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대제】 성세 하의 서양 경관 (상)
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청 초기, 중국 선교사들은 성조 황제와 깊은 인연을 맺어 대청성세(大淸盛世)의 기상 속에서 독특하고 새로운 풍경이 되었다. 사진은 강옹건 성세를 창건한 강희대제다. (에포크타임스 제작)
명조 말기, 이마두(利瑪竇 마테오 리치)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중토(中土)에 발을 디디며 이때부터 중화 왕조에서 선교사의 전설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청 초기에 이르러 서양 선교사들 중 뛰어난 인물들이 성조(聖祖 강희) 황제와 깊은 인연을 맺으며 대청성세의 수만 가지 기상 속에서 면모를 일신하는 기이한 장면이 되었다.
강희대제의 궁정에는 이러한 선교사 관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중화의 도포를 입고 유창한 한어나 만주어를 구사했지만, 높은 코와 깊은 눈, 하얀 피부와 금발을 가진 서양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기에 기이하고 흥미로우면서도 신비감이 가득했다. 그들은 머나먼 유럽에서 와서 전도(傳道)와 포교의 사명을 짊어졌으나, 대양 저편의 기이한 기물과 풍부한 지식을 가져와 뜻밖에도 중화의 문화와 과학 기술을 번영시켰다.
타향 사람으로서 선교사들은 매일 호기심 어린 혹은 적대적인 시선을 받으며 중국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었다. 그들은 해박한 학식 덕분에 제왕의 스승으로서 존경을 누리기도 했으나, 신앙의 차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면 강희제는 이 집단에 어떤 태도를 가졌으며, 또 선교사들과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냈을까?
역법 논쟁
“양광선(楊光先)과 탕약망(湯若望 요한 아담 샬 폰 벨)이 일찍이 오문(午門) 밖 구경(九卿)들 앞에서 해 그림자를 측정하여 예측했으나, 안타깝게도 백관 중에 그 계산법을 아는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강희제
이마두는 중국에 들어온 선교사 중 최초의 개척자로, 그는 향후 200여 년간의 선교 모델을 확립했다. 한편으로는 한어(漢語)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 과학 지식으로 화인(華人)들의 주의를 끌었으며, 동시에 화인들의 제천(祭天)이나 제조(祭祖 조상 제사) 등 전통 관습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마두의 일련의 활동은 화인들에게 서양 세계의 일면을 보여주었으며, 자신도 조야(朝野)의 명사들과 천자의 관심을 받는 스타 인물이 되었다.
강희 조정에도 몇 명의 유명한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이마두의 길을 따라 강희제 곁에서 활동했다. 비록 그들이 신앙을 전파하러 온 선교사였으나, 중국에서의 활동은 오히려 강희 성세를 돕는 과학 엘리트에 더 가까웠다. 그중 청조 황실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 선교사는 독일 출신으로 명청 두 왕조를 거친 탕약망이었다.
탕약망은 근면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중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천문에 밝고 지리에 정통한 팔방미인이었다. 역법(曆法)에 정통해서 월식을 정확히 예측한 덕분에 그는 곧 명조 황제의 찬사를 받았고 천문 관측과 절기 계산, 역법 제정을 담당하는 기구인 흠천감(欽天監)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또한 그는 황명을 받들어 군대용 대포를 주조하기도 했다.
명청 왕조가 교체될 때 탕약망은 천문과 역법 분야의 전문 지식 덕분에 계속해서 큰 은혜를 입어 흠천감 업무를 주관했다. 그가 추진한 서양 역법이 중국의 구 역법보다 더욱 정확했기에 신법(新法)이 청조에서 시행될 수 있었다. 탕약망은 다시 신역법을 수정해 《시헌력(時憲曆)》을 완성했는데, 이는 중화 5,000년 문명 중 마지막이자 가장 정확한 공식 역서가 되었다. 탕약망은 청조 역법에 뛰어난 공헌을 세웠고, 이에 순치 10년(1651년) 순치제는 그에게 통현교사(通玄教師)라는 존호를 내리고 친근하게 마파(Mafa,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나 강희 조(朝)에 이르러 탕약망과 다른 선교사들은 양광선을 필두로 한 수구파 관원들의 공격을 받았다. 강희 3년(1664년), 강희제가 불과 10세의 어린 나이였을 때 신구 역법 논쟁을 목격했다. 양광선은 상소를 올려 선교사들을 탄핵하며, 심지어 “차라리 중하(中夏 중국)에 좋은 역법이 없을지언정 중하에 서양인이 있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관점을 내놓았다.
