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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천공: 용문석굴 노사나불상의 인연

작자 : 오설(傲雪)

[정견망]

낙양 고성의 이수하(伊水河) 호반에 천년된 노사나대불상(盧舍那大佛像 비로자나불)이 단정하게 앉아 있다. 그런데 용문 노사나대불상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자비롭고 상화로운 모습에 흡인되어 시공을 초월하여 부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천 년을 이어오면서 얼마나 많은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그 불상을 보러왔는지 모른다. 사실 용문석굴 노사나대불상을 주목하는 또 하나의 원인은 바로 부처님의 진정한 법신이 그곳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은 일개 수련자의 깨달음으로 인연 있는 중생을 향해 용문석굴 노사나 대불상의 인연을 말하려 하는데 이는 용문석굴 노사나대불의 소원이기도 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서 법을 전하실 때 뭇 제자들에게 말법시기의 난상(亂象)과 미래 우주 정법의 일을 알려주셨다. 또 말세에 미래불인 미륵불이 법을 전하는 정황에 대해서도 상세히 강술하셨다. 역사적으로 전해온 것은 불완전하여(불교의 경서는 처음에 구두로 전해지기 시작했으며 500년 이후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많은 일들은 완전히 기록되지 못했고 심지어 오류가 생겼다. 그러나 일부 불경 중에서 우리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불설법멸진경(佛說法滅盡經)’에는“내 법이 멸할 때를 비유적으로 말하면, 등불이 꺼지려고 할 때 불빛은 더욱 밝다가 곧 꺼진다. 내 법이 멸할 때 역시 그렇게 꺼진다. 그 후를 숫자로 말하기 어렵다. 아마 수천 혹은 수만 년 후에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부처가 되는데 천하가 태평하고 독기가 완전히 소멸된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미래에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정법(正法)하는 것을 예견하셨는데, 불가문화(佛家文化)가 중국 땅에서 개창되고 유전하여 미륵불이 말세에 정법할 수 있도록 문화적 기초를 다지는 안배를 상세하게 해 놓았다고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말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불교는 처음 인도에서 생겨났지만 역사상 인도에서는 한때 사라졌었고 최근 2세기 전에 겨우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그중 하나의 심각한 교훈은 석가모니 제자 중에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경지에서 깨달은 것을 불타의 말로 삼은 일이 나타났으며 자기가 좋아하는 불타의 말을 선택하여 전했다. 그러므로 석가모니불 원래의 내포를 최대로 보존하지 못하여 순정한 불법이 전해 내려오지 못했다.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석가모니불의 수기(授記) 제자는 모두 역사 중에 분분히 중국 땅에 환생되어 수행하도록 안배되어 왔는데 그 한 가지는 중국 땅에 태어날 미륵불과 연을 맺기 위한 것으로 이는 불가 문화 체계를 중국 대지에서 미륵불이 미래에 정법하는 데 사용하도록 건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중의 고대 인도에서 석가모니불의 수기 제자들은 원만하고 지혜가 있으며 진리를 장악한 광명한 영혼들이었으나 그들은 모두 이 지방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인체에 광명한 진리의 존재가 없으면 인류가 표명하는 문화는 인성이 우매한 인성에 의해 암흑으로 이끌려가게 된다.

석가모니 제자들은 분분히 중국에 환생했고 불교는 한나라 때 중국에 전해진 이래 중국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인간세상에 전해지고 발전한 것은 모두 신(神)이 밀어주고 신령의 인도로 기적이 나타나서 된 것이다. 인류의 신앙은 초현실적인 신적과 보조가 있어야 연속될 수 있다. 한때 석가모니를 따라 수행했던 대덕지사들은 나중에 정법할 때 중국에 필요한 불가문화를 연출하기 위해 다양한 신분으로 생생세세 윤회하면서 수련하고 생생세세 도를 말하고 경을 설법하거나 신통을 나타냈다. 수백 년에 걸친 고승들의 공동 노력을 통해 불가 문화는 중국에서 널리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중국에서 여러 차례 황제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불법(佛法)을 믿고 불교문화가 널리 사람들 심신에 수익을 얻고 도덕이 온건해지도록 하게 된 것이다.

