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시대 칠웅 쟁패 중 위(魏)나라 흥망의 역사
심연(心緣)
【정견망】
제2부: 전국 ‘통일 패업’ 아래 일어난 칠국 전쟁(기원전 476년―전 221년)
춘추 시대 중후기, 각 제후국의 경제는 서로 다른 정도로 발전했으며 정치 형세에도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생겼다. 끊임없는 병합과 투쟁을 거치며 많은 소국이 사라졌다. 또한 중요한 점은 제후국 내부 경대부(卿大夫)의 세력이 점차 발전했다는 것인데, 유명한 예로 노나라의 삼환(三桓), 제나라의 전씨(田氏), 진(晉)나라의 육경(六卿)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경제 실력을 이용해 공실(公室)을 통제하고 분할했으며,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서로 다투었다. 진(晉)나라 육경의 다툼은 마지막에 이르러 한(韓), 위(魏), 조(趙) 세 가문만 남게 되었다.
한편 변방에 처해 있던 진(秦)나라와 나중에 일어난 연(燕)나라의 발전 기세도 줄어들지 않았다. 삼가분진(三家分晉)을 경계로 역사는 전국 시대로 접어들었다. 천하의 강대국은 주로 연, 제, 조, 한, 위, 진(秦), 초의 일곱 나라였다. 전국 시대의 형세는 초나라가 남쪽에, 조(趙)나라가 북쪽에, 연나라가 동북쪽에, 제나라가 동쪽에, 진(秦)나라가 서쪽에 있었으며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그 중간에 있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강토가 상대적으로 작았다. 당시 이 일곱 국가는 국세가 강해짐에 따라 모두 제후들 위에 군림하여 왕이라 칭하고 통일을 실현하려는 염원을 가졌다. 이때 주 왕실은 명의상의 공주(公主) 지위마저 잃어 제후들에게 더욱 무시당했으나, 여전히 낙양 일대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일곱 대국 중 황하 유역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세 대국 진(秦), 위, 제는 전기에 정세를 좌우하는 힘을 가졌으나, 후기에는 진(秦)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해졌다. 통계에 따르면 주 원왕 원년(기원전 475년)부터 진왕(秦王) 정(政) 26년(기원전 221년)까지 255년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이 230차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양측은 걸핏하면 수만에서 수십만 명을 동원했다. 서한 말기의 유향(劉向)은 이 시기의 역사에 관한 각종 자료를 엮어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이름을 《전국책》이라 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이 역사 단계를 전국 시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도태되는 잔혹한 법칙이 다시 한번 남김없이 펼쳐졌다.
이 시기 각국 사이의 공벌(攻伐)이 상당히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각국의 외교 활동도 전례 없이 활발해 합종연횡(合縱連橫)이라는 외교 전략이 나타났고 변론(辯論)의 풍조도 매우 성행했다. 아울러 강자(强者)가 왕이 되고 약육강식하는 법칙이 더욱 강화되었으나, 이 역사는 여전히 이전에 말했던 도리를 입증하고 있다. 즉 인덕(仁德)이 있는 군주만이 국가를 강성하게 하고 백성이 편안히 살며 즐겁게 일하게 할 수 있으며, 국가를 쇠락하게 하거나 심지어 망하게 하는 것은 충언을 듣지 않고 음란하며 포악하고 도가 없는 군주들이라는 점이다.
현명하고 인덕 있는 군주는 부지런히 정사를 돌보고 어진 인재와 사귀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모으고 널리 듣고 믿으며 개혁을 실행하니, 국가 정치는 자연히 맑아지고 백성은 편안히 살며 즐겁게 일하여 성세(盛世)가 나타난다. 반대로 어리석은 군주는 정사를 무시하고 즐거움만 찾으며 포악하고 도가 없으며 편파적인 말만 믿으니, 국가 정치는 자연히 어두워지고 백성은 재앙을 당한다. 전국 시대 강대한 국가들은 대부분 여전히 덕치(德政)를 베풀 수 있는 군주가 나타났으나, 이때는 덕행이 아닌 이익이 대다수 군주가 추구하는 제일의 목표가 되었다. 본 편은 각국의 흥망사를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두고 그 속에서 흥망의 원인을 탐구하고자 하며, 중간에 사실(史實 역사적인 사실)이 겹칠 수 있으나 강조점은 약간씩 다를 것이다.
