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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오천년〗 단명한 통일제국 진조(秦朝) (2)

–(기원전 221년—기원전 207년)

심연

【정견망】

진조 멸망에 관한 예언

진시황 32년(기원전 215년) 때의 일이다.

“연나라 사람 노생을 바다로 보내 돌아오게 하니, 귀신에 관한 일로 도록(錄圖書)을 올리며 말하기를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다’라고 했다. 시황은 이에 장군 몽염에게 병사 30만 명을 내주어 북쪽으로 호인(胡人)을 치게 하고 하남 땅을 점령했다.” (《사기・진시황본기》).

하지만 진시황은 ‘호’가 북쪽의 오랑캐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 호해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했다. 이 참어는 나중에 《하도(河圖)》에 수록되었다.

나라를 망친 진이세의 잔혹함

진시황 시절의 형벌도 이미 매우 엄격했으나, 진 2세가 즉위한 후에는 더욱 심해지고 잔혹해졌다. “사람을 많이 죽이는 자가 충신”이라 여겼으며, 각급 관리들은 모두 이러한 형법을 받드는 살인귀가 되었다.

진시황이 죽은 후, 2세는 자식이 없는 후궁들을 모두 순장하게 하니 그 수가 매우 많았다. 하장이 끝나자 기관(機關)의 비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모든 장인을 무덤 안에 가두어 봉했다. 그 후 무덤 위에 풀과 나무를 심으니 밖에서 보기에 마치 산과 같았다.

2세 원년(전 209), 2세는 겨우 21세였고 조고가 낭중령(郎中令)을 맡아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2세는 자신이 진시황처럼 천하를 위세로 복종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순행에 나섰다. 그는 갈석산, 회계 등을 차례로 방문하여 시황이 세운 비석에 글을 새기고, 비석 옆에 수행한 대신들의 이름을 추가로 새겨 선제의 공업과 성덕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게 했다.

순행 길에 진 2세는 조고와 비밀리에 모의하여 대신들을 복종시키고 자신과 권력을 다투는 황자들을 제거할 방안을 논의했다. 조고는 순행 기회를 빌려 군현의 수령과 위(尉) 중 죄가 있는 자들을 조사해 죽일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하면 위로는 황제의 위엄을 천하에 떨칠 수 있고, 아래로는 황제가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문치(文治)를 본받을 때가 아니라 무력으로 결정해야 할 때라고 조언하자 2세는 이에 찬동했다. 그리하여 죄명을 조작해 가까이 모시던 중랑, 외랑, 산랑은 물론 대장 몽염을 포함한 많은 대신을 구속하니 면죄된 자가 없었으며, 여섯 명의 황자(皇子)도 두현(杜縣)에서 살해되었다.

황자 장려(將閭) 형제 세 사람은 내궁에 갇혀 죄상이 결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 2세가 사자를 보내 장려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니 사형에 처함이 마땅하다. 관리가 법에 따라 형을 집행하러 왔다.”

장려가 말했다.

“궐내의 예절에 있어 나는 일찍이 빈찬(賓贊)의 인도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조정의 좌석 차례에서도 예절을 잃은 적이 없으며, 명을 받들어 대답할 때도 말을 잘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는가? 죄명을 알고 죽기를 원한다.”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모의에 참여할 수 없고 단지 명령을 수행할 뿐이다”라고 했다.

장려가 하늘을 우러러 크게 부르짖기를 서너 번 하며 “하늘이시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형제 세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칼을 뽑아 자결했다. 황족들은 이 일로 경악하고 공포에 떨었다. 대신들이 간언하면 비방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고위 관리들은 관직을 유지하기 위해 굴종하며 비위를 맞췄으며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4월에 2세가 함양으로 돌아와 다시 아방궁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시황의 책략을 따라 대외적으로 사방의 외족을 안무하고, 몸이 튼튼한 병정 5만 명을 징집해 함양을 지키게 했다. 궁정에서 즐기는 개, 말, 짐승들을 기르기 위해 병정과 짐승들에게 필요한 식량이 막대했다. 함양 창고의 식량이 부족해지자 아래의 각 군현에서 식량과 사료를 징발해 운반하게 했고, 운반하는 사람들에게는 각자 먹을 양식을 지참하게 하여 함양 400리 이내에서는 이 식량을 먹지 못하게 했다. 이때 형벌은 더욱 번잡해지고 살육은 더욱 엄혹해졌으며, 관리들은 가혹하고 독하게 일을 처리하고 상벌이 부당했으며 세금 징수에는 한도가 없었다. 끊임없는 요역과 엄혹한 형벌로 인해 백성들은 살길이 막막해졌고 천하는 위기에 처했다.

