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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윈 감상평: 마음을 가라앉히는 두 시간

천객(天客)

【정견망】

편집자 주: ‘션윈관지(神韵觀止·션윈을 보고 더 이상 칭찬할 것이 없다)’에서의 ‘관지’는 《고문관지(古文觀止)》에서 취한 것으로, 그 어원은 《좌전(左傳)》에서 계찰(季札)이 주나라 음악을 관람하고 《소소(韶箾)》를 들은 뒤 감탄하며 남긴 말인 “관지의(觀止矣·더 이상 볼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구나!)”에서 유래했다. 션윈은 우주 대법인 ‘진·선·인(真·善·忍)’의 정신을 체현하고 있으며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션윈관지’ 코너를 개설한 것은 모두가 각자의 견해를 마음껏 펼치며 션윈을 관람한 후의 깨달음을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현대인들은 마음을 진정으로 두 시간 동안 가라앉혀 본 지가 아주 오래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휴대전화의 알림들이 이미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메일, 뉴스, 업무, 회의, 소셜 미디어까지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하나가 이어진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끝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고, 사무실을 나와도 정보는 여전히 사람을 따라다닌다.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훨씬 풍부한 지식을 가졌고, 그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기술과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평범한 사람이 하루 동안 접하는 정보는 어쩌면 고대인들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접할 수 있었던 총합을 이미 넘어섰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기이한 문제가 하나 나타났다. 우리는 아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지는데도, 가장 단순한 몇 가지 질문에는 답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번 생은 도대체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고대인들 역시 당연히 살아가야 했고, 공명(功名)과 이익(利祿)도 있었으며, 땔나무와 쌀·기름·소금 등 생계가 있었고, 글을 읽고 벼슬을 하고 장사를 하며 가정을 부양해야 했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많은 학문은 결국 흔히 하나의 공통된 질문으로 되돌아갔다. 바로 ‘사람은 마땅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였다.

학문을 할 때는 먼저 수신(修身)을 말하고, 벼슬을 할 때는 먼저 덕행을 말하며, 집안을 다스릴 때는 윤리를 말하고, 남을 대할 때는 신의(信義)를 말하며, 기술을 배울 때는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心正)을 말했다. 유교의 경전인 《대학(大學)》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하나로 연결했다. 지식과 사람 도리는 원래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사람이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결국에는 자신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했고, 능력이 클수록 그 능력을 지탱해 줄 덕행이 더욱 필요했다.

그래서 고대인의 학문은 비록 오늘날처럼 방대해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의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심은 바로 사람이었다.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할 것인가, 또 어떻게 사람 노릇에서 출발하여 수신하고 도를 밝힐(明道)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점차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지식은 점점 더 많아지고, 또 점점 더 세분화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20~30년이라는 시간을 오직 아주 작은 전문 분야 하나만을 연구하는 데 쓸 수 있다. 그는 지극히 우수한 과학자, 의사, 엔지니어, 변호사 또는 금융 전문가가 되어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는 손바닥 보듯 훤히 알면서도, 정작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억울함을 당했을 때 남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익 앞에서 무엇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가, 질병과 노화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또 자신의 짧은 인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아주 특이한 현대적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이 세상을 통제하는 능력은 점점 더 강해지는데, 정작 자신의 생명을 안정시키는 능력은 그에 따라 함께 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이 어쩌면 현대인들이 점점 더 바쁘면서도 동시에 점점 더 방황하게 되는 심층적인 원인일지도 모른다.

일단 ‘사람은 왜 사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면, 그 아래의 일들은 한없이 팽창하기 때문이다. 일은 원래 삶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전부가 되어버릴 수 있고, 재물은 원래 삶을 유지하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사람이 자신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버리며, 지식은 원래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사람이 점점 더 번잡한 정보 속에 빠져들게 만들 수 있다.

