋째, 반드시 상서로운 천상(天象)이 끊임없이 나타나야 한다.
앞의 두 가지는 명백한 사실이었고, 원수 원년부터 한조는 선후로 흰 기린, 보정(寶鼎) 등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국가의 부유함과 하늘이 보여준 부서(符瑞)는 모두 황제의 봉선 대전이 반드시 행해져야 함을 밝혀주었다.
봉선 전야
한조가 건립된 이래 이 첫 번째 봉선에 대해 한무제 군신은 모두 극히 중요하게 여겼으나, 구체적인 제사 의식을 토론할 때 백관들이 모두 난처해했다. 진시황이 봉선한 이래로 제사 전례가 수십 년간 중단되었기에, 공경(公卿) 유신(儒臣)들은 《상서》, 《주관(周官)》, 《왕제(王制)》 등 고문헌에서 고례(古禮)를 추적할 수밖에 없었으나 모두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무제는 또한 전대의 제기(祭器)를 꺼내 대신들에게 보여주었으나, 어떤 이는 이것이 고대에 쓰던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당시 대문호 사마상여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유서 한 통을 남겨 무제의 공덕을 찬송하고 무제가 조속히 봉선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한무제는 이 유서를 들고 명유(名儒) 아관(兒寬)에게 물었다.
아관의 건의는 이러했다. “태산에서 봉(封)하고 양보에서 선(禪)함은 황제의 대전입니다. 구체적인 의식은 오직 성명하신 천자만이 제정하실 수 있는 것이지 신하된 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백관들이 더 논의해 봤자 아무런 결과가 없을 것입니다.”
한무제는 그의 견해에 동의했고, 그리하여 직접 봉선 예의를 초안했다. 한무제는 “먼저 군대를 떨쳐 군사를 사열한 뒤에 봉선한다”는 옛 제도를 준수해, 먼저 사방의 신민(臣民)들에게 강력한 군사 역량을 과시하고 성대한 순행(巡行) 활동을 전개했다. 연초부터 한무제는 12부 장군을 두어 직접 18만 군사를 거느렸으니, 깃발이 1,000여 리나 이어졌으며 장성에서 출발하여 북으로 변방을 순행하여 삭방(朔方)에 이르고 다시 북하(北河)에 이르렀다.
한무제는 흉노 선우에게 사자를 보내 알렸다. “남월왕의 머리가 이미 장안성 위에 걸려 있다. 만약 선우가 싸울 수 있다면 한(漢) 천자가 북쪽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맞이해 싸울 것이요, 만약 싸울 수 없다면 속히 와서 신복(臣服)하라.” 결과적으로 흉노는 한무제의 군위(軍威)에 겁을 먹고 감히 나타나지 못했다. 이번 순행에서 군사를 되돌려 조정으로 돌아오는 길에 한무제는 또한 교산(橋山)의 황제릉(黃帝陵)에 제사 지낸 후 장안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봄, 한무제는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중악(中嶽)인 숭산에 왔는데, 수행하던 자가 준마 한 필과 신기한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며 산 위에서 “만세”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한무제는 이를 길조로 삼아 사관(祠官)에게 명해 태실사(太室祠)를 증축하게 하고 산 위의 나무를 베는 것을 금지했으며, 산 아래의 300 가구를 떼어내 숭산의 봉읍(奉邑)으로 삼았다.
다시 길조를 얻은 한무제는 흥에 겨워 태산으로 출발했다. 태산에 도착했을 때 풀과 나무가 아직 자라지 않았기에, 한무제는 사람을 시켜 태산 옥황(玉皇) 정상에 돌 하나를 세우게 하고 자신은 먼저 동해를 순행하러 갔다. 한무제는 타고난 혜근(慧根)이 있고 특히 신선의 도(道)를 좋아했기에 늘 명산대천과 오악에 가서 기도했는데, 그러므로 태산과 동해의 행차에는 신선을 찾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무제는 동해 일대에 도착한 후 팔신(八神)에게 예의를 갖추어 제사 지냈다. 제나라 사람들이 앞다투어 상서를 올려 신괴(神怪)와 기이한 방술(方術)을 논했다. 이에 무제는 많은 배를 징발하여 수천 명으로 하여금 봉래산(蓬萊山)의 신인(神人)을 찾게 했다.
