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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애심법: 부호제천(婦好祭天)

글/ 석방행

【정견망】


글자가 새겨진 갑골(甲骨)

하남 안양(安陽)의 은허(殷墟)를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은허의 발견이야말로 중국 고고학계에서 20세기 가장 중요한 고고학 발견임을 알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갑골문으로 인해 상(商)왕조의 존재가 확실히 인정받게 되었고 《사기(史記)》의 주장이 확실한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고고학계가 발굴​​한 갑골문 중에서 전문가들은 다년간의 해독 끝에 마침내 이들 갑골문은 모두 국가를 다스리는 데 관한 문헌자료가 아니라 상 왕조가 상천(上天)에 제사를 지낸 기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것은 전문가들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그들은 상 왕조가 이 정도로 제사를 중시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수많은 갑골문 중 하나의 이름 즉 부호(婦好)가 전문가의 관심을 끌었다. 이 이름은 국가 차원의 제사를 책임진 동시에 군대를 이끌고 강인(羌人)을 정벌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 당시 국왕인 무정(武丁)도 그녀를 매우 아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녀가 아이를 몇 시에 출산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도 점을 쳤다.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 이 ‘부호’라는 두 글자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이 인명인지, 관명인지, 아니면 어떤 종류의 이름인지, 전문가들도 한동안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당황했다. 나중에 부근에서 상 왕조의 큰 무덤이 하나 발견되었고 그 안에 있는 옥과 청동기에도 모두 ‘부호’라는 두 글자가 있었다. 당시 상조(商朝)에서 이런 옥기(玉器)는 왕후(王后)급이어야만 사용할 수 있었고 일부 병기(兵器)의 도안은 원수(元帥)급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이래서 ‘부호’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인명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세 가지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무정의 왕후이자 국가 최고 사령관의 위엄을 가진 여장군이자 대제사장이었다.

고고학의 발전은 우리에게 예전 역사의 한 단편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 결점은 당시의 실제 장면을 완전히 복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풍몽룡(馮夢龍) 소설의 어느 이야기(성세항언(醒世恒言) 33권 ‘15관의 농담이 우연히 불러온 재앙’을 보라.)와 같다. 그 안에 우연한 요소들이 많이 있지만, 지하에서 발굴해낸 것과 흩어져있는 문헌 기록에만 따르면 그렇게 모은 사실과 진정한 진상(眞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거나 심지어 진상이 왜곡되었다.

[역주: 풍몽룡 소설 ‘15관의 농담이 우연히 불러온 재앙(十五贯戏言成巧祸)’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임안부(臨安府)의 상인 유귀(劉貴)는 아내 왕(王)씨와 첩 진이저(陳二姐)가 있었다. 어느 날 아내와 함께 생일 축하차 장인 집에 갔다. 장인은 그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15관을 장사 밑천으로 주었다. 아내는 친정에 머물러 있고 유귀가 먼저 집에 돌아가던 도중 친구를 만나 술에 흠뻑 취해 집에 돌아갔다. 첩인 진이저가 돈을 보고는 어디서 났는지 묻자 유귀는 술김에 첩을 판 돈이라고 농담을 했다. 이에 분노한 그녀는 이튿날 부모에게 알릴 생각에 이웃집에 머물면서 나중에 따져보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이날 밤 유씨 집에 도적이 들어와 돈을 훔치려다 유귀를 죽이고는 달아났다. 첩 진 씨는 날이 새자마자 길을 나섰다가 우연히 최녕(崔寧)이란 총각을 만나 같이 달아나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관아에 살인사건을 알리자 두 사람이 붙잡혀왔고 최녕은 여자 때문에 남편을 살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에 처해진다. 나중에 부인 왕 씨는 정산대왕(靜山大王)이란 강도에게 잡혀가 억지로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정산대왕이 남편인 유귀를 죽인 원흉임을 발견한 왕씨가 관아에 고발했고 마침내 억울하게 죽은 최녕의 누명이 벗겨진다.]