1. 위나라의 흥망사
* 위나라의 선조
위씨의 선조는 필공고(畢公高)의 후대다. 필공고는 주나라 천자와 성이 같았다(즉 희성이다). 무왕이 주왕을 벌한 후 고(高)는 필(畢) 땅에 봉해졌고, 그리하여 필을 성(姓)으로 삼았다. 그의 후대는 봉작이 끊겨 평민이 되었는데, 어떤 이는 중원에 있고 어떤 이는 이적(夷狄)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의 후손 중에 필만(畢萬)이라는 자가 있어 진(晉) 헌공을 섬겼다.
진 헌공 16년(전 661), 조숙(趙夙)이 수레를 몰고 필만이 수레 오른쪽 호위가 되어 곽(霍), 경(耿), 위(魏)를 정벌하러 가서 그것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헌공은 이중 경 땅을 조숙에게 봉해주고 위 땅을 필만에게 봉해주었으며 두 사람 모두 정식으로 대부가 되었다. 헌공이 죽은 후 진(晉)나라에 내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필만의 자손은 점점 많아졌고 그들의 국명을 따라 위씨(魏氏)라고 불렀다. 필만은 무자(武子)를 낳았다. 위무자(魏武子)는 위씨 자손의 신분으로 진나라 공자 중이(重耳)를 섬겼다. 나중에 중이가 즉위해 진 문공이 된 후 위무자에게 위씨 후대의 봉작을 계승하게 하여 대부의 지위로 올렸으며 그의 관부(官府)는 위읍(魏邑 산서 운성시 예성현)에 설치되었다.
* 위문후의 인덕(仁德)과 위나라의 강성
나중에 진(晉) 공실이 쇠미해지고 육경이 대권을 장악했다. 위환자(魏桓子) 때에 이르러 그는 한강자(韓康子), 조양자(趙襄子)와 함께 가장 세력이 강했던 지백(知伯)을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그의 영토를 나누어 가졌다. 위환자의 손자가 바로 위문후(文侯) 위사(魏斯)다. 위문후는 한무자, 조환자, 주 위열왕과 동시대 인물이다. 주 위열왕 23년(기원전 403년), 주왕은 정식으로 세 가문을 제후로 승인했다. 위문후(기원전 445년~기원전 369년 재위)부터 기원전 4세기 중엽까지는 위나라가 중원을 독점하던 시기였다.
위문후는 전국시대 초기에 상당히 명망 있는 군주였다. 그는 현인을 예우해 자하(子夏), 단간목(段幹木), 전자방(田子方)을 사부로 모셨으며, 현사(賢士)를 중용하여 문신으로는 이회(李悝), 서문표(西門豹)가 있었고 무장으로는 군사 전문가 오기(吳起)가 있었다. 위문후는 먼저 이회를 임용하여 개혁을 단행하고 진지력지교(盡地力之教 지력을 최대한 활용해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것)를 펼쳤으며 무졸(武卒)을 창설했다. 또한 오기, 서문표 등을 중용하여 지방을 다스리고 경제를 발전시키니 나라는 맑고 평안해졌으며 전국 시대 초기 첫 번째 강대국이 되었다.
진(秦)나라가 일찍이 위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위나라 군주는 현인에게 예의를 다하고 나라 사람들은 인(仁)을 칭송하며 상하가 화합하니 도모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문후는 이로 인해 여러 제후들의 찬사를 받았다.
위문후 32년, 위나라 군대가 정(鄭)나라를 공격했다. 주성(注城)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위문후 35년, 제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양릉(襄陵)을 공격해 차지했다.
위문후 36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음진(陰晉)에 침입했다.