7월, 수졸(戌卒 수자리 병사) 진승(陳勝) 등이 옛 초나라 땅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니, 이는 초나라를 크게 확장한다는 뜻이었다. 진승은 스스로 초왕이 되어 진현(陳縣)에 머물며 장수들을 파견해 땅을 점령했다. 효산과 함곡관 동쪽 산동의 각 군현 젊은이들은 진나라 관리들의 가혹함에 고통받던 끝에 그들의 군수, 군위, 현령, 현승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 진승에게 호응했다. 곳곳에서 잇달아 후왕(侯王 제후왕)을 옹립하고 연합하여 서쪽으로 진격하니, 기치마다 진나라를 토벌한다는 내용이었고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신(武臣)은 스스로 조나라 왕이 되었고, 위구(魏咎)는 위나라 왕, 전담(田儋)은 제나라 왕이 되었으며 패공(沛公)은 패현(沛縣)에서 의거를 일으켰다. 항량(項梁)은 회계군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전달과 통보를 맡은 알자(謁者)가 산동에 사절로 갔다가 돌아와 산동의 반란 상황을 2세에게 보고했다. 2세는 크게 화를 내며 알자를 주관 관리에게 넘겨 처벌하게 했다. 나중에 다른 사자가 돌아오자 황제가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그들은 그저 도적 떼일 뿐이며, 군수와 군위가 추격하여 지금 모두 사로잡았으니 걱정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2세는 매우 기뻐했다.

이세 2년(기원전 208) 겨울, 진승이 파견한 주장(周章) 등 장수들이 수십만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희수(戲水 지금의 섬서 임동현)에 도달했다. 이세가 크게 놀라 군신들과 대책을 상의했다.

소부 장한(章邯)이 말했다.

“도적들이 이미 들이닥쳐 병력이 강하니 지금 근처 현의 군대를 징발하기엔 늦었습니다. 여산의 죄수들이 많으니 그들을 사면하고 무기를 주어 도적을 맞서게 하소서”라고 했다.

이에 2세는 천하에 대사면을 내리고 장한을 장수로 삼아 병사를 이끌게 하니, 주장의 군대를 격파했다. 주장은 패주하다 조양(曹陽 섬서 섬현 근처)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 후 성보(城父)에서 진승을 죽이고, 정도(定陶)에서 항량을 격파했으며, 임제(臨濟)에서 위구를 죽였다. 초나라 기의군의 명장들이 모두 죽자 장한은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거록(鉅鹿)에서 조나라 왕 조헐(趙歇) 등을 공격했다.

조고가 2세에게 권하며 말하기를 “선제(先帝)께서 왕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린 시간이 길었기에 군신들이 감히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못했고 이단 사설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나이가 한창인 데다 갓 즉위하셨는데 어찌 공경들과 조정에서 대사를 결정하려 하십니까? 일에 착오가 생기면 군신들에게 자신의 약점을 보이는 꼴이 됩니다. 천자가 스스로를 ‘짐’이라 칭함은 짐조(兆)의 뜻이 있으니, 본래 다른 사람이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함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2세는 늘 깊은 궁궐 안에 거처하며 오직 조고 한 사람과 모든 일을 결정했다. 이때부터 공경들이 황제를 알현할 기회가 거의 없어졌고, 각지에서 의거하는 자들은 더욱 많아졌다.