또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 고대인을 가늠할 때 현대인의 심리와 관념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미 사상적으로 아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당시의 역사 진상을 복원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여기서 필자는 고고학을 철저히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의 제한성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번 기회를 이용해 ‘부호’에 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부 경력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실 하(夏)왕조 때에도 줄곧 부호처럼 왕후, 사령관, 대제사장을 삼위일체로 합친 부호와 같은 여장군이 존재했었다. 다만 현재 하 왕조의 역사를 사람들에게 너무 많이 보여줄 수 없고 기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상 왕조의 부호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천계(天界)에서는 각기 다른 신(神)마다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있고 각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자’라는 이런 성별을 말하자면 여불(女佛), 여호법(女護法), 시녀, 일반적인 여신(女神), 선녀 등의 종류가 있다. 그렇다면 천계를 수호하는 아주 높은 층차의 여신을 말하자면 그녀의 능력과 지혜는 상당히 큰 것이다. 그녀는 단지 그 한 층 경계(境界)를 다스릴 지혜를 구비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층의 경계를 지켜낼 수 있는 법력(法力)도 가지고 있는데, 또한 비할 바 없이 위엄 있고 신성하다.

이곳이 비록 지극히 높은 경계이긴 하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역시 서서히 변이(變異)가 나타났다. 사악(邪惡)은 무리를 지어 부대를 만들어 이곳을 침략하는 대신 작은 조각으로 쪼개져 천천히 심지어 아주 감지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이곳의 모든 것을 패괴(敗壞)되게 했다. 그녀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 모든 것은 그녀들의 힘만으로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이에 그녀는 자신의 경계 속에 있는 신들을 이끌고 함께 보다 높은 층차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가장 훌륭하고 가장 경건한 방법으로 상천에 예를 올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더 높은 층차에서 정말로 몇몇 신선(神仙)들이 내려왔고 그녀가 있는 곳에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들이 신통을 움직여 약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이렇게 뭇신(衆神)들이 모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망연해 있을 때 창세주께서 더 높은 곳에서 이곳으로 오셨다. 이런 상황을 보신 창세주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이 이런 일들을 해결하고 싶어도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모든 것은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당신들이 만약 나를 따라 내려가고 싶다면 때가 되면 내가 인간세상에서 전반 홍궁천체(洪穹天體)를 바로 잡을 것이다. 당신들은 그때 나의 제자가 되어 내가 직접 전하는 법을 얻을 수 있다. 그 때 당신들이 각자(各自)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한다면 당신들 각자가 소재한 층차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창세주를 기꺼이 따라 내려가겠노라고 했다.

인간세계로 내려가기 전에, 창세주께서는 각기 다른 신들의 서로 다른 특성과 당시 나타난 것에 근거해 부호를 무정의 왕후이자 군사와 제사의 대권(大權)을 관장하는 역할을 맡게 하셨다.

사실 상왕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처럼 전혀 그렇게 낙후하지 않았다.

[이 점은 부호의 묘에서도 알 수 있다. 가령 조개껍질은 해안 지역 또는 동남아시아와 분명한 연관성이 있고, 출토된 대부분의 옥기(玉器)는 신강(新疆)에서 왔고 일부는 요녕 수암(岫岩) 등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수많은 신선들이 인간 세상에 출현해 사람의 표현으로 사람들이 개화하고 문명화 되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점을 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정상적인 상태(常態)이며 현대인이 이해하는 미신(迷信)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 시기에 사람과 신 사이에 직접적인 소통방식인 점복(占卜)과 제사(祭祀)를 남겨놓았다. 이때 옥(玉) ​​역시 하늘과 땅과 소통하는 수단 또는 매개체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의 관념 속에서 청동기(靑銅器)는 사람들이 생활에 사용하도록 한 상천의 은혜였고, 옥은 사람들의 심령(心靈)을 순결하게 한 후 가장 좋은 심태로 상천과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점복과 제사는 천지와 소통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의식이었다.

부호는 당시 뛰어난 미모를 지녔는데, 이런 미모는 유약한 모습이 아니라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또 전투에서 작전을 짜는 지혜도 갖추고 있었는데, 사실 그녀는 일반적인 생명이 갖지 못한 신통도 지니고 있었다.