위문후 38년, 위나라 군대가 진(秦)나라를 공격해 무하(武下)에서 진(秦)나라를 패배시키고 진나라 장수 식(識)을 포로로 잡았다. 이 해에 문후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격(擊)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위무후(武侯)다.
위무후 7년, 위나라 군대가 제나라를 공격하여 상구(桑丘)까지 이르렀다. 9년, 적인(狄人)이 회수(澮水)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무후가 오기를 보내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구(靈丘)까지 이르렀다. 이때 제 위왕이 막 즉위했다. 오기가 위나라 상공(相公 재상) 공숙(公叔)의 배척을 받아 위나라를 떠나 초(楚)나라로 갔다.
위무후 11년(전 376), 위나라는 한, 조 두 나라와 함께 진(晉)나라 영토를 셋으로 나누고 진 공실의 후대를 멸망시켰다. 15년, 위나라 군대가 북린(北藺)에서 조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무후 16년, 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공격하여 노양(魯陽)을 점령했으며 무후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혜왕(惠王)이다.
* 이익을 다투다 실패한 위혜왕
위혜왕은 도읍을 동쪽인 대량(大梁)으로 옮기고 선비들을 불러 모았으며 수리를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주변 국가를 병합하려 꾀했다. 그는 36년 동안 재위했는데 전반 18년은 문후가 닦아놓은 기초에 기대어 제후들과 교전하며 승패를 주고받았으나, 후반 18년은 연달아 패배했다. 한 번은 조나라를 공격하다가 제나라가 보낸 전기(田忌)와 손빈(孫濱)의 계책에 빠져 계릉(桂陵)에서 크게 패했다. 또 한 번은 한나라를 공격하다가 다시 전기와 손빈에게 마릉(馬陵)에서 크게 패했다. 또 한 번은 상앙(商鞅)이 이끄는 진(秦)나라 군대에게 패하여 하서(河西) 땅을 모두 잃었다. 이 몇 차례의 대패는 위나라 병력을 소진시키고 국력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혜왕은 여러 차례 군사적 실패를 겪자 겸허한 예절과 후한 선물로 현인을 초빙했는데 추연(鄒衍), 순우곤(淳於髡), 맹가(孟軻 맹자)가 모두 위나라에 왔다.
혜왕이 맹자를 만나자 “과인이 재능이 없어 군대가 세 번이나 외국에서 꺾였고 태자는 포로가 되었으며 상장(上將)은 전사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내가 비어 조상의 종묘사직이 수치를 당하게 되었으니 과인은 매우 부끄럽습니다. 선생께서 몸을 굽혀 비천한 나라의 조정에 임하셨으니 장차 어떤 방법으로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맹자는 “군주는 이와 같이 이익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군주가 이익을 얻고자 하면 대부도 이익을 얻고자 하고 대부가 이익을 얻고자 하면 백성도 이익을 얻고자 하니, 상하가 모두 와서 이익을 다투면 나라가 위태로워집니다. 일국의 군주로서 인의(仁義)를 행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이익을 말씀하십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는 위혜왕의 실패가 오직 이익만을 챙기고 인의를 베풀지 않은 결과라는 뜻이다.
* 위나라 쟁패전(爭霸戰)
혜왕은 재위 36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인 위양왕(襄王 기원전 318~296년 재위)이 즉위했다.
위양왕 5년(기원전 314년), 진(秦)나라 군대가 조음(雕陰)에서 위나라 용가(龍賈)가 이끄는 군대 4만 5천 명을 격파하고 위나라의 초성(焦城)과 곡옥(曲沃)을 포위했다. 위나라는 하서 땅을 진(秦)나라에 떼어주었다.
위양왕 6년, 위왕과 진왕이 응성(應城)에서 만났다.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분음(汾陰), 피씨(皮氏), 초성을 빼앗았다. 위나라 군대가 초나라를 정벌해 형산(陘山)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위양왕 7년, 위나라가 상군(上郡)을 전부 진(秦)나라에 주었다.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포양(蒲陽)을 점령했다.
