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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이야기3:대 사막의 충혼[大漠忠魂]

윤회 이야기3:대 사막의 충혼[大漠忠魂]

글:소련(小蓮)

【정견망 2005년 9월 7일】

* 머리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일인데 나는 땅에 대해 특별히 깊은 잠재의식이 있었다. 더욱이 학교에 다닐 때 부패하고 무능한 청나라 정부가 제정(帝政) 러시아와 일련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여 중국의 서북과 동북의 거대한 국토를 러시아에 할양한 데 대한 마음속의 비애는 무어라고 형용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단지 간단하고 간단하게 한 국민으로서 혹은 한 사나이로서의 애국 정서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내심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비애와 고통은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고통 속에서 시달리게 했다. 수련을 한 이후에야 점차 이러한 생각들의 내원이 어디에 있는지 비로소 명백하게 되었다. 아래에 이 기회를 통해 일의 자초지종을 말하고 나를 몇 십 년 동안 곤혹스럽게 했던 가슴속 매듭을 풀고자 한다. 또한 이 기회를 빌려 한 생명이 역사상 어떻게 문화를 창립했는지 설명해보고자 한다. 각설하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자.

*토지를 그리워했던 연유

청조(淸朝)의 강희대제(康熙大帝)――역주 : 청나라 제4대 황제로 1661~1722년까지 약 60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아들인 옹정제(擁正帝)와 손자인 건륭제(乾隆帝)에 이르기까지 3대 140여 년 동안의 태평성대를 이루어 흔히 이 시기를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른다――는 3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을 회복하여 중국을 통일하였다. 성조(聖祖 역주: 강희제의 시호)께서 민심을 잘 돌봐준 덕에 백성들의 생산 질서도 점차 전쟁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회복되었으며 조정에서도 위아래로 나날이 좋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680년대에 본래 중국과 그리 큰 접촉이 없었던 제정 러시아가 우리나라 동북쪽 변경에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강희 대제는 1685년에 두 번이나 군대를 파견하여 알바진 등을 점령했으며 1689년 9월 7일 차르 러시아와 평등조약인 《중․러 네르친스크조약(中俄尼不楚条约)》을 맺었다.

이 한 단락의 역사에 대해 중국인들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다. 당시 나는 조약을 체결한 후 국경의 순사(巡使)로 임명받았다. 이곳 검은 토지의 산수(山水) 속에서 밤낮으로 순찰에 임했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의 산림, 산봉우리와 그렇게 길지 않은 강인 우디하(烏第河), 그리고 그곳 토산물들이 희미하게나마 기억에 남아 있다. 밤낮으로 병사들을 거느리고 조국의 국경을 지키면서 절대로 외적이 침범하지 못하게 했었다! 나중에는 이곳에서 일생을 보냈다. 내가 이 한 생에 겪은 것은 너무나도 파란만장했다. 땅에 대한 잠재의식이 있기에 나는 비로소 이 일을 말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또한 금생금세(今生今世)에 이렇게 중한 정서를 품게 게 된 중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본문의 요점은 이것이 아니다. 그럼 지금부터 나와 함께 건륭연대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금 잉어의 보은으로 조원외(趙員外)가 아들을 얻다

건륭 황제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잠시 제쳐두고 일단 나 자신을 말해보기로 한다. 당시 승덕(承德)에는 유명한 피서산장(避暑山庄)이 있었는데 산장 부근에 하왕장(夏王庄)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이전에 이 마을에서 하씨 성을 가진 왕을 배출했기 때문에 현지 백성들은 모두 하씨 성을 갖기를 원했으며 6~70 호에 달하는 집들 중에 몇 집만 다른 성씨이고 모두 하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마을에 조(趙)씨 성을 가족이 살고 있었는데 집이 부유하여 가축이 아주 많았고 하인을 부리고 있었다. 집주인인 조원외는 똑똑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으며 부인인 주(朱)씨도 매우 섬세했으며 집안 살림이 매우 풍성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슬하에 자식이 없어서 늘 속을 태우고 있었다. 하루는 조원외가 갑자기 사냥을 하고 싶어서 사냥을 하러 나섰다. 도중에 못을 지나다 부인이 최근에 생선을 먹고 싶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에 물고기를 몇 마리 낚아다가 부인을 기쁘게 해주고자 했다.

