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劉曉)
【정견망】
이천여 년 전 춘추전국시대는 혼란스러운 시대이자 역사적 전환기였다. 그 당시 전국칠웅인 진(秦)나라, 제(齊)나라, 초(楚)나라, 연(燕)나라, 한(韓)나라, 조(趙)나라, 위(魏)나라가 잇따라 무력으로 천하를 정벌했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등 온갖 난상이 도처에 널려 있어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 이러한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났다. 기원전 234년, 진왕 영정(嬴政, 훗날의 진시황)이 돌연 군대를 동원해 한나라를 공격하라는 명을 내리며 한비(韓非)를 요구한 것이다. 순식간에 한나라는 위급함에 처했다. 한비가 비록 한나라에서 어느 정도 지명도는 있었으나, 이 정도로 중대한 인물은 아니었다. 한왕(韓王)은 진나라 군대가 성문 앞까지 들이닥친 목적이 그저 한비를 요구하는 것에 불과함을 보고, 그를 내주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다. 다만 체면을 살리기 위해 한왕은 한비를 한나라를 대표하는 사절로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했고, 진나라는 즉시 군대를 물렸다.
한비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진왕이 군대까지 일으켜 한나라를 공격하게 만들었을까? 한비는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오늘날의 하남 일대)의 어느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한나라 왕실의 공자(公子)이기도 했다. 이러한 가정 배경으로 인해 그는 시대의 변화에 대해 한층 더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총명하고 근면했던 한비는 저명한 유학 대가인 순자(荀子)를 스승으로 모셨으며, 훗날 대진(大秦)의 승상이 된 이사(李斯)가 그와 동문이었다. 제자백가의 학설을 널리 섭렵한 후, 한비는 스승 순자의 유가 사상을 계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학설을 제시하며 자타가 공인하는 법가(法家)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한비는 말을 더듬었기에 다른 사람들처럼 도처를 유람하며 유세객이나 객경(客卿)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글을 써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는데, 현재 보존되어 내려오는 것만 55편에 달하며 그 문사(文詞)가 날카롭고 논리가 정교하다.
《사기·노자한비열전》에서는 한비에 대해 “형명법술(刑名法術)의 학문을 좋아했다”라면서도 “그 근본은 황로(黃老)에 귀결된다”라고 평가했다. 즉, 그의 학설은 근본적으로 도가(道家)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그가 저술한 《해로(解老)》, 《유로(喻老)》 등의 편장에서 엿볼 수 있다. 한비는 “도(道)란 만물이 그러하게 되는 까닭이며, 만 가지 이치가 상고하는 바이다”, “만물이 성취되는 까닭이다”라고 여겼다.
즉, 도란 만물의 본원이며 만물의 보편적 규율이자 만물을 형성하는 바탕이라는 의미다. 한비는 도가에서 만물의 본원으로 여기는 ‘도’를 사회생활에 도입해 군주의 도(道), 즉 군주가 군신을 부리는 도리로 연화(演化)시켰다.
한비는 신도(慎到)의 ‘존왕(尊王)’ 사상을 흡수해 “일은 사방에 있으나 요체는 중앙에 있으니, 성인이 요체를 쥐면 사방이 와서 본받는다”, “군주가 존귀한 까닭은 권세(權) 때문이다”, “만승(萬乘)의 주와 천승(千乘)의 임금이 천하를 제어하고 제후를 정벌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위세(威勢)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즉 한 나라의 대권은 군주(‘성인’) 한 사람의 손에 집중되어야 하며, 군주는 반드시 권력과 세력이 있어야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법은 군주에게서 나오고’, ‘명령에 두 가지 말이 없으며’, ‘군주가 법을 세우는’ 것이 바로 ‘성왕(聖王)이 법을 세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비가 말한 ‘세(勢)’는 군왕의 지고무상한 권세이며, ‘법(法)’은 왕법(王法) 즉 ‘왕’에게만 독존하는 법령·교화·책략이다. 법은 군왕의 법이며, 군왕 이외에 독립된 법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왕과 왕의 언행이 바로 천하 최고의 법이며, 군왕은 시종 국가 최고의 입법권을 장악한다. 그러므로 ‘군주를 높이고 법을 밝혀야(尊主明法)’ 한다는 것이다.
‘술(術)’이란 군주가 아랫사람을 부리는 방법인데, “술은 드러내고자 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군주가 신하를 제어하는 수단은 깊이 감추어 드러내지 말아야 함을 뜻했다.
이외에도 한비자는 또 ‘법으로써 가르침을 삼는다(以法爲教)’고 주장했다. ‘왕법’을 제정했으면 엄격히 집행해야 하며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여, ‘법은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형벌을 과함에 대신을 피하지 않으며, 선(善)을 포상함에 필부도 빠뜨리지 않는다’는 것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비는 군주가 천하를 통치하려면 반드시 인성과 인정에 근거해야 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성이란 주리면 먹고, 추우면 입고, 목마르면 마시는 것이며, 자질구레하게 사사롭고 이익을 좇아 해를 피하려는 성향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법제가 서고 상벌이 베풀어질 수 있는 인성적 기초라는 것이다. 한비가 강조한 왕법(王法)은 상앙(商鞅), 오기(吳起) 등이 의지했던 형법(刑法)과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한비가 묘사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는(以法治國)’ 청사진은 다음과 같다.