일 뒤에는 또 다른 일이 있고, 목표 뒤에는 또 다른 목표가 있으며, 재물 뒤에는 더 많은 재물이 있고, 정보 뒤에는 또 다른 정보가 있다. 이 모든 일 그 자체에는 종점이 없다. 만약 생명에 더 높은 방향이 없다면, 사람은 아주 쉽게 계속 바깥을 향해 걸어가게 되고, 마침내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된다. 아주 멀리 걸어왔는데 자신이 왜 출발했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그러므로 현대인의 문제는 단순히 바쁘다는 데에만 있지 않다.

바쁘다 못해 방향을 잃어버렸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사람의 생명이 원래 지니고 있던 질서를 잃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래 인생을 위해 봉사해야 할 것들이 점차 인생을 점유해 버렸고, 원래 수단에 불과했던 것들이 점차 목적이 되어버렸다. 사람의 마음은 일 속에 흩어져 있고, 명예와 이익 속에 흩어져 있으며, 정보 속에 흩어져 있고, 욕망과 끝없는 비교 속에 흩어져 있다.

그리고 세대와 세대를 거듭하며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갈 때, 빗나감도 서서히 습관이 된다. 결국에 가서 사람은 자신이 이미 빗나갔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진정으로 우려스러운 것은 어쩌면 사람이 일시적으로 길을 벗어난 것이 아니라, 너무 오래 걸어간 나머지 길을 벗어난 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버리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의 세상은 점점 더 커지는데, 생명의 시야는 점점 더 좁아진다

중국 전통문화는 정확히 이와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밖으로 치달리던 사람을 안으로 다시 데려온다.

유가는 가장 현실적인 인간관계와 일상생활에서 출발하여 수신(修身)을 말하고, 의(義)와 이(利)를 말하며, 예(禮)를 말하고, 그칠 줄 앎(知止)을 말하여 사람이 번잡한 인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도가는 청정무위(淸靜無為)와 반본귀진(返本歸真)을 말하여 속세가 생명의 유일한 방향이 아님을 알게 한다. 불가는 각오(覺悟), 인과(因果), 윤회(輪廻)를 말하여 생명이 단 한세상에 그치지 않으며 눈앞의 성패 득실 또한 생명의 전부가 아님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준다.

이렇게 한 층 한 층 펼쳐지면서 사람의 시선은 서서히 눈앞에서 멀어지게 된다.

오늘 하루에서 한평생으로 열리고, 한평생에서 세세생생으로 열리며, 개인에서 천지로 열리고, 인간 세상에서 생명의 고향과 귀환처로 열린다.

오늘 하루의 사소한 득실을 일생이라는 시간 속에 놓고 보면 어쩌면 그렇게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평생의 영욕을 더 오랜 생명의 역정에 놓고 보면 더 이상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개인의 비환(悲歡)을 천지와 생명의 근원 및 귀환처 속에 놓아보면,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척도 역시 그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전통문화가 사람에게 부여하는 생명의 종심(縱深, 깊이)이다.

반면에 현대 생활은 정확히 그 반대로 사람을 ‘현재’ 속에 압축시켜 버린다. 오늘의 일, 올해의 수입, 눈앞의 성공, 즉각적인 정보, 즉각적인 만족 등이다. 과학기술은 사람의 외부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시켜 주어, 우리는 수만 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순식간에 알 수 있고, 대양을 가로질러 일할 수 있으며, 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지식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람의 세상은 점점 더 커지는데, 생명의 시야는 오히려 점점 더 좁아진다. 밖을 향해서는 사람은 이미 극도로 멀리 걸어 나갔지만, 안을 향해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점점 더 알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전통문화는 우선 현대인에게 ‘지식’ 한 과목을 더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지식과 정보, 욕망에 포위된 사람에게 어쩌면 더 필요한 것은 먼저 멈춰 서는 것이다. 이미 저 멀리 밖으로 흩어져 버린 그 마음을 천천히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두 시간

이때, 션윈의 그 두 시간을 다시 바라보면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극장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휴대전화는 내려놓고, 일은 일시 정지되며, 회의는 사라지고, 뉴스는 잠시 멀어진다. 극장 안의 불빛이 서서히 어두워지면 밖에서 고속으로 돌아가던 그 세계는 문밖의 일로 남겨진다.

