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크타임스 문화팀

쿠빌라이전 (에포크타임스 제작)
쿠빌라이가 관할하는 한지(漢地)의 범위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그의 통치 중심도 중원 지역으로 이동했다. 만약 카라코룸(和林)을 계속해서 제국의 도성으로 삼는다면 이미 적합하지 않았기에, 중원 왕조를 모방해 연호와 국호를 건립할 무렵 쿠빌라이는 도성을 카라코룸에서 한지로 옮겼다.
1263년 5월, 쿠빌라이는 개평(開平)을 상도(上都)로 승격시켜 잠시 카라코룸을 대체하게 했다.
1264년 8월, 쿠빌라이는 조서를 내려 연경(燕京)을 중도(中都)로 고치고 새로운 도읍을 세울 준비를 했다. 1272년 2월, 쿠빌라이 유병충의 건의를 채택하여 중도를 대도(大都)로 고치고 이곳에 도읍을 세울 것을 선포했으며, 상도는 여름을 보내는 하도(夏都)로 삼아 양도제(兩都制)의 격국을 형성했다. 몽골인들은 대도를 ‘칸발리크(汗八裏)’라 불렀으니 ‘대칸의 성’이라는 뜻이며, 한자 뜻으로 보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거대한 도성’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 대도가 중국 본토를 통제하는 정치 중심이라면, 상도는 북방 몽골 본토를 통제하는 책임을 맡았다. 황제는 상도에서 수렵과 행락을 즐겼을 뿐만 아니라, 몽골 제왕 귀족들과 거행하는 쿠릴타이와 전통적인 제사 활동도 모두 이곳에서 거행했다.
주지하다시피, 나중에 명·청 양조(兩朝) 역시 모두 북경(北京)을 수도로 삼았다. 오늘날 대도의 유적은 이미 현재 북경성에 덮였고, 북성(北城)의 한 토벽 구간이 원 대도 유적공원으로 개벽된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이미 대도성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사 문헌과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예전의 대도를 환원해 보면, 우리는 고인의 지혜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도 배치에 담긴 깊은 뜻
1267년(지원 4년), 중서성 보정(輔政) 중신 유병충은 쿠빌라이의 명을 받들어 연경에 당도해 새 도성의 계획과 건설을 시작했다. 《역경(易經)》과 예제(禮制)에 정통했던 그는 대도의 배치를 계획할 때 두 가지에 기반했다.
첫째는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의 ‘구경구위(九經九緯, 가로세로 각 9개의 대로)’, ‘전조후시(前朝後市, 앞에는 조정, 뒤에는 시장)’, ‘좌조우사(左祖右社, 왼쪽에는 종묘, 오른쪽에는 사직)’의 예제에 기반해 가도(街道 거리)를 바둑판처럼 규획한 것이다. 즉 성 안에 종횡으로 각각 9개의 간선 도로가 있고, 궁성과 황성은 도성 남부에 치우쳐 위치하며, 시장은 황성 북부에 있고, 종묘와 사직은 궁성 동서 양측에 나누어 배치하며, 조정의 정전은 침궁의 남쪽에 두었다. 오늘날 북경 내성의 수많은 가도와 골목길은 여전히 원 대도의 거리 배치의 옛 흔적을 반영하고 있다.
둘째는 건설 과정에 《역경》의 음양팔괘(陰陽八卦), 천지상합(天地相合)의 설법을 결합한 것이다. 예컨대 황권이 지상(至上)이며 왕자(王者)는 반드시 천하의 정중(正中)에 거처해야 한다는 이념을 체현하기 위해, 유병충은 ‘중축(中軸) 배치, 좌우 대칭’이란 중요한 원칙을 채용했다. 즉 대도의 정중앙에 남북을 관통하는 8km에 달하는 중축선을 설정하고, 이 축선을 기준으로 삼아 북경의 궁전, 사원, 거리와 골목, 시장 등을 설치했다. 높고 우뚝하면서도 장엄한 사원과 사묘(寺廟), 좌우 대칭으로 넓고 평평한 도로, 전후로 기복이 있으면서 웅장하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운 궁전 배치가 모두 이 중축선을 둘러싸고 있다.