관중(關中)의 군대가 동쪽의 의군을 치기 위해 징발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우승상 풍거질(馮去疾), 좌승상 이사, 장군 풍겁(馮劫)이 간언하기를 “관동의 각로(各路) 도적들이 분연히 일어나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 토벌하여 죽인 자가 많으나 아직 진압되지 않고 있습니다. 도적이 많은 것은 변방 수비, 운송, 노역이 너무 고통스럽고 세금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아방궁 축조를 잠시 중단하고 변방 병역과 운송 요역을 줄여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2세는 사람을 시켜 세 사람의 죄를 심문하고 추궁하게 했다. 풍거질과 풍겁은 장상(將相)으로서 모욕을 견딜 수 없다며 자결했고, 이사는 갇혀 형벌을 받은 끝에 처형되었다.

2세 3년(전 207), 장한 등이 군사를 이끌고 거록을 포위하자 초나라 상장군 항우(項羽)가 초나라 병사들을 거느리고 거록을 구원하러 왔다. 조고의 모함을 두려워한 장한 등은 군사를 이끌고 항우에게 항복했다.

8월 기해일, 조고가 모반을 꾀하려 했으나 군신들이 따르지 않을까 걱정하여 먼저 계책을 세워 시험해 보았다. 사슴 한 마리를 가져와 2세에게 바치며 “이것은 말입니다”라고 했다.

2세가 웃으며 말하기를 “승상이 틀렸소, 사슴을 보고 말이라 하다니”라고 했다. 좌우 대신들에게 물으니 대신들 중에는 침묵하는 자도 있었고, 일부러 조고에게 영합해 말이라고 하는 자도 있었으며 사슴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조고는 나중에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법을 빌려 몰래 해쳤다. 이후 대신들은 조고를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다.

조고는 이전에도 여러 번 “관동의 도적들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해왔다. 그 후 항우가 거록성 아래에서 왕리(王離) 등을 사로잡고 계속 전진하자 장한 등의 군대는 여러 차례 패퇴하며 지원군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연나라, 조나라, 제나라, 초나라, 한나라, 위나라가 모두 자립하여 왕이 되었고, 함곡관 동쪽은 대개 진나라 관리들을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으며 제후들은 모두 군사를 이끌고 서진했다. 패공 유방은 수만 명을 거느리고 무관(武關)을 함락시키고 조고와 비밀리에 접촉할 사람을 보냈다. 조고는 2세가 노하여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황제를 알현하지 않았다.

2세는 꿈에 백호(白虎) 한 마리가 자신의 수레를 끄는 곁마를 무는 꿈을 꾸었다. 그는 그 백호를 죽였으나 마음이 즐겁지 않고 이상하게 여겨 해몽하는 자에게 물었다.

해몽하는 자가 점을 쳐서 나온 괘사에 이르기를 “경수(涇水)의 수신이 괴변을 일으키는 것”이라 했다. 2세는 망이궁(望夷宮)에서 재계하며 경수의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백마 네 마리를 경수에 가라앉히려 했다.

2세는 사람을 보내 의군이 나날이 압박해오는 일을 조고에게 책망했다. 조고는 공포와 불안을 느껴 비밀리에 사위인 함양 현령 염락(閻樂), 동생 조성(趙成)과 의논하며 말했다.

“황제가 간언을 듣지 않더니 이제 사태가 위급해지자 그 화를 우리 가문에 떠넘기려 한다. 나는 다른 천자를 세우고 공자 자영(子嬰)을 옹립하려 한다. 자영은 어질고 겸손하여 백성들이 모두 그를 옹호한다.”

그리하여 낭중령을 내응자로 삼아 큰 도적이 들었다고 거짓을 꾸미고 염락에게 관리들을 소집해 군사를 내어 추격하게 했으며, 염락의 어머니를 납치해 조고의 부중에 인질로 두었다. 조고는 염락에게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망이궁 전문(前門) 앞에서 위령(衛令 경호책임자)과 복야(僕射)를 묶어 세우고 꾸짖게 했다. “도적이 이리로 들어갔는데 왜 막지 않았느냐?”