당시 73세의 고령이었던 탕약망은 말을 할 수 없어 그의 조수였던 남회인(南懷仁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 신부가 대신 심문을 받았다. 보정(輔政)대신의 조종 하에 조정은 탕약망에게 사형을 판결했고, 남회인 등 세 명의 선교사에게는 장형 100대를 치고 국외로 추방하기로 했다. 강희 4년, 탕약망의 형벌은 더욱 잔혹한 능지처참으로 바뀌었고 다른 선교사들의 처분도 상응해 가중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경성(京城 북경)에 연달아 지진과 폭풍, 먼지가 하늘을 뒤덮는 공포스러운 기상이 나타났다. 다행히 효장황태후(孝莊皇太後)가 즉시 전지를 내려 탕약망 등의 형벌을 면해주었다.
이 억울한 옥살이를 겪으며 선교사들의 처지는 잠시 바닥으로 치달았고, 탕약망은 타향에서 병사했으며 흠천감도 역법을 전혀 모르는 양광선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강희제의 친정과 함께 모든 상황에 반전이 일어났다. 탕약망과의 만남은 강희제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몇 년 후 강희제는 이 일을 회상하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짐이 어릴 적에 흠천감의 한인(漢人) 관원과 서양인이 화목하지 못해 서로 탄핵하고 공격하여 거의 사형 판결에 이를 지경이었다.”
강희제는 선교사들에 대해 더욱 개명(開明)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강희 7년(1668년), 양광선이 신역법을 올렸을 때 강희제는 즉시 남회인을 불러 검증하게 했고 그 결과 많은 허점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다시 남회인 등을 불러들여 양광선 등과 조정에서 토론하게 했다. 이듬해 강희제는 다시 그들에게 각각 관상대(觀象臺)에 가서 그해의 절기와 천상을 예측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남회인의 예측은 하나도 틀림이 없었으나 양광선 등은 큰 오차를 보였다.
이번 중국과 서양의 역법 대결에서 서양 선교사들은 엄격하고 정밀한 계산법으로 승리했다. 강희제는 조서를 내려 탕약망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봉호(封號)를 회복시키며 그를 위한 제문을 지었다. 또한 남회인을 흠천감 직에 임명했다.
서학(西學)에 심취
“짐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지식으로 어떻게 타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하여 분발하여 (서양 지식을) 배웠다.” ——강희제
선교사들의 도래는 중화에 더욱 완벽한 역법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청조 황제가 서양 자연과학에 깊은 흥미를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본래 근면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던 강희제는 새로운 수학, 천문학, 물리학, 해부학을 접하며 제왕으로서 새로운 지식을 모르면 옳고 그름을 가리는 능력을 높일 수 없음을 깊이 느꼈다. 이에 그는 즉시 속인을 초월한 의지와 탐구 정신으로 서학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강희제의 일상 일정에는 어문청정과 일강(日講) 외에도 서양 지식을 배우는 활동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궁정 안의 선교사들은 모두 그의 스승이었다.
새벽녘이면 남회인이 급히 강희제의 내전으로 찾아와 오후가 되어서야 물러갔다. 정무를 처리하는 틈틈이 강희제는 남회인에게 기하학, 역학, 천문학 등의 지식과 수학 기구의 응용법을 배웠다. 그는 또한 남회인에게 《기하원본》을 번역하도록 당부했고, 이를 위해 이 선교사는 전문적으로 만주어를 배우기도 했다.