대도는 궁성(宮城), 황성(皇城), 외성(外城)의 세 부분으로 조성되었다. 대도 외성에는 도합 11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그중 동·서·남 3면은 모두 3문이었으나 오직 북면에만 2문이 있었으니, 이는 중국 전통 건축이 대칭 배치를 중시하는 것과 매우 달랐다. 원대 사람 장곡진일(長穀真逸)의 《농전여화(農田餘話)》에 의하면, 이는 마땅히 유병충이 중국 신화 인물인 나타(哪吒)의 삼두육비(三頭六臂)를 차용한 결과이다. 즉 남면의 3문은 삼두를 상징하고, 동서의 6문은 육비를 상징하며, 북면의 2문은 두 발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원 대도(大都)의 평면 배치(공유 영역)
대도의 각 성문의 명칭도 대부분 《역경》에서 근거했다. 예컨대 여정문(麗正門)은 이괘(離卦)의 “밝은 지혜를 거듭 밝혀 바른 도리에 입각하니, 마침내 온 세상이 선하게 교화되어 태평성대를 이룬다(重明以麗乎正, 乃化成天下)”에서 취했고, 문명문(文明門)은 건괘(乾元)의 “나타난 용이 밭에 있으니 천하가 문명하도다(見龍在田, 天下文明)”에서 취했으며, 안정문(安貞門)은 송괘(訟卦)의 “다시 천명으로 돌아와 마음을 바꾸어 편안히 바른 길을 고수한다면, 재앙이 없으리라(複即命, 渝安貞, 於是亦无眚也.)”에서 취했다.
금인(金人)의 실측을 통해 입증된 바에 의하면, 대도 황성은 성 전체 남부의 중앙 지역에 위치했다. 동벽은 지금의 남북하연 서측에, 서벽은 지금의 서황성에, 북벽은 지금의 지안문(地安門) 남쪽에, 남벽은 지금의 동·서화문(西華門) 대가(大街) 남쪽에 있었다.
궁성은 황성 동쪽에 치우쳐 있는데, 그 남문인 숭천문(崇天門)은 대략 지금의 고궁 태화전 위치에 있었고, 북문인 후재문(厚載門)은 지금의 경산공원 소년궁 앞에 있었으며 그 판축 흔적이 이미 발견되었다. 동서 두개의 담장은 대략 지금의 고궁 동서 양 담장(垣) 부근에 있었다.
궁성 서면(西面)은 만세산(萬歲山, 일명 만수산, 지금의 북해 경도)과 태액지(太液池, 지금의 북해와 중해)를 중심으로 하는 서원(西苑)이었다. 태액지 서면에는 별도로 규모가 비교적 큰 두 조의 궁전 건축이 있었으니, 남쪽에 기댄 것은 융복궁(隆福宮)이요 북쪽에 기댄 것은 흥성궁(興聖宮)이었다.
이외에 고고학적으로 증실된 바에 의하면, 대도 전성(全城)은 남북으로 약간 긴 장방형이며 주위가 약 28.6km에 달했다. 성벽은 전부 흙을 다져서 축성했는데, 바닥 너비가 24m에 달했고, 바닥 너비, 높이, 정상 너비의 비율은 각각 3:2:1이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대도 성벽에 대해 “성벽 바닥의 두께는 열 걸음이나 위로 갈수록 줄어들어 윗부분에서는 겨우 세 걸음 두께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현재 실측된 비율과 매우 가깝다.
대도 전성의 중축선은 명·청 북경성과 일치한다. 시추 과정에서 경산 북쪽에서 한 구간의 남북향 도로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너비가 28m에 달했으니, 분명 대도 중축선 상 큰 길의 일부분일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대도(大都)의 종고루(鐘鼓樓)가 중축선 상에 있지 않고 중축선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친 지금의 구고루대가(舊鼓樓大街)에 위치했다는 점이다. 이는 나중 명·청의 북경성과는 다른 점이다.
칭찬할 만한 것은 원 대도는 뛰어난 급배수 시스템과 완전한 군사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도시의 번영에 지극히 중요했다.
유병충이 총괄 기획한 외에, 아랍인 예헤디에르(也黑迭兒)가 신궁전의 설계를 책임졌다. 곽수경(郭守敬)은 도수감(都水監)을 담당해 대도에서 통주(通州)에 이르는 운하를 정비했고, 도성 근교 북서쪽의 각 천을 통혜하(通惠河) 상류의 수원으로 삼아 대도와 남부 중국과의 연계를 보장했다.