위령이 “황궁 주변 초소마다 위병이 방수하여 매우 엄밀한데 도적이 어찌 감히 궁에 들어오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염락은 위령의 목을 베고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안으로 돌입하여 걸어가며 화살을 쏘았다. 낭관과 환관들은 크게 놀라 어떤 이는 달아나고 어떤 이는 맞서 싸웠는데, 싸운 자들은 죽임을 당하니 그 수가 수십 명에 달했다. 낭중령과 염락이 함께 쳐들어가 화살로 2세의 휘장을 맞혔다.

2세는 화가 나 좌우 사람들을 불렀으나 좌우가 모두 황망해하며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곁에 한 환관만이 2세를 모시며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2세가 내궁으로 들어가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왜 진작 내게 알리지 않아 일이 이 지경에 이르게 했는가!”

환관이 말했다.

“신이 감히 말하지 못했기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일찍 말했더라면 저희들은 진작에 폐하께 죽임을 당했을 것인데 어찌 오늘까지 살 수 있었겠습니까?”

염락이 앞으로 나아가 2세의 죄상을 열거하며 말했다.

“당신은 교만하고 방종하여 마음대로 사람을 죽이고 도리를 따지지 않았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당신을 배반했으니 어찌할지 스스로 생각해보시오!“

2세가 “내가 승상을 볼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염락은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2세는 “군(郡) 하나를 얻어 왕이 되고자 한다”고 했으나 염락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만호후(萬戶侯)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으나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2세가 또 말하기를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평민이 되어 여러 공자들과 같이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염락은 “나는 승상의 명을 받들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당신을 죽이러 온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많은 말을 해도 나는 감히 대신 보고할 수 없다”라고 하며 군사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 지시했다. 2세는 자결했다.

염락이 돌아가 조고에게 보고하자 조고는 모든 대신과 공자들을 불러 2세를 죽인 상황을 알렸다. 이에 2세 형의 아들인 자영을 진왕(秦王 황제에서 왕으로 낮춤)으로 세웠다. 평민의 장례 예법에 따라 2세를 두남(杜南)의 의춘원(宜春苑) 안에 매장했다. 자영에게 재계하게 하고 종묘에 가서 조상께 절하고 국왕의 인새를 받도록 했다.

재계 5일 후, 자영은 자신의 두 아들과 상의하며 말했다.

“승상 조고가 망이궁에서 2세를 죽이고 대신들이 자신을 죽일까 두려워 거짓으로 도의를 따르는 척 나를 왕으로 세웠다. 내가 듣기로 조고는 초나라와 약속하기를 진나라 종실을 멸한 후 자신이 관중에서 왕이 되기로 했다고 한다. 지금 나에게 재계하고 종묘를 알현하게 함은 내가 묘에 있을 때 나를 죽이려는 속셈이다. 내가 병을 핑계로 가지 않으면 승상이 반드시 직접 올 것이니 그가 오면 그때 그를 죽이겠다.”

조고가 사람을 보내 자영을 청하기를 여러 번 했으나 자영이 움직이지 않자 조고는 과연 직접 청하러 왔다.

조고가 “국가 대사인데 왕께서는 왜 가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자영은 그 자리에서 조고를 죽이고, 조고의 삼족을 멸하여 함양에서 시신을 보여주었다.

자영이 진왕이 된 지 46일 만에 초나라 장수 패공이 진나라 군을 격파하고 무관으로 들어와 패상(霸上)에 이르러 자영에게 항복을 권했다. 자영은 목에 비단 띠를 매고 흰 수레와 흰 말을 몰며 천자의 인새와 부절을 받들고 지도정(軹道亭) 옆에서 항복했다. 패공은 이에 함양으로 들어가 궁실과 부고를 봉인하고 군대를 되돌려 패상에 주둔했다.

한 달여가 지나 각로 제후들의 군대도 도착했다. 항우는 각로 제후들의 맹주로서 자영과 진나라 종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이어 함양을 도륙하고 궁실을 불태우며 궁녀들을 사로잡고 진나라 궁궐의 진귀한 보물과 재물을 몰수하여 각로 제후들과 나누어 가졌다. 진조(秦朝)를 멸한 뒤 본래 진나라의 땅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왕으로 삼으니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이라 하며 삼진(三秦)이라 불렀다. 항우는 서초패왕(西楚霸王)이 되어 천하를 나누고 제후왕들을 봉했으니 진조(秦朝)가 마침내 멸망했다. 그 후 5년 만에 천하는 한(漢)에 의해 통일되었다.