천자의 행차에는 항상 방사 공손경(公孫卿)이 천자의 부절(符節)을 들고 먼저 도착하여 명산승경에서 천자의 가마를 맞이했다. 이번에 공손경이 도착한 후 말하기를, 밤에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사람을 보았는데 신장이 수 장(丈)이었고 가까이 가니 보이지 않았으며 단지 아주 큰 발자국만 남았는데 형상이 금수(禽獸)의 발자국 같았다고 했다. 어떤 대신은 노인이 개를 끌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내가 신공(臣公)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더니 갑자기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무제는 큰 발자국을 보고도 믿지 못하다가, 대신이 개를 끄는 노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것이 선인(仙人)임을 깊이 믿었다. 이로 인해 특별히 해상에서 머물며 선인을 기다렸고, 방사들이 역참의 수레를 타고 오가며 소식을 전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며칠을 기다려도 한무제는 신선을 보지 못했는데, 이때 태산의 풀과 나무가 자라기 시작했으므로 한무제는 태산으로 가서 봉선하기로 결정했다.
제사 대전(大典)
《사기·효무본기(孝武本紀)》는 원래 소실되었고, 현재 우리가 보는 전기는 사실 「봉선서(封禪書)」가 대신한다. 여기서 한무제의 첫 번째 태산 봉선의 대체적인 경과를 살펴보자.
이해 4월, 한무제는 먼저 양보산에 도착해 예로써 지신(地神)에게 제사 지냈다. 그는 시중과 유자(儒者)들에게 융숭한 예복, 즉 머리에는 사슴 가죽 모자를 쓰고 홀(笏)을 꽂은 관복을 입게 하고 직접 사우례(射牛禮 제물로 바칠 소를 활로 쏘는 의식)를 거행했다. 그 후 한무제는 태산 동쪽 산기슭에 단을 설치해 하늘에 제사 지냈다. 제단은 너비가 1장 2척, 높이가 9척이었으며 단 아래에는 옥첩서(玉牒書)가 묻혀 있었으니, 이는 한무제가 천제(天帝)에게 쓴 편지였고 서신 내용은 은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제례가 끝난 후 한무제는 홀로 고인이 된 곽거병의 아들로 시중이자 봉거도위 곽자후(霍子侯)를 데리고 태산에 올랐으며, 산정에서 똑같이 비밀스러운 제천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다음 날 한무제는 태산 북면으로 하산해 태산 기슭 동북쪽의 숙연산(肅然山)에서 지신에게 제사 지냈는데, 후토(后土)에게 제사 지내는 의식과 같았다.
전체 봉제(封祭)와 선제(禪祭) 과정에서 한무제는 모두 직접 절을 올렸고 황색 예복을 입었으며 곁에는 예악(禮樂) 연주가 뒤따랐다. 한무제는 또한 먼 곳에서 공물로 들어온 기이한 짐승, 날짐승 및 흰 산닭 등 동물을 산림에 방생했다. 전례(典禮)를 거행할 때 밤에는 마치 빛이 나타나는 듯했고 낮에는 흰 구름이 제단 속에서 솟아올랐다. 이는 마땅히 신령(神靈)의 현현이었을 것이며, 전체 전례 과정은 일종 신비한 분위기와 웅대한 기백을 드러냈다. 봉선이 끝난 후 한무제는 태산 기슭의 명당(明堂)에서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고, 첫 번째 봉선을 기념하여 연호를 원정(元鼎)에서 원봉(元封)으로 고쳤다. 원봉의 ‘봉(封)’은 당연히 ‘봉선’을 가리킨다.
한무제는 태산 봉선 후에 다시 동으로 해상을 유람하며 북으로 갈석에 이르렀으며, 요서를 거쳐 구원을 지나 5월에 감천(甘泉)으로 돌아왔다. 무제의 봉선 노정은 총 1만 8,000리였으니 그야말로 기세가 웅혼했다. 한무제는 태산 봉선 의식을 마친 뒤 문고(文告)를 발표했는데, 서두에서 겸허하고 경건한 어조로 봉선 경과를 서술했다.
“짐이 미천한 몸으로 지고한 제위를 계승하여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까 걱정했으며, 덕행이 얕아 예악 제도를 알지 못했다. 태일신(泰一神)께 제사 지낼 때 연속해서 상서로운 광채를 보았기에 이에 태산에 올라 천신께 제사를 지내고, 다시 숙연산에서 지신께 제사를 지냈다.”
그 후 한무제는 도덕을 닦고 군신과 더불어 제구포신(除舊布新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펼침)하겠다는 염원을 표시했다. 동시에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소, 양, 술, 포목 등을 널리 하사했으며, 태산 주변의 봉고(奉高), 역성(曆城) 등지의 연조(年租 1년 세금)를 면제했다. 천자의 가마가 지나간 곳은 무릇 모든 노역을 면제했다.