그는 산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방법대로 기다란 나뭇가지 끝에 실을 맨 다음 바늘에 미끼를 달아 물속에 던졌다. 그러나 못 속에는 분명 수많은 물고기들이 놀고 있었지만 단 한 마리도 낚이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흘러 이제 해도 서산에 질 무렵 “더 이상 지체했다가는 부인이 집에서 걱정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만 돌아가려고 했다. 막 낚시를 거두려던 차에 마침 물고기 한 마리가 걸렸는데 건져보니 한 마리 잉어였다. 그런데 이 잉어는 다른 뭇 잉어들과는 달리 전신에 금빛을 뿌리면서 투명했는데 내장까지 환히 들여다보였다. 게다가 무게도 5~6근은 족히 나갔다. 조원외는 아주 기뻐하면서 잉어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부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부인! 내가 무엇을 잡았는지 보시오.”

마침 바느질을 하던 주씨 부인은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방에서 나왔다. 잉어를 보는 순간 부인의 안색이 변하더니 “어디서 나셨어요?”하고 물었다.

“부인이 요 며칠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오늘 마침 사냥을 나갔다가 아무 것도 잡지 못했는데 늦게나마 못에서 겨우 이놈을 잡았으니 어서 가져다가 끓이시구려.”라고 하면서 잉어를 들고 주방으로 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주씨 부인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왜 그러시오? 오늘 누가 부인을 화나게 했소?” 조원외가 얼굴에 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보세요! 이 잉어는 여느 잉어들과는 달리 금잉어랍니다!” 주씨 부인은 그가 이해하지 못하자 설명해주었다.

“금잉어가 어쨌단 말이오?” 조원외는 여전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보세요! 이 잉어는 전신이 투명하고 온몸이 금빛인데 이것은 그것이 물고기의 왕이라는 것을 설명해요. 아시겠어요, 물고기 왕이랍니다.”

“사람에게 왕이 있고 백성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물고기도 왕이 있다니 참 별일이구려!” 조원외는 여전히 믿지 않았다.

“용(龍)에 왕이 있다는 말은 들으셨지요? 사자도 왕이 있다는 것은 사냥을 하시면서 보시지 않으셨어요?”

“그거야 보았지. 언젠가 한 번 사냥을 나갔다가 사자 무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중에 한 녀석이 크게 포효하자 다른 사자 몇 마리가 나를 향해 덮친 적이 있소. 그 순간 다행히 나무 위로 올라갈 수 있었고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서 겨우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지요.”

“그렇다면 물고기도 왕이 있다는 것이 희한안 일은 아니지 않겠어요.”

“그거야……”

이때 조원외가 무심코 잉어를 바라보았는데 금잉어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기를 놓아달라고 애걸하는 것 같았다. 이때에 조원외도 마음이 누그러졌다. 그는 주씨 부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부인 생각에는 어찌했으면 좋겠소?”

“놓아주세요. 지금 바로 놓아주세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주씨 부인은 매우 단호하게 대답했다. 조원외는 하늘을 바라보더니 난처해하면서 날이 이미 어두워졌으니 우선 물에 넣었다가 내일 못에 갔다 주면 어떨지 물었다.

“그럼 빨리 물에 넣어주세요” 말을 마치고 주씨 부인은 내실로 들어갔다.

조원외는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부어놓고 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풀을 따다가 물위에 띄워놓았다. 이때에 그 금잉어는 아주 기뻐하면서 힘차게 헤엄을 치며 왔다갔다 했다

그날 밤 주씨 부인은 꿈을 꾸었다. 그들이 좋은 일을 했기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 보은(報恩)하고자 했다. 이튿날 날이 아주 밝았는데 그들은 대야에 있던 잉어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다. 다급해진 두 부부가 사방을 찾아보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묵묵히 금잉어를 보우해 주실 것을 하늘에 비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 일이 있은 지 3개월 후, 부인 주씨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었으며. 온 집안에 즐거움이 넘쳐났다. 마을 사람들과 인근 마을에서 모두 문안을 왔으며 모두 주씨 부인의 상황에 관심을 가졌다. 일반적인 아기들은 10개월이면 출생하는데 유독 이 아이만은 22개월이 되어서야 출생했다. 출생할 때 보니 아기의 두 눈은 반짝반짝 하며 아주 영준(英俊)하게 생겼고 신체는 금색으로 투명하게 보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아기 이름을 충옥(衷玉)이라고 불렀는데 바로 옥처럼 투명하다는 뜻이다. 아기는 사냥꾼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어릴 적부터 무예를 배웠으며 후에는 우연히 한 유명한 무술사범을 만나 무공을 연마하였다.