말하자면 원 대도는 전체적으로 “위대하도다 건원이여(至哉乾元)”란 원조(元朝)의 강건함과 초원 제국의 웅장한 기상을 체현했으며, 명·청 양조(兩朝)를 위해 도성의 기틀을 다져놓았다고 할 수 있다. 예전의 원 대도를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으나, 명·청이 남긴 자금성, 태묘, 천단 등의 건축을 통해 그 당시 원 대도의 웅장함을 생각해볼 수는 있다.
1273년, 대도 궁전이 완공되었다. 이듬해 정월 초하루 쿠빌라이는 정전(正殿)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았고 대도는 정식으로 카라코룸을 대체해 왕조의 정치 중심이 되었다. 1285년, 대도의 궁성 성벽, 태액지 서안의 태자부(융복궁隆福宮), 중서성, 추밀원, 어시대 등 관서 및 도성 성벽, 금수하(金水河), 종고루(鍾鼓樓), 대호국인왕사(大護國仁王寺), 대성수만안사(大聖壽萬安寺) 등 중요 건축이 속속 준공되었다. 같은 해, 쿠빌라이는 금 중도(中都) 고성에 살던 주민들을 새 도읍으로 이주시키라는 조서를 발표했다. 당시 몽골인, 한인(漢人) 및 외국인들은 모두 지정된 구역이 있어서 그곳에서 생활했다.
이후 10년간 40만~50만 명의 주민이 금나라 중도 고성(故城)으로부터 대도로 전입했다. 이 기간에 궁내 곳곳의 편전(便殿), 사직단(社稷壇), 통혜하(通惠河), 식량 창고 등 건축 공사도 기본적으로 완성되었다. 후일 원대(元代) 각 황제들이 비록 공묘(孔廟), 국자감(國子監), 교제단묘(郊祭壇廟 교외의 제단과 사당)와 불사(佛寺) 등 건축을 증축하긴 했으나, 도성의 총체적인 배치는 변동이 없었다.
이 시기 중국에 왔던 이탈리아의 탐험가 마르코 폴로는 원 대도를 일컬어 “호구가 번성하고”, “성내외에 호구가 아주 많고”, “주민의 수”, “온갖 화물의 수입”이 “세계 여러 도시 중에서 비교할 곳이 없다”고 찬탄했다.

《마르코 폴로 여행기(동방견문록)》 삽화: 마르코 폴로와 쿠빌라이 칸이 대도의 왕정(王廷)에 있는 모습. (공유 영역)
한제(漢制)를 모방해 제사를 성대하게 해
몽골은 원래 제사의 예가 단지 희생의 고기를 베고 마유(馬乳 말 젖)를 땅에 뿌리며 몽골 샤먼이 축원하는 글을 고하는 단순한 의례에 불과했다. 그러나 쿠빌라이 시기에 이르러 제사에 관한 전례가 크게 융성해졌고 한인(漢人)의 작법에 따라, 묘제(廟制)와 일체의 제사에 관한 전례를 완성했을 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조부모의 존호와 묘호를 추존했다.
1263년, 쿠빌라이는 조서를 내려 중도에 태묘(太廟)를 건립하게 했고, 이듬해 신주(神主 위패)를 태묘에 봉안했으며 최초에는 태묘를 7실제(七室制)로 정했다. 그 후 쿠빌라이는 평장정사 조벽(趙璧) 등 군신들과 상의해 최종적으로 제사를 8실로 설치했으니, 그중 1실은 증조부모인 칭기스칸의 부모 예수게이와 후엘룬을 모시고, 또 1실은 조부모인 칭기스칸과 보르테를 제사지내며, 다른 4실은 각각 칭기스칸의 네 아들과 그들의 황후를 제사지내고, 나머지 2실은 각각 구육과 뭉케 대칸 및 그들의 황후를 모셨다.
이전까지 역대 묘제는 대부분 7묘, 9묘의 제도를 썼으나 원대는 8묘제를 실시했다. 오르도스 칭기스칸 릉의 백팔실(白八室)은 형식상 바로 이 8묘제를 채용한 것이다.
1264년 가을 9월, 신주를 석실(祏室, 사당 안의 돌로 만든 감실)에 봉안했고 겨울 10월에 태묘가 완공되어 조상에 대한 의례가 태묘에서 거행되었으며, 쿠빌라이는 할아버지인 칭기스칸을 태조(太祖)로 추존했다. 이로부터 몽골 종실(宗室)이 조상을 제사하는 활동은 정식으로 중원 왕조에서 조상을 모시는 궤도로 진입했다.