강희 27년(1688년), 프랑스 선교사 장성(張誠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과 백진(白晉 조아생 부뱅)이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청나라 황제에게 30여 점의 과학 기구와 서적을 가져왔다. 강희제는 크게 기뻐하며 즉시 그들을 입궁시켜 자신의 과학 교사로 삼았다. 선교사들이 끊임없이 들어옴에 따라 강희제의 스승도 늘어났고 강의 내용도 더욱 풍성해졌다.
예를 들어 그는 벨기에의 안다(安多 앙투안 토마)에게 천문과 산학을 배웠고, 프랑스의 장성과 백진에게 기하학과 해부학을 배웠으며, 프랑스의 홍약한(洪若翰 장 드 퐁트네), 유응(劉應 클로드 드 비스델)에게는 초시계나 수준의(水平儀) 같은 천문 기구의 응용을 배웠다. 강희제는 중년에 학질(말라리아)을 앓았는데 홍약한과 유응 두 사람이 서양 약인 키니네(奎寧)를 바쳤고, 약효가 즉각 나타나자 이는 강희제가 서양 약의 제조와 보급을 추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희제의 학습은 매우 고될 정도였다. 선교사들이 남긴 서신이나 문장의 기록에 따르면, 강희제는 배움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삼아 매일 오전과 오후 각각 2시간씩 선교사들의 강해(講解)를 경청했다. 강의할 때 강희제는 그들이 옥좌 옆에 앉아 더욱 자연스럽게 가르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강희제는 배운 지식을 계속 복습했고, 의문이 생기면 더욱 겸허히 가르침을 청하며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끊임없이 탐구했다.
이에 대신들과 궁인들도 이전 각 조대의 황제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어디를 가든 강희제는 시종들에게 각종 측정 기구를 지니게 하여 언제든 실험이나 연구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두 지점 사이의 거리, 산의 높이 혹은 강의 너비 등을 측정했으며, 때로는 천문 기구로 천체를 관측하거나 해시계 위 바늘 그림자의 길이를 계산하기도 했다.
이로 보아 강희제가 서양 학문을 배운 것은 탁상공론에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실제 생활에 운용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완전히 낯선 민족과 문화 지식에 직면하여 강희제는 모두 개명하고 광활한 흉금으로 수용하고 포용했으며, 자신의 서양 스승들을 매우 존경하여 그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봉호를 주어 그들의 장점이 제국을 위해 쓰이게 했다.
학습 과정에서 강희제는 중서(中西)를 관통하는 통재(通才 두루 통하는 인재)가 되었고, 이는 그가 국가를 다스리는 데 더 광범위한 사고와 도움을 제공했다. 그가 치수(治河) 시 어지를 내려 수정한 입체 청구(淸口) 하도도(河道圖)는 이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증거다.
왕의 해후
“그러나 그가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프랑스 왕궁의 그림들이었으며, 특히 국왕의 초상화였다. 황제는 눈을 떼지 않고 그것을 주시했는데, 마치 이 색채가 자연스럽고 선명한 초상화가 그의 눈앞에서 우리가 말했던 존엄한 군주의 모든 기적을 생생하게 재현하는 듯했다.” ——백진
(출처: 《백진 신부가 국왕의 고해 신부 라셰즈에게 보낸 서신》, 1699년 북경에서)
강희제가 중화 왕조의 성세를 창건함과 동시에, 먼 유럽 대륙에서는 태양왕 루이 14세가 다스리는 프랑스 왕국이 서양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두 군주는 마치 쌍성(雙星)처럼 온 세상의 찬란한 문명을 밝히고 있었다. 선교사들의 중화 여행을 매개로 동서양의 두 거대 군주도 곧 역사적인 해후를 선보인다.
강희 20년(1681년), 벨기에 선교사 백응리(柏應理 필리프 쿠플레)는 강남 일대에서 20여 년간 생활하다가 이때 로마 교황청의 명을 받들어 잠시 유럽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출발 전 그는 젊은 중국인 친구인 25세의 선비 심복종(沈福宗)을 동반했다.
