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220년)
심연
【정견망】
쇠락으로 가는 동한
장제(章帝) 말년의 가장 큰 실책은 광무제와 명제가 외척과 환관의 참정을 엄격히 금지했던 정책을 단번에 바꾸어, 황후 두씨를 총애하고 황후의 오라비 두헌을 중용했으며 환관을 우대한 데 있다. 이때부터 외척과 환관이라는 두 세력이 한가 왕조의 정치 무대에 다시 등장했다.
동한에 외척 전권이 여러 차례 출현한 것은 황제의 나이가 어린 것과 분리할 수 없다. 화제(和帝) 때부터 즉위할 때 18세 이상인 성인 황제가 없었으므로, 이는 황태후가 권력의 중심이 되기 쉽게 만들었다. 깊은 궁궐에 있는 황태후는 자신의 친정 집안 역량을 빌려야만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쉽게 권력을 얻은 외척들은 대부분 권력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 권세를 믿고 나쁜 짓을 저질렀다. 이는 자연히 조정 대신들의 불만을 일으켰으나,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는 폭력적인 진압으로 인해 점차 약해졌다.
다른 한편으로, 어린 황제가 점차 자라나 외척의 간섭에 불만을 품게 되면, 자연히 자신과 밤낮으로 함께 지내는 환관을 빌려 외척을 주살했다. 만약 성공하면 환관이 이때부터 정사에 간여했다. 만약 실패하면 황제의 목숨도 보존할 수 없었다. 환관은 깊은 궁궐에 처해 있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통치는 왕왕 전단적이고 독재적이었으며, 자연히 무슨 인덕(仁德)의 정치를 실행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화제 때 외척 전권이 시작된 이래로 동한 왕조의 개명 정치는 이미 끝났고, 왕조 전반적으로 이때부터 외척과 환관의 싸움과 다툼 속에 처하게 되었다. 한가(漢家)의 천하도 성세에서 쇠락으로 걸어갔으며, 결국 그 속에서 멸망했다.
*외척 전권(專權)의 시작과 영원(永元) 난정(亂政)
88년 2월 임진일, 장제가 세상을 떠나자 겨우 10세 된 황태자 유조(劉肇)가 황위에 올라, 이듬해 연호를 ‘영원(永元) 원년’으로 고쳤으니 이가 바로 한 화제(和帝)다.
화제 유조는 장제의 네 번째 아들이다. 장제의 황후는 두씨인데, 두씨 소생의 아들이 없자 유조의 생모 양(梁)귀인을 해쳐 죽이고 유조를 양자로 삼았다. 장제는 두씨를 매우 총애했기 때문에 이미 세웠던 태자 유경(劉敬)을 폐위하고, 당시 겨우 3세였던 유조를 태자로 세웠다. 7년 후 장제가 세상을 떠나자 유조는 두태후에 의해 황위에 올랐다.
화제가 어렸기 때문에 자연히 두태후가 수렴청정하며 조정 정사를 대행했다. 두태후는 이에 자신의 오라비 두헌을 차기장군으로 임용해 조정의 기강을 독점했고, 두씨 가문의 수많은 친족을 경관과 지방관으로 임명했다. 사실상 두씨 가문이 황제를 한 셈이다. 이에 따르지 않는 관리들에 대해 두헌은 자객을 길러 위협했다. 동한은 첫 번째 외척 전정을 시작했고, 광무제가 부흥시킨 유씨 강산은 이로써 거대한 위기에 처했다.
호강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두태후는 먼저 ‘염철(鹽鐵)의 금지를 폐지하고 백성들이 마음대로 소금을 굽고 철을 주조하게 한다’고 선포했다. 이는 호강(豪强)들이 염철업을 마음대로 겸병하여 폭리를 취할 수 있게 했고, 당연히 당시의 사회 모순을 심화시켰다. 이때부터 호강의 세력이 커졌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두씨 가문은 어린 황제를 통제했을 뿐만 아니라 유씨 황족에게도 큰 타격을 입혔다. 그들은 전권에 의지해 제멋대로 행동하고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을 속이고 억눌렀다. 조정의 문무대신은 온통 두씨의 사람들이었으며, 두씨를 따르지 않는 대신들은 주살되거나 관직에서 쫓겨났다.