위양왕 8년, 진(秦)나라가 초성과 곡옥을 위나라에 돌려주었다.
위양왕 12년, 초나라 군대가 양릉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각 제후국의 집정 대신들과 진(秦)나라 재상 장의(張儀)가 설상(齧桑)에서 만났다.
위양왕 13년, 장의가 위나라 재상이 되었다.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곡옥과 평주(平周)를 공격해서 취했다. 위양왕 16년 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애왕(哀王)이 즉위했다. 장의는 다시 진(秦)나라로 돌아갔다.
[역주: 사마천은 《사기 위세가》에서 애왕이 양왕의 아들로 보지만 죽서기년에서는 두 사람을 같은 인물인물로 본다.]
위애왕 재위 기간에 전후로 제나라, 연나라, 위(衛)나라를 공격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애왕 9년, 위왕과 진왕(秦王 진무왕)이 임진(臨晉)에서 만났다. 장의와 위장(魏章)이 모두 위나라에 귀순했다. 위나라 재상 전수(田需)가 세상을 떠나자 초나라는 장의, 서수(犀首) 또는 설공(薛公)이 위나라 재상이 될까 두려워하여 소대(蘇代)를 유세객으로 보내 위왕이 위 세 사람을 재상으로 임용하지 못하게 했다.
위애왕 18년, 위나라가 진(秦)나라와 연합해 초나라를 공격했다.
위애왕 21년, 위나라 군대는 제나라 군대, 한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함곡관에서 진(秦)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위애왕 23년, 진(秦)나라는 다시 하외(河外) 땅과 봉릉(封陵)을 위나라에 돌려주고 위나라와 화친했다. 애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소왕(昭王 기원전 295~277)이 즉위했다.
위소왕 원년(기원전 295), 진나라와 위나라의 전쟁이 승패를 주고받았다.
위소왕 10년, 제나라가 송나라를 멸망시켰고 송왕이 위나라의 온읍(溫邑)에서 죽었다.
위소왕 12년, 위나라가 진, 조, 한, 연과 공동으로 제나라를 공격하여 제서(濟西)에서 제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제민왕(齊湣王)은 밖으로 도망쳤다. 연나라 군대는 단독으로 임치(臨淄)에 들어갔다. 위왕과 진왕(秦王 소양왕)이 서주국(西周國)에서 만났다. 소왕 19년, 소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안리왕(安釐王 기원전 276~243)이 즉위했다.
안리왕 원년(기원전 276),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 성 두 곳을 함락시켰다.
안리왕 2년, 진나라가 다시 위나라 성 두 곳을 함락시키고 대량성 아래에 군대를 주둔시키자 한나라가 구원병을 보냈고 온읍을 진(秦)나라에 주고 화친을 구했다.
안리왕 3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 성 네 곳을 함락시키고 4만 명을 참살했다.
안리왕 4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 군대와 한나라, 조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15만 명을 죽이고 위나라 장수 망묘(芒卯)를 쫓아냈다. 위나라 장수 단간자(段幹子)가 남양(南陽)을 진(秦)나라에 주고 화친할 것을 청했다.
안리왕 9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 회읍(懷邑)을 함락시켰고 10년에는 위나라에 인질로 있던 진나라 태자가 죽었다.
11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 처구(郪丘)를 함락시켰다.
제, 초 두 나라가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자 위나라는 진(秦)나라에 구원을 청하기 위해 사신을 끊임없이 보냈으나 진나라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위나라에 당저(唐睢)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90여 세였다. 그가 위왕에게 말하기를 “노신이 서쪽으로 가서 진왕을 유세하기를 청하니 반드시 진나라 군대가 제가 진나라를 떠나기 전에 출발하게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위왕이 거듭 절하고 수레를 준비하여 그를 보냈다.
당저가 진나라에 도착하여 궁에 들어가 진왕(秦王 진소왕)을 알현했다.