가의가 논한 진 멸망의 원인

사마천은 《사기》에서 서한 가의(賈誼)가 《과진론(過秦論)–진의 허물을 논함》에서 논술한 진 멸망의 근본 원인이 ‘인의(仁義)를 베풀지 않은 것’에 있음을 인용하여 후세의 경계로 삼았다.

“진은 작은 땅과 천승의 권세를 가지고도 팔주(八州)를 빼앗아 동렬의 제후들을 조회하게 만든 지 백여 년이었다.

연후에는 육합을 일가로 만들고, 효함을 궁으로 삼았는데, 사내 하나가 난을 일으키자 칠묘(七廟)가 무너지고 몸은 남의 손에 죽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공수(攻守)의 형세가 달려졌기 때문이다.”

“진왕(진왕정)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 단지 자신의 지모를 드러내려고 하며, 공신을 믿지 않고 사민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왕도를 폐하고 사사로운 권위를 세웠고, 서적을 금하고 형법을 가혹히 하였으며, 사기와 권력을 앞세우고 인의는 뒤로한 채, 포학함을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다.

무릇 겸병할 때는 사기와 권력을 높이고, 안정시킬 때는 순응과 권세를 귀히 여기니, 이는 취할 때와 지킬 때의 술책이 다름을 말한다.

진은 전국(戰國)을 거쳐 천하의 왕 노릇을 하였음에도 그 도를 바꾸지 않고, 정치를 개혁하지도 않았으니, 이는 취하고 지키는 방법이 달랐던 바였다.

고독한 채로 소유하려 하였으니, 그 멸망은 서서 기다릴 정도였던 것이다.

만약 진왕(진왕정)이 지난 세대의 일을 헤아리고, 은주(殷周)의 자취를 따라 그 정치를 제어하였다면, 이후 비록 음란 교만한 군주가 나올지라도 기울고 위태로워지는 근심은 없었을 것이다.

고로 삼왕은 천하를 세워 명성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공업을 장구히 한 것이다.

지금 이세가 즉위하자, 천하가 목을 길게 빼고 그 정치를 지켜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추위에 떠는 자에게는 누더기 옷도 보탬이 되고, 굶주린 자에게는 술지게미와 쌀겨도 달콤하기 마련이며, 천하의 슬피 우는 소리는 새로운 임금에게는 밑천이 된다.

이는 고달픈 민들에게는 어질기도 쉬움을 말하는 것이다.

만약 이세가 범용한 임금의 행실로서 충직하고 현명한 사람을 임용하고, 신하와 임금이 한마음으로 해내의 근심을 염려하고, 상중에 소복을 입고 선제의 잘못을 바로잡고, 땅을 민에게 고루 나누어주며 공신의 후손들을 봉하고, (제후)국을 세워 군주를 옹립해 천하를 예로 다스리고, 감옥을 열어 형륙을 면하게 해주고, 죄인의 처자를 노비로 삼는 나쁜 죄를 폐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 재물과 돈을 나눠주어 의지할 곳 없는 고아, 홀아비, 곤궁한 선비들을 구제하고, 부세를 가볍게 하며 노역을 줄여 백성의 긴급함을 돕고, 법을 간략히 하며 형벌을 덜어주고, 천하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새롭게 함으로써 절조를 바꾸고 행실을 닦으며, 각자 몸가짐을 삼가게 하고, 만민의 희망을 만족시켜 위엄과 덕으로 천하와 함께했더라면, 천하가 모두 모였을 것이다.

만약 사해 안이 모두 기뻐하며, 각자 자리에서 안락하며 오직 변란이 있을까 걱정하게 된다면, 설령 교활한 민이 있더라도 윗사람에게서 떨어질 마음을 먹지 못하니, 불궤(不軌)한 신하도 꾀를 꾸밀 수 없을 것이며, 폭란한 간사함도 그칠 것이다.