1267년, 쿠빌라이는 승려들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불사(佛事)를 7일 밤낮 동안 행하게 하니, 이는 몽골 원조가 태묘에서 불사를 행한 시작이었다. 역대 교제와 종묘 의식 중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원조의 태묘 제사는 그래도 어느 정도 몽골 특색을 보존하고 있었으니, 예컨대 중원 왕조는 통상적으로 황제가 제사를 주관했으나 몽골 원조의 제사는 무축(巫祝 무당 축관)이 주지했고 제례 또한 부분적인 몽골 습속을 보존했다. 게다가 매 실은 서쪽을 존귀하게 여겨 동쪽을 그다음으로 삼았으니, 전통적으로 태조가 중간에 있고 좌소우목(左昭右穆)으로 배열하는 한제(漢制)의 순서를 따르지 않았다. 이 또한 금대 종묘 제도 중에서 채용되었던 서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하는 순서를 연용한 것이자, 동시에 몽골인들이 우측을 숭상하는 국례(國禮)의 일종의 표현이다.
1269년 쿠빌라이가 대도를 건설하라는 명을 내렸을 때 태묘를 건조하지 않고 계속 중도의 태묘를 사용했다. 1277년 8월에 이르러서야 쿠빌라이는 대도 제화문(齊化門, 지금의 조양문) 내 북쪽에 태묘를 건설하라는 명을 내렸고 1280년에 완공되니, 백관이 태조와 예종(睿宗) 두 분의 신주를 새 태묘에 안치하고 옛 태묘는 철거했다.
조상에 대한 제사 외에 중국 고대 제왕들의 중요한 제사로는 사직(社稷) 제사가 있었는데, 몽골 원조의 사직 세제(歲祭 해마다 지내는 제사)는 1270년(지원 7년)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쿠빌라이는 통상적으로 사신을 보내 사직에 제사를 지냈고 그 절차는 대부분 태묘의 조상 제사와 같았다.
원대의 선농(先農) 제사는 1272년 2월에 시작되었고 그 의식은 사직과 같았다. 1277년 2월, 쿠빌라이는 일찍이 대도 동쪽 교외에서 선농에게 친히 제사를 지냈다. 1278년 2월에 다시 선농에게 제사하고 적전(籍田)을 갈았다. 적전을 가는 것은 중국 고대 역대 제왕이 친히 논밭을 가는 예로서 이로써 농업을 중시함을 표시한 것이다.
이외에 원대에는 삼황(三皇)과 풍사(風師), 우사(雨師), 뇌사(雷師)에게 제사를 지냈다. 풍·우·뇌사의 제사는 1270년 12월부터 시작되었는데 대사농(大司農)이 입춘 후 축일(丑日)에 풍사에게 동북 교외에서 제사할 것을 청했고, 입하 후 신일(申日)에 뇌사·우사에게 서남 교외에서 제사할 것을 청했다. 이를 통해 하늘에 대한 경외(敬畏)를 표명한 것이다.