막이 오른다.

음악이 울려 퍼지고 무대 배경(천막)이 열린다. 산하, 궁궐, 의관, 예악, 신화와 역사, 이 모든 막이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현대 생활 속에서 이미 서서히 희미해져 갔던 것들—하늘을 공경하고 덕을 중히 여기며, 충의를 지키고 선악에는 보응이 있으며, 사람과 하늘, 사람과 신, 사람과 자기 생명 사이의 관계—이 순선순미(純善純美)한 예술을 통해 다시 사람의 시야로 되돌아온다.

어쩌면 어떤 관객은 극장에 들어올 때 단순히 공연 한 편을 보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시간 동안 그가 겪는 것은 단순히 두 시간의 예술 감상에 그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션윈은 이미 정보에 포위된 현대인에게 더 많은 어지러운 정보를 계속해서 주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바깥의 소리들을 잠시 가라앉히고, 끊임없이 밖으로 달려가던 그 마음이 되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거두어들이고, 다시 열어젖힌다. 거두어들이는 것은 바깥 세계에 흩어져 있던 마음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요, 열어젖히는 것은 현대 생활에 의해 압축되었던 생명의 시야를 다시 열어젖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가 다시 펼쳐지고, 천지가 다시 펼쳐지며, 신전문화(神傳文化)가 다시 펼쳐지고, 생명이 온 곳과 돌아갈 곳이 다시 사람의 시야로 들어오게 된다.

세계가 작아진 것이 아니다. 생명이 다시 커진 것이다. 어쩌면 바로 이 두 시간 동안, 사람은 문득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았던 질문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 바쁘게 사는 이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한것인가?’

제자리로 돌아감

그러므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고요함(靜)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復位)의 시작이다.

현대인의 불균형은 많은 경우 가진 것이 너무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들이 본래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을 차지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일, 재물, 정보가 너무 많고 욕망이 너무 강해서, 결국 생명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들이 오히려 구석으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소위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고, 지식을 쌓지 않으며, 재물을 멀리하고 현대 과학기술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니라, 만사만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일은 여전히 일일 뿐 생명의 전부가 아니며, 재물은 여전히 생활에 필요한 것일 뿐 생명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가 아니며, 지식은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도록 돕는 것일 뿐 우리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과연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준칙이 필요하다.

이 준칙이 바로 진·선·인(真·善·忍)이다.

사람이라는 이 차원에서 ‘진(真)’은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허황되지 않은 것이고, ‘선(善)’은 남을 선하게 대하고 이해하며 악으로 맞서지 않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인(忍)’은 모순과 득실, 고난 속에서 자신을 억제하고 선한 생각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진·선·인 세 글자의 내원은 그보다 훨씬 더 방대하며 몇마디 말로 개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 생활 속에서 끊이없이 이 준칙으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가늠해 보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이 준칙에서 벗어날 때, 그것은 또한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생명 상태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며, 다시 이 준칙에 따라 자신을 요구하는 것은 조금씩 안으로 되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오천 년의 전통문화는 사실 줄곧 사람이 이러한 사람 노릇의 준칙을 인식하고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 왔다. 유가는 세상에서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고, 도가는 사람에게 반본귀진할 수 있음을 알려주었으며, 불가는 각오와 인과 및 윤회를 말하여 생명이 이번 생에 그치지 않으며 눈앞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했다.

그리고 오늘날 션윈이 하고 있는 일은 어쩌면 너무 멀리 걸어 나간 사람이 먼저 멈춰 서서 흩어진 마음을 거두어들이고, 사람 노릇의 준칙을 다시 보게 하며, 생명의 방향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두 시간 동안, 바깥 세계는 잠시 고요해진다. 사람은 어쩌면 이 고요함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던져보지 않았던 질문들을 다시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인가?

왜 이곳에 왔는가?

이번 생은 또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은 단순히 바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왜 이 세상에 왔으며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다시 떠올리기 위함이다.

 

원문위치: https://www.zhengjian.org/node/3038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