화제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두씨 전권의 국면에 점차 불만을 품게 되었다. 92년, 14세의 화제는 심복 환관 정중(鄭衆)과 모의해 두헌을 체포해 처형했고, 두씨의 심복들을 전부 삭탈관직해서 감옥에 가두고 죄를 다스림으로써 외척 두씨의 세력을 일거에 소탕했다. 동한 역사상의 첫 번째 외척 전권 시대는 이렇게 끝났다. 그리고 정중은 공로로 후(侯)에 봉해졌으며, 환관이 이때부터 정사에 참여했다. 환관의 정사 간섭은 동한 황실의 내란을 더욱 격렬하게 만들었고 조정 정치도 더욱 부패하게 만들어, 유씨 왕조가 쇠락하는 걸음걸이를 가속화했다.
화제는 재위 17년 만인 105년 12월 신미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겨우 27세였다. 화제는 신릉(慎陵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 동남쪽)에 묻혔으며, 묘호는 목종(穆宗), 시호는 효화황제다. 그의 아들 유륭(劉隆)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한 상제(殤帝)다.
*화제 이후 외척과 환관의 다툼
화제가 세상을 떠난 후, 황후 등씨(鄧氏)는 화제의 병든 장자 유승(劉勝)을 폐위하고 태어난 지 겨우 100여 일 된 유륭(劉隆)을 황제로 세웠으며 연호를 ‘연평(延平)’으로 고쳤으니 이가 바로 한 상제다.
상제가 어렸기 때문에 등태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등태후의 오라비 등즐(鄧騭)이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어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유씨의 동한 왕조는 다시 외척 등씨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상제 유륭은 보위에 오른 지 겨우 8개월 만에 요절하여, 중국 역사상 가장 나이가 어리고 수명이 가장 짧은 황제가 되었다.
유륭이 죽은 후 대신들은 유승(劉勝)을 황제로 옹립하려 했으나, 등태후와 등즐은 유승이 원망을 품고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할까 봐 염려했다. 이에 등태후는 13세 된 황실 후예 유호(劉祜)를 황제로 세워 자신이 계속 수렴청정을 했으며 등즐도 여전히 보정(輔政)대신이 되었다. 이렇게 유씨 왕조는 비록 황제를 바꾸었으나 조정의 정치는 여전히 외척인 등씨가 쥐고 흔들었다.
유호는 본래 폐태자였던 청하왕(清河王) 유경(劉慶)의 아들이자 한 장제의 손자이며 한 화제의 조카다. 106년에 즉위하여 이듬해 연호를 ‘영초(永初)’로 고쳤으니 이가 바로 한 안제(安帝)다. 안제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신 주장(周章) 등이 등씨 가문을 주살하고 안제를 폐한 뒤 유승을 옹립하려고 밀모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등씨에게 진압당했다.
등태후는 두씨 가문의 실패에서 몇 가지 경험을 얻어 외척과 환관을 병용했으며, 형식상 외척에 치우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남윤(河南尹), 남양태수(南陽太守 낙양과 남양은 귀족들이 집중적으로 모인 곳이다) 등 중요한 지방관에게 권한을 주어 등씨 가문 사람들과 등씨 가문의 친척 빈객들을 엄격히 단속하게 했고, 만약 이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지방에서 이들을 처벌할 권한을 주었다. 그녀는 또 유학을 표창하고 삼공(三公)을 존중하고 예우했으며, 등즐로 하여금 명사 양진(楊震) 등 여러 사람을 천거하게 함으로써 관료와 사인들을 외척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등태후가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등태후는 안제 유호가 장성한 후에도 여전히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유씨 황실과 외척의 모순은 날로 격렬해졌다.
그러다 121년 등태후가 세상을 떠나자, 안제는 일부 환관들과 연합해 일어나 등씨 사람들을 주살했다. 등즐 등 7명이 죽임을 당했고 외척 등씨 가문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정사에 간여하던 국면은 이로써 끝났다. 하지만 안제 후기의 정국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많은 환관과 새로운 외척을 기용했고, 새로 득세한 환관들은 실의한 관료 및 하층 호강들을 관리로 임용해 자신의 패거리로 삼았다.
안제 시기에는 조정이 부패하고 사회가 어두웠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득세하고 어질고 능력 있는 이들이 난을 당했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안제 시기 전국에 지진이 많았고 수재, 한재, 황충의 피해가 빈번해 끊이지 않았으며, 밖으로는 강족(羌族) 등 소수민족이 변경을 침입하고 안으로는 두기(杜琦) 등이 이끄는 10여 년에 걸친 농민 봉기가 있어 사회 위기가 날로 깊어졌다. 유씨의 동한 왕조는 한 걸음 더 쇠락으로 나아갔다.