낙양 용문 노사나대불의 건립은 석가모니불의 수기제자 한 사람과 연관이 있다. 수나라 말 당나라 초기, 법륜성왕(法輪聖王)이 세상에 내려가 미래에 법을 얻을 중생과 인연을 맺을 때 석가모니불의 한 수기제자가 여러 생에 수행하여 성왕과 인연을 맺고 성왕이 인류문명을 개창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이씨 황족의 태에 들어가 당태종의 9번째 아들인 진왕(晉王) 이치(李治)가 되었다. 어릴 때 이름은 치노(雉奴)였고 자(字)는 선(善)이었다. 오늘 중국의 공산당은 의도적으로 고대 중국문명역사를 고쳐서 먹칠하는 바람에 당고종 이치는 세상 사람들에게 유약하고 무능한 인상을 주게 되었다.

사실 이치는 평생 태종의 가르침을 깊이 받았다. 장손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모친을 잃은 이치는 친누이 명달(明達 아명은 시자)과 함께 황궁에서 직접 태종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직접 자식을 키운 경우는 태종 외에 드물다. 이같이 깊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치노와 시자뿐일 것이다. 심지어 태종이 조정의 일로 바쁘게 지낼 때도 어린 시자를 품에 안고 있었으며 옆에는 이치가 서 있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진왕과 진양공주는 어려서 편부슬하(아버지 밖에 없다는 뜻)가 되어 아버지가 직접 길렀다.”고 했다. 남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태종의 신변을 따랐다. 태종은 늘 공무를 처리할 때도 명달을 무릎에 안고 있었다. 진양공주는 매우 영리했으며 절대 소란을 피우거나 크게 울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쁘고 엄격한 당태종에게는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대신들이 상주문을 올리면 당태종은 화를 낼 때가 있었다.

어린 공주는 안색을 잘 관찰하다가 부황이 노한 것을 알면 귀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화를 내지 마세요, 저하고 놀면 좋지 않아요?”당 태종은 이 말을 들으면 즉시 안색이 밝아지며 냉정해져 목을 베려던 생각을 바꾸거나 중벌을 내리려던 것을 가볍게 처벌 했고, 기각하려던 것을 허가했으며, 매우 질책하려던 것을 멈추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공주의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도 공주를 보배로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어 공주만 보면 몹시 귀여워했다. 대신들은 상주할 때 공주가 그 자리에 있으면 그들은 좀 편안했으나 공주가 없으면 그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태종의 부정(父情)은 알만한 일이다.

이치가 성장한 후 태종은‘제범(帝范)’12편을 지어 태자 이치에게 주어 그가 어떻게 황제로서 행위준칙을 잘할 것인가를 가르쳤다. 22세에 등극한 이치는 태종의 유지를 받들어 인덕으로 천하를 통치하여 사해가 화평해졌는데 불법을 널리 전하고 유학을 존중했으며 불교와 도교를 믿으면서 삼교(유불선)를 함께 허용하여 당나라 문화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한번은 대리시경(관직이름) 당임(唐臨)이 고종에게 보고하기를,“감옥에 갇힌 범인이 50여 명뿐인데 그중 두 사람만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할 정도록 태평했다. 당 고종은 대외적으로 병사를 보내어 평양을 포위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요동에 9도독부를 설치했으며 삼국-돌궐, 사결, 백제를 치고 그 왕을 사로잡았으며 토번을 대파하고 강토를 넓혀 당나라는 이전에 없던 경계로 확대하여 당나라의 강토를 최대로 넓혔다. 이는 바이칼 호와 조선, 한국, 월남, 파키스탄, 아프간 대부분의 영토를 포함시켰다. 천재 시인 왕발은‘격영왕계(檄英王雞)’같은 아부하는 글을 썼기에 고종에 의해 파직되고 패왕부로 축출되었다. 나중에 왕발이 후회하고 뉘우쳐 상원 2년(695년) 9월 중양절에 홍주에서 등왕각에 올라 불후의 명작‘등왕각서(滕王閣序)’를 지었다. 당 고종은 태자로 있을 때 현장법사에게 부탁하여 보살의 계를 받았다. 나중에 현장이 태종을 대신하여 삼장경의 서문을 지을 때 어느 한 편의 글 보살경 서문의 후기가 있는데 바로 고종황제가 태자였을 때 성지를 받들어 지은 것이다. 그 후 당 삼장법사가 657부의 경서를 번역하는데 힘을 많이 보태주었다.