진왕이 말하기를 “노인께서 피곤함을 무릅쓰고 먼 길을 진나라까지 오셨으니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위나라가 구원을 청한 것이 이미 여러 번이라 과인도 위나라의 위급함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저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이미 위나라의 위급함을 아시면서도 구원병을 보내지 않으시니 저는 사적으로 계책을 내는 신하가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위나라는 만 대의 전차를 가진 큰 나라인데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며 동방의 번속(藩屬)이라 칭하고 진나라가 하사한 의관을 받으며 봄가을로 진나라에 제물을 보내는 것은 진나라의 강력함이 맹방이 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 초의 군대가 이미 위나라 도성 교외에서 합쳤는데 진나라가 아직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은 위나라가 아직 그다지 위급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특별히 위급한 때가 되면 땅을 떼어주고 합종 집단에 가입할 것이니 대왕께서는 장차 무엇을 구원하시겠습니까? 반드시 위급해진 후에야 구원하려 하신다면 이는 동쪽의 번속인 위나라 하나를 잃고 적국인 제와 초 두 나라를 강화하는 것이니 대왕께서는 어떤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진소왕(秦昭王)이 즉시 군사를 내어 위나라를 구원했고 위나라는 그제야 안정을 회복했다.
* 위나라의 쇠락과 멸망
위나라 안리왕이 진(秦)나라가 이전에 구원해 준 연고로 진나라와 친하게 지내며 한나라를 공격하여 원래의 땅을 되찾고 싶어 했다. 현덕(賢德)으로 이름난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가 위왕에게 말했다.
“진나라 사람은 적융(狄戎)의 습속과 같아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을 가졌으며 탐욕스럽고 흉악하여 이익을 좋아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으며 예의와 덕행을 모릅니다. 만약 이익이 있다면 친척 형제도 돌보지 않아 마치 금수와 같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며 그들은 일찍이 두터운 은혜를 베풀거나 큰 덕을 쌓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태후는 본래 진왕의 어머니였으나 근심 속에 죽었고 양후(穰侯)는 진왕의 외삼촌으로 공로가 그보다 큰 자가 없었으나 끝내 그를 축출했습니다. 진왕의 두 동생은 죄가 없었으나 거듭 봉지를 깎였습니다. 친척에게도 이와 같거늘 하물며 원수의 나라에 대해서는 어떻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 진나라와 공동으로 한나라를 공격하신다면 진나라의 화근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니 신은 각별히 미혹되어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왕께서 이 이치를 모르신다면 밝지 못한 것이요 군신들이 와서 대왕께 이 이치를 아뢰지 않는다면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한 여인이 어리고 약한 군주를 보좌하고 있어 국내에 큰 혼란이 있고 밖으로는 진(秦), 위(魏)의 강병과 교전해야 하니 대왕께서는 그 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십니까? 한나라가 멸망한 후 진나라는 원래 정(鄭)나라의 땅을 차지하여 대량(大梁 위의 도성)과 이웃하게 될 것이니 대왕께서는 안녕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대왕께서 원래의 땅을 얻고자 하여 강한 진나라와 친근함에 의지하려 하시니 대왕께서는 이것이 이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진나라는 이에 만족할 나라가 아니니 한나라가 멸망한 후 반드시 따로 사건을 일으킬 것이며 사건을 일으킬 때는 반드시 쉽고 유리한 목표를 찾을 것이고 쉽고 유리한 목표를 찾을 때는 반드시 초나라와 조나라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왜입니까? 만약 큰 산을 넘고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상당(上黨)을 지나 강대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이는 알여(閼與)에서의 패배를 되풀이하는 것이니 진나라는 반드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내(河內)를 길로 삼아 업성(鄴城)과 조가(朝歌)를 등지고 장수(漳水)와 부수(滏水)를 건너 한단(邯鄲) 교외에서 조나라 군대와 결전한다면 이는 지백과 같은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니 진나라는 또한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나라를 공격하려면 섭곡(涉谷)을 길로 삼아 3천 리를 행군하여 명계(冥覬) 관문을 쳐야 하는데 가는 길이 너무 멀고 공격하는 곳이 너무 험하니 진나라는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외(河外)를 길로 삼아 대량을 등지고 오른쪽에 상채(上蔡), 소릉(召陵)을 두어 초나라 군대와 진성(陳城) 교외에서 결전한다면 진나라는 또한 감히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와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위(衛)나라와 제나라는 더더욱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나라가 멸망한 후 진나라가 출병할 때 위나라를 제외하면 공격할 곳이 없습니다. 