원대는 또한 악진해독(嶽鎮海瀆, 산천의 신)의 제사를 매우 중시했는데 이는 1261년에 시작되어 쿠빌라이가 사신을 보내 대신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것은 몽골인들이 원래 지녔던 샤머니즘 신앙 및 산천을 제사하는 풍속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명대(明代) 엽자기(葉子奇)의 《초목자(草木子)》 권3 하 〈잡제편(雜制篇)〉에서는, 원 조정은 산악과 하해(河海)에 오직 사신을 보내 지내게 했다고 했다. 오악(五嶽)·사해(四海)·오진(五鎭)·사독(四瀆)은 모두 19곳으로 오도(五道)로 나눴다. 즉 동악(東嶽), 동해(東海), 동진(東鎮), 북진(北鎭)을 동도(東道)로 삼고; 중악(中嶽), 회독(淮瀆), 제독(濟瀆), 북해(北海), 남악(南嶽), 남해(南海), 남진(南鎮)을 남도(南道)로 삼았으며; 북악(北嶽), 서악(西嶽), 후토(后土), 하독(河瀆), 중진(中鎮), 서해(西海), 서진(西鎮), 강독(江瀆)을 서도(西道)로 삼았다. 또 역마의 왕래가 멀다 하여 다시 오도로 고쳤으니, 매 도마다 사신 2인을 보내 집현원(集賢院)에서 한인 관원을 보낼 것을 주청하고 한림원(翰林院)에서 몽골 관원을 보낼 것을 주청해 새서(璽書, 옥새가 찍힌 문서)를 내어 역참을 주고 가게 하니 차등을 두어 정기적으로 제사 지내게 했다

1263년, 쿠빌라이가 조서를 내려 중도에 태묘를 세우게 하고, 이듬해 태묘에 신주를 받들어 안치했다. 개념도, 사진은 북경 태묘의 대전. (zhanyoun/위키백과)
공자 제사
일찍이 잠저(즉위 전 저택)에 있을 때 쿠빌라이는 일찍이 대유학자 장덕휘(張德輝)에게 공자에 관한 문제를 물은 적이 있었다. 예컨대 “공자가 돌아가신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그 성(性, 영혼)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하니, 장덕휘가 “성인은 천지와 더불어 종시(終始)를 함께하시니 가는 바가 없으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능히 성인의 도를 행하신다면 곧 성인이 되시는 것이니, 성(性)은 진실로 이 장막 안에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쿠빌라이가 또 “공묘(孔廟) 제사의 예의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장덕휘가 “공자는 만대(萬代)의 왕의 스승이시니 나라를 다스리는 군왕들이 모두 그분을 존경하여 공묘를 수선하고 제때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유학을 숭상하는 여부는 성인(聖人)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으나, 이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유학을 숭상하고 도를 중시하는 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쿠빌라이가 다 들은 후에 “앞으로 공자를 제사하는 대전(大典)은 폐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1252년, 장덕휘 등이 쿠빌라이를 알현하고 쿠빌라이를 유교의 대종사(大宗師)로 존숭하니 쿠빌라이가 흔연히 받아들였다.
쿠빌라이가 즉위한 후 상도(上都)와 공자의 고향(곡부)에 각각 선성묘(宣聖廟), 즉 공묘(孔廟)를 건립해 이를 통해 유가 사상을 선양했다. 성종(成宗) 대에 이르러 대도에 선성묘를 짓기 시작했으니, 예컨대 북경의 공묘는 시내 중심의 동북 모퉁이에 건립되어 옹화궁(雍和宮)과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그 거리 이름은 국자감가(國子監街) 또는 성현가(成賢街)라 불린다. 북경 공묘는 원·명·청 세 왕조가 공자를 제사지낸 곳으로 수많은 제왕들도 이곳에 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지위가 상당히 높아, 산동 곡부 공묘, 길림(吉林) 공묘, 남경 부자묘(夫子廟)와 더불어 ‘4대 공묘’라 불린다.
원조 조정에서 대규모로 공자에게 제사한 것은 1273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해 3월, 중서성에서 석전례(釋奠禮)를 거행할 것을 명하니 집사관들이 각기 그 공복을 입고 여러 유생들이 난대(襴帶)와 당건(唐巾)을 착용하고 예를 행하며 공자에게 절했다.
1282년, 원 조정에서 공자의 후예를 세우는 일을 의론했는데 당시 공씨 종가라 일컬어지는 곳은 오직 산동 곡부의 공씨 북종(北宗)과 절강 구주(衢州)의 공씨 남종(南宗)뿐이었다. 조정에서 조사한 결과 “공씨 자손 중 구주에 머무는 자가 곧 그 종자(宗子, 대종가)이다”라 했으니, 즉 구주에 사는 이가 대종가이므로 조정에서 공수(孔洙)를 입조하게 하여 그를 곡부로 돌아가 봉작을 이어받아 제사를 받들게 했다. 그러나 공수는 조상의 묘가 구주에 있어 차마 떠나지 못하겠다면 작위를 곡부에 있는 사촌동생인 공치(孔治)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구주에 머물며 선조를 봉사하고 능묘를 수호할 것을 청했다. 그는 또한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귀향할 것을 요구했다.
쿠빌라이가 그를 “영예를 어길지언정 부모를 어기지 않으니 진실로 성인의 후예로구나”라고 찬탄하며 그의 청을 허락하고, 공수를 승무랑(承務郎), 국자감 제주(祭酒) 겸 제거절동학교사(提舉浙東學校事)를 수여하고 그에게 능묘를 수호하라는 새서와 봉록을 내렸다. 나중에 공수는 봉훈대부(奉訓大夫), 유학제거(儒學提舉)에 임용되었다.