* 위험에 빠진 건륭제를 구출

충옥(衷玉)이 16살 되던 해에 마침 건륭황제가 친히 승덕(承德)에 와서 사냥을 하게 되었다. 한 번은 건륭이 탄 말이 사냥 중에 호랑이에게 놀라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산장 밖으로 나갔는지도 몰랐다. 이때 마침 어린 충옥(衷玉)은 몇몇 아이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시합을 하고 있었다.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건륭이 탄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충옥(衷玉)은 말이 놀란 것임을 알고 쏜살같이 달려가 말고삐를 틀어잡고 죽어라고 잡아당겼다. 그의 행동에 놀랐는지 아니면 충옥의 힘이 아주 강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이 멈춰 서게 되었다.

건륭황제는 좀 지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아! 네가 과인을 구했느냐?! 어서 무릎을 꿇고 상을 받지 않고 뭐하느냐?”

이때 황제의 시종들도 달려왔다. “너희가 만세(萬歲) 황상을 뵙고서도 무릎을 꿇지 않고 뭐하느냐?!”

“평민[草民]이 황제폐하를 배알합니다. 만세(萬世) 만세(萬歲) 만만세(萬萬歲)!”라고 하면서 어린 충옥과 아이들이 분분히 무릎을 꿇었다.

이 말은 충옥(衷玉)이 마을의 연로하신 분들이 이야기를 할 때 들었던 것인데 뜻밖에 오늘 진짜로 황제를 만나 사용하게 되었다. 건륭 황제가 잠시 충옥(衷玉)을 자세히 살펴보시더니 매우 기뻐하면서 말씀하셨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짐을 따라 수도에 가고 싶지 않으냐? 내 너에게 가장 좋은 스승을 시켜 글과 무예를 가르쳐주마. 어떠냐?”

“소인 조충옥(趙衷玉), 이 일을 부모님께 상의 드린 후에야 대답할 수 있겠습니다.”

“어서 빨리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리지 못할까. 황상의 말씀은 성지(聖旨)이니 반드시 따라야한다. 하물며 이제부터 네게는 끝없는 부귀영화가 따를 것이다.”라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말을 거들었다.

“만세 폐하의 말씀은 성지이시지만 그래도 저는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상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예의가 아닌지요, 누구도 예의에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얘야! 그렇다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가거라. 언제고 오고 싶으면 부모와 상의하여 산장으로 와서 나를 찾거라. 내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마.”

건륭 황제가 크게 웃으시면서 말했다. 말을 마친 후 건륭 황제는 호위병들과 시종들을 데리고 산장으로 돌아갔다.

* 황제를 따라 상경하여 대업을 이루다

조충옥은 아이들과 헤어져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방금 있었던 일을 말씀드렸다. 부모님은 도무지 자신들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우리 집의 큰 복이구나. 얘야 가거라. 옛 사람이 말씀하시길 “학문과 무예를 잘 배우면 제왕의 집도 살수 있다고 했다.” 사나이로 태어나 큰 뜻을 이루어야 하지만 반드시 기억할 것은 어느 때든 막론하고 백성들을 못살게 굴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주며 절대 악인을 도와 좋은 사람들을 해쳐서는 안 된다.” 라고 거듭 당부하셨다.

이렇게 조충옥은 건륭 황제의 신변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건륭 황제는 정말로 자신의 말을 지켰으며 충옥(衷玉)에게 가장 좋은 문무(文武) 스승을 배치해 주었다. 그는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나 성격이 담담하고 말수가 적었다. 궁궐 내의 암투에 대해서는 종래로 상관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28세 때 감숙성 일대에서 병사들을 이끄는 독통(督統)으로 임명받았다. 그 후 국경과 민족 분쟁에서 연속으로 전공을 세워 50세가 되어 부통솔(副統率)로 진급했다. 이때 충옥(衷玉)의 자손은 이미 온 집안에 가득했다.