많은 현대인들은 고대 냉병기(冷兵器 역주: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 재래식 무기) 시대에 외적을 마주해 여장군이 어떻게 적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할 것이다. 사실, 그런 외부 종족은 강인(羌人)과 귀방(鬼方), 심지어 중앙 아시아에서 온 몇몇 부족들을 포함한다. 당시 그들은 일부 아주 원시적인 것들(종교의 초기 단계에 처해 있었다)을 믿었다. 그런 것을 어떻게 말할까,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지니고 있지 않은 일부 힘들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일부 저층의 신 및 반드시 ​​좋진 않지만 약간의 능력을 지닌 다른 생명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역시 상천(上天)이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준 생활하고 발전하는 방식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중 아주 많은 것들은 나쁜 생명이 준 것인데, 다시 말해 그곳 사람들도 일부 소능소술(小能小術)이 있었다. 헌원황제가 치우(蚩尤)와의 대전(大戰) 당시 직면했던 방해의 대부분은 실제로 이런 방면에서 나온 것들이다. 또 강자아가 주나라 무왕을 도와 주왕(紂王)을 물리칠 때 직면했던 저해력에도 이런 방면의 것이 있었다.

부호가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전에 점복이나 제사를 지낸 것은, 사실 보다 높은 생명의 지시를 구한 것이자 여러 방면 정신(正神)들의 도움을 바란 것이다.

상 왕조는 창세주께서 신전문화(神傳文化)를 다지기 위해 안배하신 매우 중요한 조대(朝代)였다. 왜냐하면 상조(商朝)의 문화적 다짐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주례(周禮)가 존재할 수 있었고 또 노자와 공자가 그 이념을 펼쳐낼 수 있었으며(그래야 사람들이 비로소 선현이 하신 말씀의 의미와 내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진정한 황조(皇朝)의 시작인 진(秦)이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역사 발전이란 일련의 고리 중에서 (상조는) 절대적으로 없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호가 정벌전쟁을 하는 과정에서도 수많은 정신(正神)들이 도와주었고, 동시에 왕인 무정은 과거에 그녀와 아주 큰 인연이 있었다. 정벌 전쟁에 능했던 또 다른 여장군 한명과 무정의 다른 60명의 아내를 포함해, 그들은 모두 창세주가 부여한 상왕조의 문화를 확대하기 위해 했던 것이다.

여기까지 말한 김에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무정의 60명 아내는 후대의 군왕(君王)이 3궁(宮) 6원(院)에 72비빈(妃嬪) 거느린 것과는 큰 차이가 난다. 차이점은 이 무정의 많은 아내들은 모두 자기 부락이나 부족의 수령 또는 수령의 딸이며, 일부는 심지어 봉지(封地)를 지니고 있었다. (부호도 있었다) 그녀들은 하루 종일 가마를 타고 왕과 동행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당시 국가 정권은 기본적으로 부락연맹제(部落聯盟制)였으며 진(秦)나라 이후 황제가 천하를 통일했던 것과는 달랐다. 부락연맹제도 하조(夏朝)와 그 이전에는 비교적 느슨했지만 상조(商朝) 이후, 특히 반경(盤庚)이 은(殷 역주: 이때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로도 부른다)으로 천도한 후 부락연맹제가 더욱 긴밀해졌다. 이 제도를 유지하는 사슬이 바로 혼인이었다. 때문에 무정은 60여 명의 아내가 있었던 것이다. 어떤 제도를 이용해 창세주께서 개창하신 신전문화를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신 역시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탐색하고 완벽히 한 것이다.

한번은 제사 중에 부호가 보다 높은 신(그녀는 평소 일반적인 층차의 신을 볼 수 있었다)을 보았다. 그 신이 말했다.

”사실, 도처에 다 창세주께서 육성한 만든 생명이 있다. 정벌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국가의 안정을 위한 것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모두 최후에 인연을 맺기 위한 것이다. 너는 군대를 이끌고 반드시 신(神)의 상태를 보여주어 다른 민족 부락의 사람들이 진정으로 당신들을 인정하고 상조(商朝)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몇 천 년 후에 창세주께서 인간세상에서 대법을 널리 전하실 기초를 다져야 한다.