원봉 3년(기원전109년), 첫 번째 봉선으로부터 단지 1년의 시간이 흐른 뒤 한무제는 다시 태산에 왔다. 이번에는 매우 중대한 일이 발생했으니, 바로 태산에 명당을 수축한 것으로 이는 한무제가 즉위 첫해부터 세웠던 명당 건립의 소망을 실현한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명당은 하(夏), 상(商), 주(周)로부터 유전되어 온 중대한 전례를 거행하던 궁실로, 하대(夏代)에는 세실(世室), 상대(商代)에는 중옥(重屋), 주대(周代)에는 명당이라 불렀다. 주공(周公)이 성왕을 보좌할 때 명당 안에서 제후들을 크게 모아 예악을 정하고 존비(尊卑)를 밝혀 천하태평과 만국래조(萬國來朝)의 성황을 드러냈다. 한대에 이르러 한무제는 태산 아래의 명당 터가 험하고 너비가 충분치 않다고 여겨 중건(重建)을 명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명당을 어떤 모양으로 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때 제남(濟南) 사람 공옥(公玉)이 황제(黃帝) 때의 명당도를 바쳤다. 이 그림 속의 명당은 정중앙이 대전이고 사방에 벽이 없으며 띠풀로 지붕을 덮었다. 전(殿) 위에는 다락이 있고 복도(複道)를 세웠는데, 사람이 남서쪽의 복도를 통해 대전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곤륜도(昆侖道)’라 불렀다. 천자가 이곳을 통해 대전에 들어가면 천제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었다. 대전 밖에는 또한 물이 한 바퀴 둘러싸고 있었다.
이에 한무제는 조서를 내려 봉고읍의 문수(汶水) 가에 이 ‘황제 시기 명당도’를 따라 명당을 건조하게 했다. 원봉 5년(전106년), 무제가 다시 태산에 왔을 때 이 명당의 상층에서 천제와 오제(五帝)에게 제사 지내고 명당 하층에서 후토를 제사 지냈다.
첫 번째 태산 봉선 후, 원봉 3년(기원전 109년), 원봉 5년(기원전 106년), 태초 원년(기원전 104년), 태초 3년(기원전 102년), 천한 3년(기원전 98년), 태시 4년(기원전 93년) 및 정화 4년(기원전 89년)에 한무제는 선후로 일곱 차례 더 태산에 가서 봉선했다. 한무제는 전후 21년의 시간 동안 태산에서 여덟 차례 봉선했으니, 평균 3년이 못 되어 한 번씩 한 셈이다.
한무제의 태산 봉선은 서한 성세(盛世) 중의 한 가지 대사였다. 삼국시대의 조식은 《한무제찬(漢武帝贊)》이란 시에서 “하늘에 봉하고 땅에 선하니 공이 백 왕을 넘는다(封天禪土, 功越百王)”라는 말로 한무제의 업적을 찬송했다. 서한의 역사가 사마천은 〈금상본기(今上本紀)〉를 창작한 취지를 논할 때 말하기를 “한나라가 흥한 지 5세(世) 건원(建元) 연간에 융성했으니, 밖으로는 이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닦으며, 봉선하고 삭망을 고치며 의복의 색깔을 바꾸었다.”라고 했다. 이는 그가 한무제 성세에 대해 내린 긍정이며 또한 봉선과 개덕개제(改德改制)에 대한 정면적인 평가였다.
성심으로 신선을 만나다
한무제는 비록 정치적으로는 “유술만을 독존”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황로의 도를 좋아한 부친 세대와 조모의 영향으로 신선의 도 역시 꽤 좋아했다. 한무제는 심지어 자신이 과거 황제(黃帝)처럼 득도하여 원만비승(圓滿飛升)하기를 바랐다. 아마도 하늘이 한무제의 성의에 감응했는지, 태산 봉선 전후 및 다른 명산대천을 유람할 때 한무제는 여러 번 신선이 내려와 영험을 보이는 것을 만났으며 도법(道法)의 진전(真傳)을 받았으니, 이는 많은 연의와 지괴소설 속에 기재되어 있다.
《한무내전》과 진대(晉代) 《박물지》 기재에 따르면, 원봉 원년 정월 초하루에 한무제는 숭산에 올라 심진지대(尋真之台 진인을 찾는 대)를 수축하고 재계하며 정밀하게 생각하며 신선의 권고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4월의 어느 날, 한무제가 궁전 승화전(承華殿)에서 대신들과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전 내에 한 명의 아름다운 청의 여인이 나타나 스스로를 천상의 옥녀 왕자등(王子登)이라 칭했다. 그녀는 무제에게 서왕모가 그의 구도하는 마음을 보고 7월 7일 그날 강림하여 그를 보러 올 준비를 하고 있으니, 그 전에 그는 마음을 정하게 하고 재계해야 한다고 했다.