이세는 이와 같은 술책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무도한 짓을 거듭하니, 종묘와 민들을 무너뜨리며 아방궁을 다시 짓고, 형벌을 번잡히 하며 주살을 엄하게 하니, 그 관리가 각심하게 다스리고 상벌은 부당하였으며, 부렴(賦斂)이 무도하고 천하에 일이 많아 관리들이 감당할 수 없었으니, 백성은 곤궁한데 임금이 구휼하지 않았다.

간사함과 거짓됨이 한꺼번에 일어난 연후에는 상하가 서로 기만하고 죄를 덮어쓰는 자들이 많아져 형벌을 받은 자들이 길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 넘쳐나니, 천하가 고통받았다.

군경(君卿)은 물론 중서(眾庶)에 이르기까지 모두 스스로 위태로이 여겼으니, 고달프고 고통스런 지경 속에서 모두 자리에 불안하였으므로 쉽게 흔들렸다.

이에 진섭이 탕무(湯武)의 어짊도 없고, 공후(公侯)의 존귀함도 없었음에도 대택(大澤)에서 팔을 겉어붙이고 일어서니, 천하가 그에 호응했던 것은 그 민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고로 선왕은 일의 처음과 끝의 변화를 보고 존망의 기미를 살펴서, 목민(牧民)하는 도란 그들을 평안히 하는 데 있음을 아셨던 것이다.

천하에 역행하는 신하가 있을지라도 이에 호응하는 자가 없었을 것이다.

고로 말하기를,

“평안한 민은 더불어 의를 행할 만하고, 위태로운 민은 더불어 비행을 하기 쉽다.”

이리 이른 것이다.

천자가 되어 귀해지고, 천하를 얻어 부유하였음에도 그 몸이 육살당하는 것을 면치 못함은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는 것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세의 허물이다.

진조(秦朝)의 문화와 과학 기술

진조는 비록 존재한 시간이 상당히 짧았으나 후세에 기록할 만한 문화와 과학 기술을 남겼다. 앞서 서술한 도량형, 화폐, 문자 외에도 진조는 교통과 통신 등의 방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 복식

진한(秦漢) 시대는 중국에서 복식에서 중요한 단계였다. 즉 음양오행 사상을 복색 사상에 침투시켰다. 진조는 국운이 매우 짧았기에 진시황이 규정한 복색 외에 일반적인 복색은 전국시대의 습속을 답습했을 것이다. 진조의 복식은 여전히 상하가 연결된 형태였으며 넓은 소매와 큰 도포를 입었고 복식 제도는 엄격했다.

남성 복식: 진시황이 규정한 대례복(大禮服)은 상의와 하의가 모두 검은색인 제복이었으며 옷 색깔은 검은색을 최고로 삼았다. 또한 3품 이상의 관원은 녹색 도포를 입고 일반 서인은 흰 도포를 입게 규정했다. 당시 남자들은 대개 상투를 틀고 삼중의(三重衣)를 입었으며 허리에는 가죽 띠를 매고 띠 끝에는 띠고리(帶鉤)를 달았으며 다리에는 각반(行藤)을 둘렀다.

여성 복식: 진시황은 궁중의 비빈(妃嬪)들이 예쁘고 화려하게 차려입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예학(禮學)을 줄였기에 빈비의 복색은 개인적인 기호에 맞추는 것이 위주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여전히 오행 사상의 지배를 받았다. 여자들은 통상 머리 뒤로 상투를 내리고 땅에 끌리는 긴 도포를 입었으며 깃과 소매를 각각 세 겹으로 겹쳤는데 이를 “삼중의”라 불렀다.

