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객(長袖客)
【정견망】
하늘을 우러러볼 때, 구름 한 송이가 먼 곳에서 천천히 흘러오고 있다.
그것은 바위처럼 고정된 윤곽도 없고, 나무처럼 분명한 가지와 줄기도 없다. 방금 전까지는 솟아오른 설산(雪山) 같았으나, 눈 깜짝사이에 가장자리가 풀어지고, 한 조각은 바람에 이끌려 먼 곳으로 가며, 또 다른 한 조각은 부지불식간에 생성된다. 햇빛이 두께가 다른 구름 층 사이를 통과하며 그것을 때로는 희게, 때로는 회색빛 어둡게 만들고, 또 때로는 저물녘의 금빛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사람들은 종종 ‘운권운수(雲卷雲舒, 구름이 말리고 펴짐)’로 그 자유자재함을 형용한다. 그러나 구름이 정말 마음대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구름 한 송이의 형성은 과학의 눈으로 볼 때 많은 조건들의 공동 작용이 필요하다. 온도가 변하면 응결되거나 흩어지고, 기류가 바뀌면 펼쳐지거나 이동하며, 물방울이 일정 무게에 도달하면 비가 되어 대지로 떨어진다. 그것은 고정된 형태는 없지만 시종일관 따를 수 있는 법칙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구름이 하는 첫 번째 말일 것이다. 즉, 자유자재함이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며 변화가 무질서함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천지간의 진정한 자유는 일찍부터 언제나 더 큰 질서 속에서 운행되고 있다.
구름의 변화는 사람에게 천지의 질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옛사람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인생에서 진퇴(進退)의 도리를 읽어내게 했다.
당대 시인 왕유(王維)는 말년에 종남산(終南山)에 은거하며 천고의 명구를 남겼다.
“물길이 다한 곳에 이르러,
앉아서 구름이 일어나는 때를 바라보네”
行到水窮處 坐看雲起時
시냇물을 따라 걷다가 물줄기가 사라지는 곳에 이르면 발아래는 이미 길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왕유는 조급하게 출구를 찾지 않았고 ‘물이 끝났다(水窮)’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앉아 하늘의 구름이 천천히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 두 구절의 시가 어떻게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일까? 아마 그것이 사람들이 자주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변화를 말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상의 물은 비록 끝에 다다랐을지라도 어쩌면 햇빛 아래서 솟아올라 구름으로 화(化)해 하늘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눈으로 보는 것은 ‘물끝’이지만, 천지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구름이 일어나는 ‘운기(雲起)’이다.
“行到水窮處,坐看雲起時。”
눈앞의 끝은 천지가 안배한 끝이 아닐 수도 있으며, 발아래가 잠시 길을 잃은 것 같아도 하늘 위에서는 어쩌면 또 다른 길이 펼쳐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구름과 비는 같은 요람에서 왔다. 그것들은 원래 모두 천지간의 물이다. 물이 강·호수·바다에서 하늘로 올라가 구름으로 변하고, 구름 속의 물방울이 점차 응결되어 다시 비와 눈이 되어 대지로 돌아온다. 구름은 하늘로 올라간 물이고, 비는 다시 대지로 돌아온 구름이다. 수궁(水窮)과 운기(雲起), 구름의 모임과 비의 내림은 서로 다른 풍경인 듯하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생명의 순환 속 서로 다른 조각일 뿐이다.
구름은 사람에게 변화를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색채도 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푸른 하늘에 흰 구름(藍天白雲)이라고 말하며 마치 하늘에는 푸른색과 흰색 두 가지 색만 있는 듯이 여긴다. 사실 푸른 하늘에 결코 한 가지 푸른색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 아침의 하늘은 맑고 투명하며, 한낮의 푸른빛은 높고 밝으며, 비 갠 뒤의 청색은 물기로 씻겨진 온화함을 지니고, 황혼이 깃들 무렵이면 다시 점차 깊은 푸른색과 청자색으로 바뀐다. 구름 역시 흰색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은백색, 회청색, 금황색, 선홍색일 수도 있고, 낙조 속에서 온 하늘의 노을로 타오를 수도 있다.
하늘은 어쩌면 창세주께서 인간 세상 위에 펼쳐놓으신 첫 번째 그림일지도 모른다. 그것에는 화폭의 틀도 없고 고정된 형모도 없다. 빛이 그분의 붓이고, 구름이 그분의 먹이며, 바람이 겹겹의 색채를 밀고 나간다. 하루 사이에 하늘의 막은 수없이 변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그림은 단 하나도 없다.
중국 고인(古人)은 이러한 색채들을 우러러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늘에서 본 조화(造化)를 인간 세상으로 가져왔다.
후세의 천청자(天青瓷 푸른 하늘 색 자기)에 관한 전설 속에는 한 구절의 말이 전해 내려온다.
“비 갠 뒤 푸른 하늘 구름이 깨진 곳, 이와 같은 색을 만들어오라(雨過天青雲破處 這般顏色做將來).”