낙양 용문석굴 노사나대불상은 당고종 초기에 착공하여 함형 3년(672년) 황후 무측천이 연지백분 2만 관을 찬조하여 상원 2년(657년)에 완공했다. 노사나불은 범문으로‘Locanabuddha(산크리스트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불의 법신불의 칭호이다. 노사나의 의미는 지혜가 광대하여 광명이 널리 비친다는 뜻이다. 당 고종이 친히 노사나불상의 건축을 주재했으며 부처의 위엄이 중원에 머물며 중생들을 수호하여 말세에 미륵의 법을 편안히 얻기를 희망했다.

구(舊)우주의 안배 중에 당나라부터 시작하여 인류는 말법시기로 들어섰다. 구세력이 인간에게 안배한 하늘의 상은 바로 당고종 후 출현한 측천무후가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되게 한 것이다. 여자가 황제가 됨으로서 음양반배로 인류 말법시기 시작을 예시한 것이다. 나라 이름을‘주(周)’로 고친 것은 이번 문명 중에서 특수한 역사주기(周期)의 완결을 암시하는 것이다.

용문석굴이 당대(唐代)에 시작하여 대량적으로 미륵상을 조각하는 일이 중요 특징이 되었는데 이 역시 역사상 중생을 위해 미륵불이 장차 하세하여 널리 법륜불법을 전할 것임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특별히 용문‘마애삼불감’ 중에 전통적인 석가모니불을 배치하는 방식을 바꾸어 미륵불을 주존(主尊)으로 중앙에 두어 후세에 미래 미륵불이 장차 큰 법륜(法輪)을 전하여 법고를 울리고 창궁을 바로잡으며 중생을 널리 구도하는 것을 예시한 것이다.

대당의 시간에서 천 년을 뛰어넘은 어느 날,‘진선인(眞善忍)’불법의 믿음을 견지한다는 이유 때문에 공산당의 박해를 받아 13년간을 떠돌아다니던 어느 서생이 노사나대불 면전에 도착했다. 서로 마주 보고 말이 없는데 은은하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천년의 풍우를 지나 대불은 이미 팔이 손상되어 앉아 있으나 여전히 이전처럼 머물고 있었다. 불자는 1천 년의 윤회로 몇 차례의 속세를 거쳐 예전의 의지를 아직도 견지하고 있다.

불자(佛子),“노사나대불님, 저는 약속을 지키려고 왔습니다. 당신이 천 년 동안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미륵성왕의 제자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뭇 대법도들은 지금 오늘 사악의 박해 중에서 진정 정법수련자의 위대함을 나타내며 지나왔는데, 노사나불 당신같이 광명이 널리 비추며 역사의 신기원을 영접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노사나불,“심히 위안이 되는 군, 하지만 아직 많은 중생들이 미륵성왕의 복음을 듣지 못해 대단히 위험하지 않은가. 나의 목소리를 인연 있는 중생들에게 좀 들려주기 바라네….”

발표시간 : 2012년 10월 29일

정견문장 : http://www.zhengjian.org/node/113865