3년 후 심복종은 프랑스를 방문하여 루이 14세의 성대한 알현을 받았으며, 프랑스 궁정에 나타난 첫 번째 중국인이 되었다. 그는 라틴어로 번역된 유가 경전과 중국 명사들의 초상화를 가져왔고 직접 서예 예술을 선보였다. 심복종의 외모, 의복, 담화와 기질은 즉시 프랑스 상류층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는 태양왕으로 하여금 중화 제국과 교류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했다.
강희 24년(1685년), 호화로운 범선 한 척이 프랑스에서 동양을 향해 항해했다. 배에는 박학다식한 선교사 6명과 수많은 과학 기구, 서양 보물들이 실려 있었다. 이 6명은 태양왕이 선정한 ‘왕의 수학자들’로, 험난한 해로와 육로의 여정을 거쳐 그중 5명인 백진, 장성, 홍약한, 유응, 이명(李明 루이 르 콩트)이 마침내 강희 27년 청 북경에 도착했고, 곧 문무를 겸비하고 웅재대략을 지닌 중국 황제를 배알했다.
강희제는 프랑스 사절의 도래를 매우 기뻐하며 그들에게 서양 지식을 배웠고 태양왕의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학습이 깊어짐에 따라 강희제는 드넓은 중화 제국에 더 많은 서양 과학 기술 인재가 필요함을 깊이 느꼈다. 그리하여 강희 32년(1693년), 백진을 중국 특사로 임명하여 프랑스로 돌아가 더 많은 선교사를 모집하게 하는 한편,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태양왕에게 귀한 선물을 보냈다.
흥미로운 점은 과거 프랑스의 사절이었던 이가 청조(淸朝)의 특사로 변신했다는 사실이다. 백진은 49권의 한문 서적과 기타 진귀한 선물들을 전달하여 태양왕을 무척 놀라게 하고 기쁘게 했다. 백진은 또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기록을 《중국현상》과 《강희황제》란 두 권의 책으로 써서 프랑스 왕실에 헌상했다.
태양왕은 백진이 묘사한 강희제의 글 속에서 마치 또 다른 자신을 보는 듯했다. 실제로 강희제와 태양왕은 닮은 점이 아주 많았다. 둘 다 어린 시절 즉위하여 소년에 친정(親政)을 시작했고, 음악과 예술을 애호했으며, 비범한 문치무공(文治武工)으로 일조(一朝) 일국(一國)의 전성기를 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서로의 문명에 대해 존경과 갈망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공통점은 두 군주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백진의 귀국은 유럽인들이 청나라를 더 깊이 이해하게 했으며, 뒤이어 200여 년간 유행한 중국풍(Chinoiserie) 예술 조류를 불러일으켰다.
강희 37년(1698년), 흠차대신 백진은 9명의 선교사를 데리고 다시 프랑스에서 장정에 올랐다. 이들은 모두 청조에서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여전람도》를 제작한 지리 전문가 뇌효사(雷孝思 장바티스트 레지), 외교 인재를 양성한 파다명(巴多明 도미니크 파레닌), 서양 악곡을 창작한 바이올리니스트 남광국(南光國 루이 페르농), 그리고 《조씨고아》를 유럽에 전한 번역가 마약슬(馬若瑟 조제프 앙리 마리 드 프레마르) 등이 그들이다.
백진 등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 마침 강희제는 남순(南巡) 중이었다. 강희제는 진강(鎭江)의 어주(禦舟 황제 전용 배) 위에서 직접 9명의 선교사를 접견했다. 백진의 서신 기록에 따르면, 태양왕이 보낸 모든 선물 중에서 강희제가 가장 흥미를 보인 것은 국왕의 초상화였다. 그는 눈을 떼지 않고 지구 반대편의 위대한 군주를 응시했다. 마치 동서양의 두 영주(英主)가 그 순간 짧고도 신비로운 교감을 나눈 듯했으며, 역사 속에서도 보기 드문 한 장면을 남겼다.
주석
[1] 楊光先《不得已》下卷:《日食天象驗》。
[2] 《庭訓格言》:朕幼時,欽天監漢官與西洋人不睦,互相參劾,幾至大辟。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