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학의 가장 큰 결점은 실증과학을 추구하는 까닭에 육안으로 볼 수 있거나 기계로 관측 가능한 “병소(病所)”에만 주의를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국한(局限)되어있는 의학이 더욱 세분화되어 질병의 진정한 기전과는 더욱 더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아주 쉽고 간단한 사실을 잊는 경향이 있는데 모든 병은 질병의 종류나 가볍고 심한 정도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가지는 성질이 있다. 즉, 모든 병은 일정 정도 사람에게 어려움과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병이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은데 이런 설명은 너무나 평이하고 특이할 것이 없어서 초등학생조차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생각은 사람이 병(病)이라는 말과 병(病)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정보에서 형성시킨 관념으로 본다. 때문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질병에 직면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소극적으로 고통을 감내하면서 이것을 단순히 질병이 표현되어 나온 결과라고만 생각한다.
이런 그릇된 관념은 사람들이 질병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갖는데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식의 겉으로 드러난 인과관계는 사람을 실증과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병소–세균, 병독(病毒), 증식(增殖), 괴사(壞死) 등등–를 찾는 방법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질병이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는 통속적이지만 그 안에서 진리를 발현하는 심오한 현상을 잊게끔 오도한다. 그러나 병인(病因)을 어떤 병의 근본원인으로 보는 이론은 영원히 서로 다른 사람이 동일한 질병에 대해서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 즉, 이른바 “개체 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가령 어떤 병균이 일단의 사람들을 감염시켰을 때 그중 어떤 사람들은 발병하고 어떤 사람들은 발병하지 않는다. 또한 동일한 유전적 결함을 지닌 사람의 후손 중에도 누구는 병을 얻고 누구는 병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식의 인과관계가 통하지 않는다면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자. 질병이란 것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질병의 목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질병의 본질을 본다면 질병이란 일종의 영성을 지닌 것으로 곧 영체(靈體)이다. 또한 이런 영체의 영성(靈性)(=생명성)은 곧 질병의 각종 표현형식 중에 함축된 공통성질로서 병의 표현에 아무리 변화가 심할지라도 최종적인 목적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병의 영성은 아주 쉽게 질병발생의 개체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데, 이것이 누구는 병이 생기고 누구는 병이 생기지 않게끔 한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정도에 근거하여 고통을 줄 대상을 선택하고 누군가의 몸에 고통을 줄 것을 결정하면 곧 그의 체내에 모종의 방식으로 고통이 나타나게 한다.
병의 영성은 아주 깊은 층차에서 질병의 본질적인 특성을 대표하기에 우리 이 공간범위 밖에 있는 심층공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현대의 실증의학은 이 공간에 인식이 국한되어 있기에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의학은 보통 병의 원인을 “기맥불통(氣脈不通)”에서 찾으며 특이공능이 있는 사람들은 질병이 다른 공간에서 나타나는 본질을 “검은 기운”[黑氣]에서 찾는다.
이런 두 가지 인식은 비록 현대의학보다는 진상(眞象)에 접근한 것이지만 질병의 영성(靈性)을 드러내지 못한다는는 단점이 있다.
오직 법륜대법(法輪大法)만이 진정으로 병의 본질을 설명해 줄 수 있는데 이것이 곧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업력(業力)이라는 것이다. 업력은 “검은 기운”이나 “기맥의 불통” 뿐만 아니라 양의(洋醫)들이 인식하는 각종 질병의 근본원인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홍지 선생님께서는
○”그 업이란 어떤 것인가? 다른 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는 그 업, 그것의 미립(微粒)이 더욱 작을수록, 다시 말해서 그 과립(顆粒)이 더욱 작을수록 그것의 힘은 더욱 크다. 만약 그것이 우리 이 공간 중에 침투되어 올 때면 그것은 바로 미생물이며 가장 미시적인 병독(病毒)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말해 보라. 그 병, 그것은 우연한 것인가? 지금의 의학, 지금의 과학으로 그것을 인식한다면 인식할 수 없으며 다만 현존의 분자로 조성된 가장 큰 한 층의 입자로 구성된 이 한층 표면의 공간 중에서 표현되어 나온 일종 현상이라고 인식할 뿐인 것으로서 그는 병이 있게 되었다, 종양이 자란다, 어느 곳에 염증이 생겼다, 여하 여하하다고 인정한다.” (《미국에서의 설법》)라고 말씀하셨다.
이 글에서 가히 업의 과립(顆粒)은 생명성이 있으며 동시에 정체적인 생명성이 있음을 알아낼 수 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선택적으로 결정하여 누가 어느 때에 아프게끔 한다. 그러면 업력은 왜 이리도 잔혹하며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가?
이홍지 선생님께서는
○ “사람은 예전에 나쁜 짓을 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생기는 업력(業力)이 병이나 또는 시달림(磨難)을 조성하게 된다. 고통을 겪음은 바로 업력의 빚을 갚는 셈이다.”(《전법륜》)라고 말씀하셨다.
즉, 사람이 이전 생에 나쁜 일들을 하여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했기에 업력이 누적된 것이고 그렇다면 업력이 반대로 나쁜 일을 한 사람이 고통을 겪게 만들어 빚을 갚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주법리가 생명을 대하는 공정하고 정확한 이치이다.
사람이 나쁜 일을 함에는 큰 일도 있고 작은 일도 있으며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업력을 갚는데도 크기의 차이가 있으며 형상(形象)도 다양하게 나타난다. 업력이 그가 어떤 질병을 얼마나 많이 앓아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질병발생 시에 개체차이가 나타나는 근본 원인을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사람이 건강하고자 한다면 우선 덕(德)을 쌓고 선(善)을 행하는 것에서 시작해야한다. 고통을 겪는 것은 이전에 빚졌던 업력을 갚는 것이다.
단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일반적인 업력이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 사악의 무리들이 대법과 대법제자들에 대해 저지른 범죄는 그 업이 이미 병을 통해 갚는 정도를 벗어났으며 그들이 장차 당면할 것은 극히 두려운 것이다.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1/7/2/10781.html
인체생명우주>덕과 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