또 2~3년의 시간이 흘러 한번은 부인 진(陳)씨가 기어이 이리(伊犁)로 놀러 가자고 하여 충옥은 할 수 없이 부인을 따라 나섰다. 이리에 막 도착했을 때 러시아 군대가 바이칼 호 일대를 침입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정에서도 조서가 내려와 충옥으로 하여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다급히 바이칼 호 일대로 출발하라고 했다. 충옥(衷玉)은 명령에 따라 적과 맞서기위해 길을 나섰다.

* 러시아 군대와의 결전과 큰 깨달음

그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아라무투(阿拉木图) 부근에 이르렀을 때 차르의 러시아 군대도 이미 국경선을 넘어 중국 영토 내로 침입해있었다. 당시 러시아 군대는 약 30만 명이었다.

진영을 만들고 군대를 주둔시킨 후 충옥(衷玉)은 장군들을 불러 적을 물리칠 책략을 토의했다. 어떤 사람이 러시아 군대를 사막으로 유인하면 물이 없어서 큰 혼란에 빠질 것인즉 그 때 기회를 노려 치자고 했다. 충옥(衷玉)의 생각에도 좋은 것 같아 그렇게 하는데 동의했다. 그리하여 병법에서 말하는 손님을 청해 항아리 속에 넣는 계책을 쓰기로 했다. 바로 30만 대군을 사막 깊숙이 끌어들여 물이 다 떨어진 후에 공격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때의 상황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처절한 전투였다. 하늘에선 모래 바람이 일었고 땅에서는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한데 뒤엉켰으며 북소리가 요란했고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갔다. 도처에 시체가 널렸으며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아군은 유리한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엄호하면서 적들을 거의 전부 소멸시켰다.

전체 전투는 여명이 틀 때 시작해서 등불을 켤 무렵에야 끝이 났다. 아군 역시 침통한 대가를 치렀는데 10만 대군중 전투가 끝난 후 나를 포함해서 몇 십 명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이로써 이번 전쟁이 얼마나 처절했는가를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망망한 사막은 그야말로 중국 군사들의 피로 물들었으며 피로 물든 시체들을 바라보는 충옥(衷玉)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듯이 아팠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당대(唐代) 조송(曹松)의 시 한 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물나라 강산이 온통 싸움판이 되었구나
백성들은 무엇으로 나무 베고 풀을 베리.
그대에게 이르노니 제후 된단 말 하지 마시오.
한 장수 공 이루려면 만 명의 뼈가 마른다네.
澤國江山入占圖,生民何計樂樵蘇?憑君莫話封候事,一將功成萬骨枯!”
(역주: 이 시는 만당(晩唐)시기에 조송이 황소의 난이 있던 해에 쓴 “기해세”(己亥歲)란 제목의 시이다. 한 장수가 공을 이뤄 제후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하는지 전쟁의 참혹함을 읊고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마구 솟아났다.

개선하여 북경으로 돌아오자 건륭 황제는 그를 제후로 책봉하고자 했다. 그는 단호히 사양하며 고향에 돌아가 만년을 보내고 싶다고 요청했다. 처음에 건륭 황제는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의 태도가 간절한 것을 보고는 결국 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이리하여 충옥(衷玉)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하왕장으로 돌아왔으며 부모님을 모시고 전원생활을 보냈다……….

* 후기

사람에게 비록 삶과 죽음이 있긴 하지만 이 한 단락의 역사는 내 기억 속에 아주 깊이 박혀 좀처럼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 바이칼 호수의 물결과 부근 사막의 강렬한 삭풍(朔風)과 밭을 생각하노라면 너무나도 감개가 무량하다! 한 수련인으로서 우리가 무엇이든 지나치게 대한다면 모두 집착이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이 한 단락의 역사를 써냄으로써 내게 있던 잠재의식을 철저히 내려놓고자 함이다.

동시에 또 세인과 동수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인류의 전반 문화는 정말이지 모두 사부님께서 우리를 이끄시고 창립하신 것이다!

소중히 여겨라! 이후의 길을 잘 걷고 또한 인간 세상에서 천백 대(代)를 전생해 온 것을 헛되이 하지 말자!

문장발표:2005년 9월 7일
문장 분류 : 【생명탐구】
원문위치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5/9/7/3376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