125년 3월, 친정한 지 겨우 4년밖에 안 된 안제가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32세였고 공릉(恭陵 지금의 낙양시 동북쪽)에 묻혔으며, 묘호는 공종(恭宗), 시호는 안제다.
안제에게는 이(李)귀인이 낳은 유보(劉保)가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안제의 황후 염희(閻姬)는 마음이 모질고 독랄하며 야심이 큰 여인이었다. 그녀는 먼저 이귀인을 죽인 다음 안제를 핍박해 10세 된 태자 유보를 폐위해 제양왕(濟陽王)으로 삼았다. 안제가 죽은 후 염태후는 태후의 신분으로 수렴청정을 했고, 오라비 염현(閻顯)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해 군정 대권을 장악했다. 염태후는 염씨 가문이 장기간 조정의 정치를 쥐고 흔들게 하기 위해, 나이가 어려 철없는 황족 구성원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했고, 결국 한 장제의 손자이자 제북왕 유수(劉壽)의 아들 북향후(北鄉侯) 유의(劉懿)를 황제로 선택했으니 사서에서는 이를 소제(少帝)라 부른다.
소제가 어렸으므로 외척 염씨가 조정의 정치를 관장하여 안제의 심복 환관들을 주살하고 대권을 독점했다. 이렇게 동한 유씨 왕조는 환관 전정에서 외척 염씨의 전횡으로 바뀌었다. 소제 유의는 재위 겨우 7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다.
소제가 죽은 후 염씨는 비밀리에 발상하지 않고 궁문을 닫았으며, 군대를 주둔시켜 스스로 지키면서 여러 왕자 중에서 제어하기 편리한 괴뢰를 다시 골라 황제로 삼으려 했다. 11월, 중상시(中常侍) 손정(孫程) 등 19명의 환관이 궁중에서 정변을 일으켜 염현, 염경(閻景) 형제를 죽이고 일거에 염씨 세력을 소멸했으며, 또 태후를 핍박해 전국옥새를 내놓게 하고 11세 된 제양왕 유보를 맞이해 황제로 세웠다.
유보는 이렇게 125년 11월 정사일에 제위에 올랐고 연호를 ‘영건(永建)’으로 고쳤으니 이가 바로 한 순제(順帝)다. 순제는 즉위한 후 손정 등 19명의 환관을 후(侯)로 봉했고, 이는 한 왕조의 환관 세력이 전례없이 팽창시켰다. 그들은 조정의 관직을 겸임하며 정사를 조종했고, 게다가 작위를 양자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또 효렴(孝廉)을 천거할 권리까지 얻었다. 이렇게 동한 유씨 정권은 다시 외척 염씨의 전정에서 환관의 전횡으로 변했다. 일순간 조정 정치는 더욱 부패해졌고 사회는 더욱 어두워졌다.
132년, 순제가 18세 때 귀인 양(梁)씨를 황후로 세웠다. 얼마 후 양황후의 아버지 양상(梁商)을 대장군으로 임용해 조정 정사를 총괄하게 했다. 이로써 새로운 외척 양씨 가문이 다시 동한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시에 양씨 가문이 조정을 가득 채웠고 강직하고 올바른 관리들을 배척하고 박해하니, 조정의 정치는 더욱 부패해졌다.
144년 8월, 순제 유보가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불과 30세였고 헌릉(憲陵 지금의 낙양시 서쪽)에 묻혔으며, 묘호는 경종(敬宗), 시호는 효순황제다. 유보는 재위 20년 동안 어리석고 무능해 아무런 공적이 없었으며, 오직 환관과 외척에게 전권을 내주었을 뿐이다. 동한 왕조는 환관과 외척의 다툼 속에서 쇠락이 가속화했다.
순제의 황후 양씨는 아들이 없었고 오직 우(虞)귀인이 낳은 유병(劉炳)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한 명 있었다. 태자 유병이 순제가 세상을 떠난 후 황위에 올라 이듬해 연호를 ‘영가(永嘉)’로 고쳤으니 이가 바로 한 충제(沖帝)다. 충제는 즉위할 때 나이가 겨우 2세였으므로 양태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태후의 오라비 양기(梁冀)가 조정의 정치를 관장했다. 충제는 재위 겨우 반년 만에 요절했다.