쿠빌라이로부터 시작하여 원조가 끝날 때까지 역대 황제들은 유가와 공자에 대해 모두 매우 추숭했다.

북경 공묘는 시 중심의 동북쪽 모퉁이에 세워졌으며, 옹화궁과 거리가 멀지 않다. 그것이 위치한 거리의 이름은 국자감가 또는 성현가라 불린다. 사진은 북경 공묘의 선사문(先師門) 모습. (공유 영역)
티베트 불교를 숭상하고 최초로 제사(帝師) 제도 만들어
몽골인들은 칭기스칸 때부터 종교에 대해 매우 포용적인 정책을 채택해 각종 종교의 존재와 신앙의 자유를 허락했다. 칭기스칸 당시 도가의 구처기(丘處機)와 진심으로 대화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해운선사(海雲禪師)도 만났다. 칭기스칸 정처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정처 소르칵타니는 기독교를 신봉했고, 그들의 네 아들 중 막내아들이 기독교와 친근했던 것을 제외하면 다른 세 아들 중 뭉케와 쿠빌라이는 불교에 더 치우쳤다.
쿠빌라이가 대칸 지위에 오른 후 1264년 중앙에 선정원[宣政院, 최초 이름은 총제원(總制院)]을 설립하여 전국 종교와 토번(吐蕃, 티베트) 사무를 관장하게 하고 국사(國師) 파스파(八思巴)가 이끌게 했으니, 이는 이전 중원 왕조에는 없었던 것이다.
파스파(1235~1280)는 본명이 로되 가이찬(羅卓堅贊)이며 ‘파스파’는 티베트어로 ‘성자’라는 뜻이다. 로되 가이찬이 어릴 때부터 백부 사캬 판디타(薩迦班智達)을 따라 사캬파의 일체 현밀교법(顯密教法)을 배웠는데, 7세 때 능히 “경전 수십만 언을 외우고 그 대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여 토번인들에게 ‘파스파’라 불렸다.
11세 때 파스파는 백부 사캬 판디타를 따라 양주(涼州)로 가 코단(闊端, 오구데이의 둘째 아들)을 만났고 이때부터 양주에 체류했다. 1251년 사캬 판디타가 원적한 후 종교 지식에 정통한 파스파가 사캬파의 새로운 영수가 되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17세였다.
1253년, 뭉케 칸이 막남 한지(漢地) 사무를 총괄하던 쿠빌라이에게 군사를 이끌고 남하해 대리국(大理國)을 공격하게 하니 몽골 대군이 토번 지역을 지나가야 했다. 8월, 쿠빌라이의 군사가 임조(臨洮, 지금의 감숙 임조현)에 도착해 양주에 사신을 보내 파스파에게 몽골군이 토번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협조하는 일을 와서 상의할 것을 청했다.
파스파가 임조에 온 후 쿠빌라이에게 “제 스승님 말씀에 티베트 법으로 티베트를 다스리면 큰 길이 하늘로 통하고 불호(佛號)를 높이 선양해 법력(法力)이 무변하리라 하셨습니다”라고 건의했다. 쿠빌라이는 파스파와의 대담 중에 “더불어 말하며 크게 기뻐하고 날로 친히 예우했다”고 한다.
이 해에 파스파는 군중에서 쿠빌라이와 차비(察必) 왕비를 위해 밀종(密宗) 희금강(喜金剛) 관정(灌頂) 의식을 거행했다. 25명의 신도들이 동행한 가운데 쿠빌라이와 차비 왕비는 길상희금강(吉祥喜金剛) 관정을 세 차례 받았고 파스파를 상사(上師)로 존중했다. 쌍방은 ‘시주와 복전(福田)’, 상사와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관정’은 불교 밀종에서 하는 일종의 의식이다.
이로부터 파스파는 쿠빌라이를 따랐다. 1255년, 쿠빌라이가 주관한 불도(佛道) 변론대회에서 그는 해박한 지식과 비할 바 없는 변재(辯才)로 쿠빌라이를 경탄하게 했다.