칠석 당일이 되자 궁정 내외를 깨끗이 청소하고 한무제 등은 서왕모의 강림을 공경히 기다렸다. 밤 10시경이 되었을 때 서왕모가 수만 명의 선인(仙人)을 거느리고 강림하니 전체 궁정이 광채로 눈부시게 빛났다. 서왕모는 특별히 마련된 보좌에 앉았고, 무제가 꿇어앉아 문안한 뒤에 그를 불러 함께 앉아 신선이 특별히 만든 선과(仙果)와 선주(仙酒)를 품평했으며, 여러 선인들이 또한 그들을 위해 맑고 오묘하며 귀를 즐겁게 하는 선악(仙樂)을 연주했다.
그 후 서왕모는 한무제에게 도를 전했다.
“도술(道術)을 수련함은 곧 정신을 보양하고 형체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을 잘 보양하면서 형체도 바꿀 수 있는 정도까지 수련하면 신선이 될 수 있다.” 그녀는 또한 수도 비적(秘籍 비밀 서적)을 한무제에게 전수했다.
한무제의 재삼 간청에 서왕모는 다시 진원지모(真元之母) 상원부인(上元夫人)을 초청해 왔다. 상원부인은 무제에게 훈계하기를, 수도함에는 반드시 몸에 있는 다섯 가지 열악한 근성(劣根性)을 끊어야 하며, 반드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털끝만큼의 일도 밝게 살피며 억울하고 억눌린 것을 풀어주고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며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고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며 음란함을 두절하고 사치를 버리며 늘 천궁(天宮)을 향해 머리 숙여 절을 올려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100년을 하면 진도(真道)를 얻어 천계(天界)에 들어갈 수 있다 했다.
한무제가 경건한 마음으로 도를 향하니 서왕모는 다시 그에게 《오악진형도(五嶽真形圖)》를 하사하며, 한무제가 모든 의구심과 잡념을 떨쳐버리고 수행에 전념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또한 한무제의 수행을 통해 인간 세상에서 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일깨워, 더 많은 범인(凡人)들이 천지 사이에 정말로 신선 도술이 존재함을 알게 함으로써 신도(神道)를 믿지 않는 자들이 어리석고 망녕된 생각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상원부인 또한 12권의 진경(真經)을 한무제에게 남겨주었다. 뒤이어 서왕모와 상원부인은 수레를 타고 날아서 떠나갔다.
한무제는 직접 서왕모와 상원부인을 친견한 후부터 더욱 신선의 존재를 믿게 되었으며, 그는 두 선인이 전수한 진경을 함께 황금 상자에 담아 백량대(柏梁台) 위에 안치하고 매일 직접 몸을 깨끗이 하고 재계하며 향을 피우고 청소한 뒤 진경에 적힌 요구에 따라 수련했다.
진대(晉代) 갈홍(葛洪)이 저술한 《신선전》에는 또 한무제와 신선 ‘태산노부(泰山老父)’의 이야기가 기재되어 있다. 한무제가 동으로 순행하며 사냥할 때 한 노인이 길가에서 밭을 매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머리 위의 흰 빛(白光)이 수 척 높이였다. 노인은 보기에 50여 세 같았으나 안색이 아이처럼 붉고 윤기가 있으며 피부가 매끄럽고 광택이 있어 한눈에 범속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한무제가 다가가 노인의 도술을 물었다. 노인이 말하기를, 일찍이 한 득도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자신에게 수련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그는 이를 따라 수행했고 몸이 곧 젊게 변하기 시작해 머리카락도 백발에서 흑발로 변하고 빠진 치아가 다시 났으며 몸이 제비처럼 가벼워 매일 300리를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이미 180세였다. 사서에서는 이 노인을 ‘태산노부’라 부른다. 한무제는 노인이 증정한 약 처방을 받았고 노인에게 옥과 비단을 하사했다.
노부는 나중에 태산으로 들어갔는데, 매 10년 혹은 5년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보곤 했다. 그가 300여 세가 되었을 때 더 이상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한무제가 신선을 만난 신적(神跡)은 이외에도 아주 많은데, 예를 들어 숭산에서 구전산신(九巔山神)과 흰 사슴이 끄는 구름 수레를 탄 위숙경(衛叔卿)을 만난 것이나, 심지어 명신 동방삭조차 목성(木星)이 하계한 신선이었다. 선연(仙緣)이 심후했던 한무제는 붕어한 뒤에도 상서로운 광경이 나타났다. 《한무내전》에 따르면, 어느 날 밤 무제의 관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궁 밖에서도 여러 번 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특별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장례를 지낸 후 능묘 주변에 큰 안개가 하늘을 뒤덮었고 능침의 문기둥이 갑자기 부러졌으며 큰 안개가 한 달간 지속되었다. 아마도 한무제는 신선이 전수한 도술을 준수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행해 이미 신선이 되었을 것이며, 그가 인간 세상의 사명을 완수한 후 즉 수종정침(壽終正寢)하고 다시 천계(天界)로 돌아갔을 것이다.
(계속)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19/8/14/n11453112.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