시황릉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진나라 군대는 통일된 의복 색상이 없었으며 입는 옷은 모두 자비로 마련했다. 병마용의 상의, 하의, 다리 가리개, 깃, 소매 등은 모두 다른 색채를 보여준다. 고고학 통계에 의하면 당시 진나라 사람들의 의복 색상은 녹색, 붉은색, 보라색, 파란색이 주를 이루었으며 특히 녹색(綠色)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색채의 배합도 매우 정교했는데 녹색 상의에는 대개 분홍빛 보라색이나 주홍색 가장자리를 둘렀고 하의는 남색이나 보라색 혹은 붉은색을 입었다. 붉은색 상의의 경우 깃과 소매는 대개 녹색, 보라색, 남색 등이었고 하체는 녹색 바지를 입었다. 이처럼 빨강, 초록, 파랑, 보라가 강렬하게 대비되어 색조가 명쾌했다. 이는 열정적이고 기쁘며 활발한 느낌을 준다. 이런 다채로운 의복 색상은 당시 민간의 유행색이었으며 당시의 패션 색상인 ‘검정’과는 구별된다. 검은색은 당시 가장 존귀한 색이자 황실 전용 색상으로, 중대한 제례 행사 때 황제는 검은색 의복을 입었다.

* 교통

전국적인 육상 교통망의 형성은 진조에서 시작되었다. 진왕은 6국을 멸하기 위해 출병하던 당시부터 이미 각지에 사사로이 축조된 높은 담장과 보루를 평정하고 교통 운송에 방해가 되는 관문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 “차동궤(車同軌 수레 규격 통일)”를 실현했다. 전국의 차량이 동일한 폭의 궤도 간격을 사용하게 된 것은 수레의 주요 부품들이 통일된 표준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하며 교체가 신속하고 편리해졌음을 뜻한다.

“차동궤”의 요구에 따라 진나라는 과거의 복잡한 교통로를 정비하고 연결하는 기초 위에 막대한 인력과 물력을 투입하여 치도(馳道)를 중심으로 한 전국 교통 간선을 구축했다. 10년이 걸린 이 공사는 규모가 매우 방대하여 도읍인 함양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 전국의 각 군과 주요 도시를 모두 연결했다.

진나라 치도에는 통일적인 품질 표준이 있었다. 노면 폭은 50보(약 70미터)였고, 배수가 용이하도록 노반을 양측 지면보다 높게 돋우었으며 철퇴로 노면을 다졌다. 3장마다 청송 한 그루를 심어 가로수로 삼았고 도로 중앙 3장은 황제 전용으로 두었으며 양옆에는 보도를 개설했다. 10리마다 정(亭)을 세워 구간 치안 관리소, 행인 휴게소 및 우편 교체처로 삼았다. 이러한 대도가 전국에 퍼졌다. 또한 북쪽 흉노를 방어하기 위한 전용 도로인 “직도(直道)”를 닦았는데, 함양 북쪽의 운양(雲陽)에서 시작해 황하를 거쳐 지금의 포두(包頭)시인 구원군(九原郡)에 이르렀다. 이는 명장 몽염의 지휘로 구축되었으며 총 길이는 1,800여 리에 달했다. 이 외에도 남쪽에는 양광(광동·광서)과 서남으로 통하는 “신도(新道)”를 닦았다. 그리하여 전국에 종횡으로 교차하는 교통망이 형성되었다.

* 통신망

진조는 비록 겨우 15년간 존재했을 뿐이지만 놀라운 노력으로 전국적인 범위의 교통과 통신망을 완성했다. 도로가 확장됨에 따라 통신 또한 더욱 빨라졌다.

춘추전국시대에는 나라마다 우역(郵驛) 통신을 부르는 명칭이 달랐으나 진나라는 이를 통일했다. 진나라는 ‘거(遽)’, ‘입(笠)’, ‘치(置)’ 등 서로 다른 명칭을 일괄적으로 ‘우(郵)’라 통일해 불렀다. 이때부터 ‘우’는 통신 시스템의 전용 명사가 되었다. 진나라에서 ‘우’는 장거리 공문서와 서신의 전달 임무를 맡았고, 근거리에는 ‘보전(步傳)’ 즉 사람이 걸어서 전달하는 방식을 별도로 사용했다. 우편 전달 방식은 대개 정부가 규정한 고정된 노선을 따라 우체 요원이 역마다 이어받아 전달하는 릴레이 방식을 채택했다.