쿠빌라이가 1260년 몽골 대칸이 된 후 파스파는 국사(國師)로 봉해져 옥인(玉印)을 받았고 새로운 몽골 문자를 창건하라는 명을 받았다. 17세기 초 몽골어로 된 사서 《알탄칸전(阿勒坦汗傳)》에 의하면, “쿠빌라이 세첸칸은 세상에 이름이 높으니 이 성자(聖者)를 청해 와 후툭투(呼圖克圖 활불) 파스파 라마로 삼고 일체의 경주(經呪)의 음역을 고대 위구르 문자(畏兀兒文)로 하게 했다. 부처님에 대한 세 가지 신앙을 광범위하게 건립해 진력하여 종교를 널리 전해 발전시키고 전 세계가 널리 태평의 복을 누리게 하니 마치 옛날 전륜성왕처럼 사방에 이름을 날렸다”라고 했다.

파스파 문자로 된 몽골어 조서(공유 영역)
1263년, 파스파가 토번으로 돌아갈 때 떠나기 전에 보석과 책인(冊印)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총제원이 성립된 후 파스파는 총제원사(總制院使)를 겸임했다. 쿠빌라이는 또 토번의 물산 분포 상황에 근거해 행정 구역을 다시 나누고 13개 만호(萬戶)를 설치했으니, 각 만호는 군사와 민정(民政)을 겸해서 관리했고 이들 역시 모두 파스파의 관할에 속했다.
청장고원은 교통이 불편해 관리와 군사 및 상인의 왕래에 모두 매우 불편한 것을 고려해, 쿠빌라이는 티베트로 통하는 역참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파스파의 지지 하에 쿠빌라이는 청해에서 사캬(薩迦) 지역으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연로에 도합 27개의 대역참을 두어 교통을 보장했다.
1269년, 파스파는 티베트 문자의 자모를 차용해 1,000여 개의 몽골 신자인 ‘파스파 문자’를 만들었는데 한인(漢人)의 영향을 받아 세로쓰기를 채용했다. 알다시피 몽골인들은 원래 문자가 없었고 나중에 칭기스칸이 나이만부를 멸한 후 위구르인 타타통아(塔塔統阿)로 하여금 위구르 어로 몽골어를 쓰게 했으나, 사용 과정에 많은 문제가 발견되었다. 이에 쿠빌라이가 파스파로 하여금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게 만들어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공식 문자로 삼게 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조의 공식 문서는 일률적으로 파스파가 창제한 몽골 신자(新字)로 썼으나 민간에서는 유행하지 못했다. 때문에 원조가 멸망한 후 이 문자는 그 사용 가치를 잃었다.
1280년, 파스파가 원적하니 향년 46세였다. 쿠빌라이는 ‘대원제사(大元帝師)’라는 호를 내렸고 경성에 그를 위해 사리탑을 지어주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파스파가 어릴 때 일찍이 꿈에 자신이 80마디가 있는 지팡이 한 자루를 쥐고 있었는데 제46마디에 이르러 굽어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튿날 그가 사캬 판티타에게 말했을 때 사캬 판디타가 그에게 “이것은 너의 나이를 예시하는 것이니 46세 때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뜻밖에도 이 말이 참이 되었다.
파스파로부터 시작해 원조가 멸망할 때까지 역대 황제들은 모두 라마를 제사(帝師)로 삼았고, 새로 즉위하는 황제는 즉위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제사에게 계율을 받아야 했다. 쿠빌라이의 이런 행동은 후일 원조가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삼고 제사 제도를 설립하는 기초를 다져놓았다. 쿠빌라이가 티베트 불교에 이처럼 높은 지위를 부여하고 내지(內地)에서 대대적으로 제창함에 따라 전국적으로 신자가 급속히 증가했고 그의 재위 시기에 전국의 불사는 4만 2,000좌에 달했다. 원조 전체를 통틀어 제사로 책봉된 이는 모두 14인이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여전히 존중했으니, 예컨대 유럽에서 전래한 기독교 사제들에 대해서도 예로 대했다. 종교 신앙의 자유는 칭기스칸 때부터 시작하여 원조가 끝날 때까지 일찍이 변한 적이 없다.
참고자료:
《元史》
《新元史》
《忽必烈傳》
《忽必烈和他的世界帝國》
《忽必烈秘史》
《元史紀事本末》
원문위치: https://www.epochtimes.com/gb/21/6/9/n13010897.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