후세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이 예전에는 상천을 매우 경외(敬畏)했기 때문에 하늘의 보우를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이 상조(商朝)의 문화를 너무 일찍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명: 너무 일찍 인식하면 중공이 무신론으로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전통신앙을 파괴할 때 사람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이 제아무리 무신론을 사용해 전통문화를 파괴할지라도 그것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조상을 공경하고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아버지, 할아버지, 내 선조 등등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백성들에게 어떤 가치 있는 것들을 남겨놓았는지 하는 것이다. 상 왕조의 실물이 세상에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상천(上天)과 신명(神明)을 몹시 경외했음을 알게 되었다.) 문자를 포함한 이곳의 문명 성과는 아주 오랫동안 봉폐될 것이며, 19 세기 말이나 20세기에 이르러 상 왕조의 신에 대한 존경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펼쳐 보여줄 것이다.

이곳에 존재하는 문자(즉, 우리가 ‘갑골문’이라 부르는 것)는 가장 오래된 문자가 아니다. 이런 글자는 하 왕조 중기부터 점차적으로 형성되어 상 왕조까지 이어진 것이다. 원래 헌원 황제가 창힐에게 문자를 만들게 했는데 그가 만든 글자체는 이런 형상이 아니었다. 비록 붓으로 쓰는 성질은 있었지만 이런 형상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가 《천애심법: 평당신서(平塘神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매우 드문 경우가 있긴 하다.

왜냐하면 창힐은 반인반신(半人半神)의 상태였기 때문인데, 사실 사람들은 창힐이 문자를 창조했다고 하지만, 이는 사람들의 말이다. 사실 창힐은 천상의 일부 문자를 인간세상에 가져와서 참조했는데, 인간세상의 구체적인 상황에 근거하고 또 다른 사람이나 신의 의견을 결합해 일부 문자를 창조했던 것이다. 따라서 갑골문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나중에 하 왕조 초기 문자가 발견되고 나면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다. 신전문명(神傳文明)의 내포에는 당연히 문자를 포함한다. 문자 역시 신이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만들어준 것이다.”

이런 신의 말씀을 들은 후 부호는 호기심이 생겨서 물었다.

“그럼 저는 언제쯤이면 창세주를 뵐 수 있습니까?”

그 신이 말했다.

“그냥 인연을 따라야 한다.”

말을 마친 후 이 신은 사라졌다.

나중에 부호와 그녀의 일행은 태행산(太行山)에 일을 보러 갔고, 어느 산 앞에서 쉬는 동안 한 위대한 신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이 분이 분명 창세주(創世主)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무릎을 꿇고 창세주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다.

창세주께서 자비롭게 말씀하셨다.

“당신은 애초 당신들 그 층의 천체(天體)우주(宇宙)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애초 당신에겐 매우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금생에서 여러 가지 신분을 부여한 것이다. 당신은 또한 금생에서 이 여러 가지 신분을 아주 잘 연기했다. 장래에 내가 인간세상에서 대법을 널리 전하기 시작한 후 당신 역시 당신의 책임을 감당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해야 할 모든 일을 반드시 잘해야 한다. 당신이 내려와 윤회한 만장한 역사시기를 헛되이 만들지 말아야 한다.”

부호가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께선 언제부터 대법을 전하실 건가요?”

창세주께서 말씀하셨다.

“상조(商朝)의 문자와 당신의 이름이 인간 세상에 다시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은 반드시 인간 세상에서 철저히 걸어 나와야 한다. 속세에 미련을 남겨서는 안 된다! 속세의 모든 일은 헛된 환상이며 법연(法緣 법의 인연)만이 비로소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창세주께서는 이렇게 설명을 마치신 후 떠나셨다.