“현명한 군주의 나라에는 서책의 글이 없고 법으로써 가르침을 삼으며, 선왕(先王)의 말이 없고 관리를 스승으로 삼으며, 사사로운 칼잡이의 용맹이 없고 적의 목을 베는 것으로 용맹을 삼는다. 그리하여 경내의 백성들이 말할 때는 반드시 법에 규율되고, 움직일 때는 공로로 귀결되며, 용맹을 떨치는 자는 군대에서 힘을 다한다.”
대략적인 뜻은, 현명한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에는 제자백가의 서책이나 경전이 지침이 되지 않고 왕법으로 백성을 교화하며, 선왕의 유훈(유가 저작)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관리를 스승으로 삼고, 야만적인 사사로운 무력을 금지하고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것을 용맹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나라 안의 백성은 말할 때 반드시 법도를 지킬 것이고, 일을 할 때는 성과를 낼 것이며, 용맹함이 있다면 군대에서 쓰이게 된다.
한비는 분명 유가를 배척했고 “유자는 글로써 법을 어지럽힌다”라고 했으니, 즉 유생들이 글을 써서 법치를 교란한다고 보았으며 심지어 유가 학자를 ‘오두(五蠹, 다섯 가지 좀벌레)’의 우두머리로 꼽았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한비 학설 속의 ‘존왕’은 여전히 유가 사상을 흡수했다는 점이다.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라고 했고, 맹자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을 제시했는데, 《한비자·충효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하가 군주를 섬기고, 자식이 아비를 섬기며,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이 세 가지가 순응하면 천하가 다스려지고, 이 세 가지가 거스르면 천하가 어지러워지니, 이것이 천하의 상도(常道)이다.”
한비의 ‘주세지융(主勢之隆, 군주의 세력을 융성하게 함)’, ‘법막여현(法莫如顯, 법은 밝히는 것보다 좋은 게 없음)’, ‘술불욕견(術不欲見 술은 드러내지 않는다)’의 삼위일체 사상은 일찍이 그가 한왕에게 상소하여 한왕이 변법(變法)하고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당시 나라를 다스림에 법치에 힘쓰지 않는 것과 인재 양성과 관리 임용이 따로 노는 상황을 바꾸도록 힘써 간한 것이다. 하지만 돌아온 응답은 ‘한왕은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차선책으로 한비는 본인이 생각하고 느낀 바를 적어 《고분(孤憤)》, 《오두(五蠹)》, 《세난(說難)》 등의 명편을 남겼고, 마침내 지음(知音 진왕)을 만나게 되었다.
한비의 글이 진나라에 전해진 후, 흉중에 거대한 뜻을 품고 막 집권했던 진왕 영정은 글을 읽고 크게 감탄했다. “과인이 이 사람을 만나 함께 노닐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구나.”
이는 천하 통일의 대업을 도모하던 진시황이 보기에 한비의 법, 경작과 전쟁의 근본, 상벌의 술, 부국의 방책 등이 마치 모두 자신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 한비의 가치는 군대와 맞먹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상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한비를 요구한’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한비가 진나라에 도착하자 진왕 영정은 대단히 기뻐하며 매일 그와 함께 치국 방략을 논했다. 한비가 ‘법’, ‘술’, ‘세’ 등의 개념과 방침을 변론하고 해석하는 것은 진왕의 생각과 단박에 맞아떨어졌고, 진왕은 서로 만남이 너무 늦었음을 한탄하며 한비를 객경(客卿 외국 사람을 경에 임명하는 것)으로 임명하려 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진왕 곁에 있던 이사(李斯)는 한비의 재능을 시기하고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삼일에 한 번꼴로 진왕에게 바람을 잡았다. 한비는 한나라의 공자이므로 결코 진나라를 위해 쓸 수 없으며, 그는 한나라의 이익을 위해 온 것이고, 진나라가 통일 대업을 완성함에 첫 번째 목표가 바로 한나라이니 한비는 결국 두 마음을 품어 진나라의 통일을 방해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줄곧 이사를 매우 신임했던 진왕은 그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여겼다. 동시에 한비가 진나라에 도착했을 때 진왕에게 올린 《존한(存韓)》이라는 글에서 한나라를 보존하고 조나라를 멸할 것을 청했으니 바로 이사의 말과 부합했다. 진왕은 마침내 한비를 감옥에 가두라는 명을 내렸다. 한비는 진왕 앞으로 찾아가 하소연하거나 상소를 올리고자 했으나 간수와 이사는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결국 한비는 이사에게 독살당했다.
한비가 막 죽었을 때 진왕이 보낸 사면 사절이 도착했다. 이사는 진왕에게 한비가 죄를 두려워하여 자살했다고 고했고, 진왕은 비록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한비가 이미 죽었으므로 어쩔 수 없이 덮어두고 말았다.
한비는 비록 죽었으나 그의 사상, 특히 ‘주세지융(主勢之隆)’, ‘법막어현(法莫於顯)’의 사상은 진왕에게 수용되어 실천에 응용되었으며, 도가·음양가·유가 등의 사상과 뒤섞여 최종적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대일통(大一統)의 제국을 건립하게 했다. 진왕은 진시황이 되었고 그의 공적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29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