예전에 합종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초와 위가 서로 의심하고 한나라 또한 맹약에 참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나라는 전란을 겪은 지 이미 3년이라 진나라가 굴복시켜 화친하려 하지만 한나라는 망할 줄 알면서도 따르려 하지 않고 오히려 조나라에 인질을 보내 천하 제후의 선봉이 되어 진나라와 결사전을 벌이겠다고 표시했습니다. 초나라와 조나라는 반드시 군대를 집결시킬 것인데 그들은 모두 진나라의 탐욕이 끝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천하 각 제후국을 완전히 멸망시켜 해내(海內)의 백성을 모두 진나라에 신복(臣服)시키지 않는 한 절대로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합종의 주장(主將)으로 대왕께 보답하고자 하니 대왕께서는 조속히 초나라와 조나라의 맹약을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인질을 붙들고 한나라를 보전하신 후 다시 땅을 요구하시면 한나라는 반드시 돌려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군사들과 백성들이 노고를 겪지 않고도 옛 땅을 되찾을 수 있으며 그 공효는 진나라와 함께 한나라를 공격하는 것보다 뛰어날 것이고 게다가 강한 진나라와 이웃하는 화근도 없을 것입니다.
한나라를 보존하고 위나라를 안정시켜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 또한 하늘이 대왕께 주신 좋은 기회입니다. 공성(共城)과 영읍(寧邑)에서 한나라 상당으로 가는 길을 열어 이 길이 안성(安成)을 지나게 하고 드나드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둔다면 이는 위나라가 다시 한나라의 상당을 저당 잡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런 세수입이 있다면 충분히 국가를 부유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는 반드시 위나라를 고맙게 여기고 사랑하며 존숭하고 두려워할 것이니 한나라는 결코 위나라를 배반하지 못할 것이며 이렇게 되면 한나라는 위나라의 군현이 되는 셈입니다. 위나라가 한나라를 군현으로 얻으면 위(衛), 대량, 하외는 필연적으로 안정될 것입니다. 만약 한나라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동주와 서주, 안릉(安陵)은 반드시 위험해질 것이며 초나라와 조나라가 크게 패한 후 위(衛)나라와 제나라는 매우 두려워할 것이니 천하 제후들이 서쪽 진나라로 달려가 조배하며 신하를 칭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안리왕은 신릉군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안리왕 20년, 진(秦)나라 군대가 한단을 포위하자 신릉군 무기는 왕명을 가짜로 전해 장군 진비(晉鄙)의 군대를 탈취하여 조나라를 구원하러 갔으며 조나라는 보전되었고 무기도 이 일로 조나라에 머물게 되었다.
안리왕 26년, 진소왕(秦昭王)이 세상을 떠났다. 안리왕 31년(전 246), 진왕 정(政 훗날의 진시황)이 즉위했다. 안리왕 34년, 안리왕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증(增)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경민왕(景湣王)이다.
경민왕 원년(기원전 242),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 성 20곳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동군(東郡)으로 삼았다.
2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魏)나라의 조가를 함락시켰다. 위(衛)나라는 야왕(野王)으로 옮겼다. 3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魏)나라의 급읍(汲邑)을 함락시켰다.
5년, 진(秦)나라 군대가 위나라의 원지(垣地), 포양(蒲陽), 연읍(衍邑)을 함락시켰다.
15년, 경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위왕 가(假)가 즉위했다. 위왕 가 3년(기원전 225), 진(秦)나라 군대가 대량에 물을 끌어들여 수공을 펼치니 위왕 가가 포로가 되었고 마침내 위나라를 멸망시켜 군현으로 삼았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75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