얼마 후 부호는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원인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 일생의 역사적 책임을 완수하고 떠난 것이다. 후인들에게 부부는 비록 은혜하고 사랑할지라도 오래가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남겨주어, 예쁜 아내를 탐하는 미련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간 세상은 제아무리 좋아도 오래 지속되기도 힘들고 진정하게 뜻대로 하기도 어렵다. 오직 수행(修行)해서 정과(正果)를 얻어야만 비로소 윤회의 고통에 들어가지 않고 무상한 경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1928년, 중앙 역사 및 언어 연구소에서 대표단을 파견해 은허 유적에 대해 최초의 과학적인 고고학 발굴을 했다. 1976년 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가 부호의 무덤을 발견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무덤에서 무려 1928건의 부장품이 발굴되었다. 그중 옥기가 가장 많아서 755개나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 상대(商代) 단일 무덤에서 출토된 옥기 중 수량과 종류가 가장 많고 가장 풍부하며 가장 정교하게 제작된 것이다. 또 이들 옥기 중 상당수는 용봉(龍鳳)의 문양이 새겨져 있어 중화민족이 용과 봉황에 대한 신봉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청동기는 468개가 발굴되었다. 그런데 1928(역주: 1928년과 1928개의 유물)이란 두 숫자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상 왕조의 일은 아주 많은 다양한 요소들이 관련되기 때문에 아직은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여기서 2개의 1928을 말해보자. 만약 청나라 말기인 1899년 왕의영(王懿榮국 자감 좨주를 역임한 금석학자)이 일찍부터 한약을 많이 복용했기 때문에 갑골문을 발견했다면, 이때 글자가 새겨진 ‘용골(龍骨)’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탕약으로 갈아 마셨을 것이다. 1년 후 8국 연합군이 북경에 진군했다.

왕의영(당시 수도를 지키던 경사단련京師團練 대신이었다)이 군대를 이끌고 저항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자 자살했다. 한편 1898년 스웨덴 사람 헤딩이 잃어버린 삽을 찾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가 누란(樓蘭)고성을 발견했다 또 1901년 돈황(敦煌)의 왕(王) 도사는 불교 경전을 보관한 장경동(藏經洞)을 발견했다.

이 두 곳이 발견된 후 중국 문물이 외국인들에 의해 사상 유례 없는 약탈을 당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돈황에 관한 글을 쓸 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이 세 가지 발견(역주: 누란고성, 돈황 장경동, 갑골문의 발견)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견된 시간과 문물이 재난을 당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오늘날 부호의 무덤이 1976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자 사람들은 상조(商朝) 사람들이 진심으로 상천을 경외했음을 보다 심각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동시에 당시의 천상(天象)에 부합한 기공 열풍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사람들은 막 문화대혁명을 겪어 사람들의 신앙은 여전히 진공상태에 처해 있었지만 신과 상천 및 전통문화에 대한 아쉬움이 정치운동 때문에 사라지진 않았다.

《악비전(岳飛傳)》, 《양가장(楊家將)》과 같은 전통소설의 목소리가 방송을 통해 거리와 골목 곳곳에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이런 이야기가 방송될 때마다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고 들으면서 내심에 온축되어 있던 전통 문화가 자신도 모르게 일깨워졌다.

기공과 전통 문화, 국내외 고고학계(중국에서는 삼성퇴(三星堆)와 은허 유적의 발견 등; 외국 고고학계에서 발견한 수많은 사전 문명의 단서와 유적 등등)가 길을 닦아주자 파룬따파(法輪大法)가 1992년 중국 동북 장춘에서 리훙쯔(李洪志) 대사에 의해 전해져 나왔다.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신주(神州) 안팎을 진동시켰고 인연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걸어 들어왔다.

부호 역시 오늘날 소원대로 대법제자가 되었고 금생에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이렇다.

중생을 위해 속세로 내려와
신분은 사제와 전신(戰神)을 겸했네.
국모로 천하에 위엄을 떨치더니
예전에 법의 인연 있어 수련인이 되었구나!

爲了眾生下凡塵
身兼祭司扮戰神
母儀天下威嚴在
法緣在先修真人

 

원문위치: http://www.zhengjian.org/node/262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