우편 경로를 따라 신사(信使)들이 식사하고 숙박하는 고정된 장소가 있었는데, 이러한 휴게소를 ‘우’ 또는 ‘정(亭)’이라 불렀다. 어떤 학자들은 전달 방식에 따라 명칭이 결정되었다고 보는데, 예를 들어 걸어서 전달하며 머무는 곳은 ‘정’, 말을 타고 전달하는 곳은 ‘역(驛)’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사실 진조 때는 후대처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진조 통일에 큰 공을 세운 명장 백기(白起)가 나중에 자결을 강요받은 지점을 어떤 책에서는 ‘두우(杜郵)’라 하고 어떤 책에서는 ‘두우정(杜郵亭)’이라 기록한 것이 그 증거다. 이는 우(郵)와 정(亭)이 실제로 혼용되었음을 말해준다.

시황릉 서측에서는 ‘평양역(平陽驛)’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역(驛)’ 역시 진조 때 우편 경로상의 거점 명칭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진조에는 ‘전사(傳舍)’라는 명칭도 있었다. 진말 한초 유방과 역이기(酈食其)가 만난 장소가 ‘고양전사’였으며(《사기・역생열전》), 초한전쟁 중 유방이 장이와 한신의 권력을 빼앗으러 갔을 때 머물렀던 곳도 수무(修武)의 ‘전사’였다(《사기・회음후열전》).

‘정’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리는데 일부 학자는 지방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보고, 다른 학자들은 공문과 우편물을 차례로 전달하는 임무를 더 많이 수행한 곳으로 본다. 진조 제도에 따르면 30리마다 ‘전(傳)’을 두고 10리마다 ‘정’을 두었으며 정에는 숙박 시설인 관사가 있었다. 진나라 법에 따르면 정은 신사들에게 전달용 말의 먹이와 행인의 식량, 장, 채소, 파, 부추 등을 제때 제공해야 했으며 심지어 공급하는 식량의 양과 장, 채소의 수량까지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최근 출토된 《수호지진묘죽간(睡虎地秦墓竹簡)》에는 이러한 내용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 2,000여 년 전 중국 우역의 생생한 상황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다.

공문과 서신이 제때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진 왕조는 일련의 엄격한 법률을 규정했다. 진나라의 《행서률(行書律)》에 따르면 문서는 급행 문서와 보통 문서 두 종류로 나뉘었다. 급행 문서에는 황제의 조서가 포함되며 즉시 전달되어야 하고 잠시도 지체해서는 안 되었다. 보통 문서 또한 당일에 보내야 하며 적체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했다.

율문에는 “명령서 및 급한 문서를 시행함에 있어 즉시 행하고, 급하지 않은 것은 당일에 마쳐 감히 머무르게 하지 말라. 머무르게 하는 자는 법률로 논한다”라고 적혀 있다. 즉 조서와 급행으로 명시된 문서는 즉시 보내야 하며, 급하지 않은 문서도 당일 중으로 처리해야 하고 지체하면 법으로 처벌한다는 뜻이다.

진조는 전조(前朝)의 부절(符節) 제도를 계속 사용했다. 1973년 섬서성 서안 교외에서 진나라의 구리제 “두호부(杜虎符)”가 발견되었는데, 부절 위에는 “병갑(兵甲)의 부절이다. 오른쪽은 군주에게 있고 왼쪽은 두(杜, 당시의 현)에 있다. 무장한 군사를 일으키거나 용병함에 있어 50인 이상일 경우 반드시 군주의 부절과 합치해야 감히 행할 수 있다”라고 명확히 적혀 있다.

이는 군주와 장수가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가 50인 이상 파병 시 합쳐서 확인해야 함을 의미하며 진조 중앙집권의 절대적인 권위를 보여준다. 이 부절에는 또한 “번수(燔燧, 봉화)의 일은 비록 부절의 명이 없더라도 행할 수 있다”는 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당시에도 여전히 봉화 제도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긴급 시에는 부절 없이도 봉화를 올릴 수 있었음을 뜻한다. 진나라는 봉화 통신을 만리장성에 활용하여 장성 내외에 봉화대를 설치했다. 봉화대의 흐름을 따라 미리 약속된 정보를 신속히 전달하여 변방의 정보를 제때 도읍 함양에 알릴 수 있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28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