이 말은 초기에는 오대 후주(後周)의 세종 시영(柴榮)의 것으로 귀속되었다가 나중에는 송 휘종 및 여요(汝窯)와 연결되기도 했다. 전설의 귀속은 다를지라도 그 속의 지향은 일치한다. 장인이 구워내고자 한 것은 사람이 억지로 상상해 낸 어떤 색이 아니라, 비 갠 뒤 구름 층이 갈라질 때 하늘에서 드러나는 그 한 줄기의 맑고 투명함이었다.
진흙이 물과 불을 거쳐 마침내 하늘의 색을 도자기 위에 남겼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은 원래 하늘에서 빌려온 것이었다.
당대(唐代)의 이고(李翱)가 일찍이 약산(藥山) 유엄(惟儼) 선사에게 도를 물었다. 선사가 손으로 위를 가리키고 아래를 가리키며 그가 이해했는지 물었다. 이고가 이해하지 못하자 선사가 말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네.(雲在天, 水在瓶)”
이고는 이로 인해 흔연히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내가 도를 물으러 와서 다른 말은 없고,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네(我來問道無餘說,雲在青天水在瓶)”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물병에 있네”는 언뜻 눈앞의 가장 평범한 광경인 듯하지만 그 속에는 생명 경계(境界)의 다름이 감춰져 있다. 똑같은 물이라도 병속에 들어가면 병의 벽에 제약을 받아 오로지 그릇의 모양에 따라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된 후에는 그 좁은 공간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고 높고 아득한 천우(天宇) 속에서 펼쳐질 수 있다.
사람이 티끌세상(塵世)에 와서 육신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물이 병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겠는가? 신체, 신분, 명리(名利)와 감정이 점차 생명 주변에 유·무형의 테두리를 구성한다. 사람이 그 속에서 살아간 지 오래되면 병속의 천지를 전부로 여기기 쉽고, 병 밖에는 더 광대한 하늘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수련이란 생명이 끊임없이 자신을 정화하고 집착을 내려놓으며 경계를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그 수많은 생명을 속박하던 것들이 층층이 내려놓아질 때, 사람은 또한 눈앞의 국소를 초월하여 다시 더 높은 곳을 향해 솟아오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네”가 드러내는 것은 만물이 저마다 제자리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이 승화하고 회귀하는 길도 포함하고 있다. 즉, 물이 병 속에서 솟아올라 구름이 될 수 있듯이 사람 역시 수련을 통해 티끌세상의 속박을 초월하여 생명 본래의 높은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왕유는 구름 속에서 진퇴를 보았고, 선자(禪者)는 운수(雲水) 속에서 대도를 지시했으며, 도공(瓷工)은 구름이 갈라진 틈에서 천청색을 가져왔다. 똑같은 구름 한 조각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 다른 말을 건넨다. 어떤 이는 이로써 홀가분함[豁達]을 얻고, 어떤 이는 이로써 천도를 깨닫고, 어떤 이는 우러러봄 속에서 얻은 것을 전세의 기물(器物)로 화하게 한다. 중국 문화 속의 시의(詩意)와 지혜는 많은 부분이 바로 이렇게 천지간에서 얻어진 것이다.
하늘은 왜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가? 구름은 왜 늘 사람으로 하여금 부지불식간에 우러러보게 만드는가? 아마 그 속에는 본래 창세주의 고심(苦心)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그분께서는 하늘을 저토록 높고 아득하게 만드시고 구름을 온갖 색채로 물들이셨으며, 햇빛이 끊임없이 구름 층을 뚫고 비치게 하셨다. 마치 무언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일깨워주는 듯하다. 발아래만 보지 말고, 눈앞의 득실을 생명의 전부로 여기지 말라고.
사람이 고개를 숙일 때는 도로의 험준함, 세속의 번잡함, 그리고 명리와 정(情) 속의 득실과 얽매임을 보게 되지만, 고개를 들어 올릴 때는 눈앞이 문득 확 트이게 된다. 천지는 이토록 광대하고 흰 구름은 유유히 오가며 햇빛은 겹겹의 구름을 넘어 여전히 내리비치고 있다. 사람은 이 순간에 비로소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래 이토록 보잘것없으며, 한때 내려놓지 못한다고 여겼던 그 일들도 천지 사이에 놓아두면 구름 한 조각의 그림자에 불과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것을.
여기서의 ‘보잘것없음[渺小]’은 사람이 스스로를 가볍게 여기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척도를 다시 명확히 알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의 신체는 인간 세상에서 아주 작고, 사람이 다투고 집착하는 일들은 더욱 작고 미미하다. 그러나 생명은 창궁(蒼穹)을 우러러보고 천의(天意)를 읽어낼 수 있으며, 이로써 자신의 온 곳을 떠올릴 수 있다.
구름 한 송이가 지평선에서 피어오르더니 푸른 하늘 속에서 천천히 흩어진다. 그것은 말을 남기지 않았지만 마치 해야 할 말을 이미 하늘에 적어 놓은 것만 같다.
아마도 창세주께서 구름으로 하여금 드높은 하늘 위에서 거듭 모이고 흩어지게 하시고, 햇빛으로 하여금 구름 층을 거듭 뚫고 지나게 하시는 것은 바로 티끌세상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올리기를——눈앞의 명예와 이익, 사랑과 증오를 넘어, 저 한 줄기 하늘의 빛을 따라, 스스로가 왔던 길을 다시 알아차리기를 기다리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