충제가 죽은 후 양태후는 장기간 권력을 잡기 위해 겨우 8세 된 황족 유찬(劉纘)을 궁으로 데려왔다. 145년 정월 정사일에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본초(本初)’로 고쳤으니 이가 곧 한 질제(質帝)다. 질제 유찬은 한 장제의 현손이다.
질제가 즉위한 후에도 조정의 정치는 여전히 양씨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양씨는 전횡하고 발호하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백성을 잔혹하게 해쳤으며, 심지어 공개적으로 탐오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동한 정치는 이때부터 가장 어두운 시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질제 유찬은 즉위할 때 비록 철은 없었으나, 천성이 총명하고 영리해 양기의 전횡과 발호에 극도로 불만을 품었다. 어느 날 조회를 할 때 소황제는 뜻밖에 만조(滿朝) 문무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양기를 가리키며 “이자는 발호장군(跋扈將軍)이다”라고 말했다. 양기가 크게 분노했고 질제가 성년이 된 후에 제어하기 어려울까 봐 염려해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146년 윤6월 갑신일, 양기는 내시에게 명령해 떡 속에 독약을 섞어 넣어 질제를 독살시켰다. 이때 질제는 재위 겨우 1년 남짓이었고 나이는 겨우 9세였다.
양기는 한 질제를 독살한 후, 같은 달 경인일에 군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5세 된 유지(劉志)를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건화(建和)’로 고쳤으니 이가 곧 한 환제(桓帝)다. 한 환제 유지는 한 장제의 증손이자 하간효왕 유개의 손자이며 능오후(蠡吾侯) 유익(劉翼)의 아들이다. 환제가 즉위한 후에도 양태후가 계속 수렴청정을 했고, 대장군 양기가 여전히 조정의 대권을 장악했다. 150년 양태후가 병으로 죽었다. 한 환제가 정식으로 친정했으나 실제 대권은 여전히 양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예컨대 사방에서 바치는 공물은 여전히 먼저 양기에게 보내진 후 비로소 황제에게 갔고, 백관의 승진도 먼저 양기의 집에 가서 은혜에 감사해야 했다. 이렇게 환제 유지와 양씨 가문의 모순은 날로 깊어졌다.
159년 8월, 환제 유지는 환관 단초(單超) 등 5명과 모의해 우림군 1천여 명을 발동해 양부(梁府)를 포위하고 수십 명을 주살했으며 300여 명을 파직시켰다. 양기 부부는 자살을 강요당했고 양씨 집안은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몰수된 가산이 무려 30여 억에 달했다. 외척 양씨의 수십 년에 걸친 전정은 이로써 끝났다.
이후 환제는 단초 등 5명의 환관을 후로 봉했으니 사서에서는 ‘환관오후(宦官五侯)’라 부른다. 동한 정권은 다시 외척의 손에서 환관의 손으로 넘어갔다. 환제는 앞선 몇 명의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평범하고 무능했으며, 또 충량(忠良)한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아 결국 환관에게 제약당하고 아무런 업적도 없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환관과 근습(近習 황제를 가까이 모시는 시중)들이 국가 권력을 도적질해, 손에는 왕작(王爵)을 쥐었으며 임금의 법을 입에 머금었다”고 전한다. 그들은 외척보다 더욱 탐욕스럽고 다투어 사치하고 천하에 학정을 펼쳐 백성들이 견디지 못하게 하고 원망의 소리가 길에 가득 차게 만들었다.
바로 이때 사례교위(司隸校尉) 이응(李膺)을 우두머리로 하는 강직하고 올바른 관료들이 한 무리의 재주와 견식이 있는 태학생(太學生)들과 연합해, 천하를 구하고 백성을 복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환관의 어두운 통치를 맹렬히 규탄했다. 166년, 환관들이 이응이 태학생들과 결탁해 조정을 비방했다고 무함하자, 어리석기 짝이 없는 환제는 뜻밖에 조서를 내려 이응 등 200여 명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었다. 이듬해 이응을 사면해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종신토록 금고(禁錮)했으니, 이것이 바로 중국 역사상 유명한 ‘당고(黨錮)의 화’다.
환제 유지는 재위 22년 만인 영강(永康) 원년 12월(168년 1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36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